눈을 떠보니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는 어느 우주 한 가운데 있다.

잠들어 있던 그가 깨어나 침상에서 내려와 의식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벗고 빠져나오는 한 생명의 탄생을 보는 것만 같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지구 종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확률은 낮지만 단 한 번의 기회에 희망을 걸고 

우주로 보내진 중학교 교사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시작은 우주에 홀로 남겨져 외로운 한 존재로부터 문을 연다. 

 

그는 혼자다. 그리고 외롭다.

그건 아마 어마어마한 우주 속에 지구라는 별이 갖는 느낌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는 그 외로움의 극단에서 진짜 희망이 어디서 피어날 수 있는가를 

눈도 코도 입도 없이 바위에 거미 같은 다리가 달린 외계인과의 만남을 통해 보여준다. 

 

첫 만남은 공포지만, 그것은 상대가 보여주는 환대의 제스처 앞에 반가움으로 바뀌고

그들은 조금씩 소통을 해나가며 공통의 목표를 공유한다. 

그것은 각자의 별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고 

각자의 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이 바위처럼 생긴 외계인에게 

'로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에게 어울리는 목소리도 정해준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라이언 고슬링의 모노드라마가 

로키를 만나 함께 하는 버디 무비가 되고,

광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던 스펙터클은

두 우주의 존재들이 펼여내는 우정의 드라마가 된다. 

 

그리고 지구를 구하고 우주를 구하는 그 거창한 일은 결국

나와는 다른 존재를 환대하고

그와 함께 협력하며

나아가 서로를 구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보여주는 우주는 그래서 

실제 별들이 펼쳐진 우주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 외롭게 던져진 하나하나의 존재들이

저마다의 우주라는 걸 그려낸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자살미션'인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기 전

그레이스가 겪었던 갖가지 갈등과 그 속에서 함께 한 사람들과의 시간들은

하나의 우주가 머금고 있는 기억들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을 구하고, 자신과 다른 타자를 구하는 것은

그들이 함께 한 우주를 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일이 된다. 

 

어찌 보면 영화는 이 단순한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것인데

보는 이들은 어찌할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된다.

그건 그 단순한 깨달음과는 정반대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의 행태들이 저들의 우정과 너무나 비교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고실험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그래서

무엇이 이 외로운 우주에서(삶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우린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것.

돌 하나에도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 생명을 느끼는 것.

그것이 해답이 아닐까.  

프로젝트 헤일메리

자연(自然)은 한자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자연이 벌이는 일들은 그래서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살고 죽는 일은 그냥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자연처럼 '그냥 그러하다'고 살고 죽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햄넷'은 그런 점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여진 어찌할 수 없는 거리가 만들어내는 비극을 그리면서

예술이 그 비극을 어떻게 승화해 그 사이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는가를 그린 작품으로 다가온다.

햄넷

'햄넷'은 11살의 나이에 사망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들이다.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이자 동명의 소설을 쓴 매기 오파렐은

11살에 사망한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햄릿'이라는 걸작의 탄생 사이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매기 오파렐이 영감을 얻은 스티븐 그린블랫의 에세이 '햄넷의 죽음과 햄릿의 탄생'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햄넷의 죽음이 햄릿을 탄생시키는 그 과정을 담는다.

햄넷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마치 자연이 잉태한 듯한) 아녜스(제시 버클리)는

어느 날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한 라틴어 교사 윌리엄(폴 매스칼)의 구애를 받는다.

이내 사랑에 빠진 그들은 아이를 갖게 되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된다.

하지만 결혼 후 극작에 대한 갈망을 풀지 못하는 윌리엄이 자신을 잃어가자

아녜스는 그를 런던으로 떠나 보낸다. 

떨어져 지내지만 쌍둥이 남매까지 낳아 세 아이를 키우는 아녜스와

런던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생기를 찾고 고향을 오가는 윌리엄은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

햄넷

하지만 이들의 행복에 자연이 드리운 그림자는 비극을 몰고 온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쌍둥이 남매 중 몸이 약하던 딸이 감염되지만

햄넷은 '용감하게' 사신의 시선을 속여 자신의 삶을 동생에게 주고 대신 죽는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냥 벌어진' 자연의 일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인간의 고통(특히 부모의)은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이다. 

"넌 꼭 살거야"라고 애써 말해줬지만 끝내 죽은 아들 앞에 아녜스는 절망하고

그 아들의 임종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윌리엄은 죄책감에 빠진다. 

절망 속에서도 윌리엄은 연극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고 

그것은 아녜스를 분노하게까지 만든다.

햄넷

윌리엄이 연극으로 성공해 세운 작품이 희극이 아닌 비극이고

그 비극의 제목이 아들의 이름을 딴 '햄릿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아녜스는

런던으로 와 그 연극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아들의 이름을 함부로 쓴 그 연극에 분노하지만

어린 햄넷을 닮은(자랐으면 아마도 그렇게 컸을),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가 등장하면서부터

아녜스는 연극에 몰입하게 된다.

또한 햄릿의 죽은 아버지 역할로 윌리엄이 분칠을 한 채 연극에 등장하자

비로소 아녜스는 윌리엄이 얼마나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했고

그 마음을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담아내려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차라리 죽고 아들을 살렸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진 것이다. 

햄넷

거대한 숲처럼 꾸며진 연극무대에 난 작은 문은

아녜스가 잉태되어 있었고, 첫번째 아이를 낳았던 숲의 동굴 같은 구멍을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 곳(자연)으로부터 삶이 시작됐지만

그 구멍은  그 삶이 다시 되돌아갈 죽음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죽은 매를 그 곳에 묻어준 것처럼.

하지만 갑작스런 죽음에 부부는 아들을 그 자연(구멍)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윌리엄은 연극 무대에 그려진 작은 문을 통해

아들을 비로소 자연으로 되돌려 준다. 

예술이 불가항력적인 자연 앞에 놓여진 인간의 비극을

애도하고 승화함으로써 이를 수용하게 해주는(자연으로 되돌리게) 장면이다. 

햄넷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죽음은

당사자들만의 애도와 공감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그걸 보는 모든 이들의 애도와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스스로 그러한) 일이고

모든 인간이 결국에는 겪는 것이라는 걸 알려줌으로써

우리를 울면서도 웃게 만든다. 

햄넷

무심하지만 무자비한 자연과

그 앞에서 너무나 사랑했기에 어쩔 수 없이 비통해하는 인간

그리고 이를 애도하고 공감함으로써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예술.

'햄넷'은 이 거대한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술의 비의를 담아낸 명작이다.

(사진:영화'햄넷')

20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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