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은 왜 점점 슬퍼지는가

 

30년 전 한 사내가 뉴기니의 해변을 걷다가 얄리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이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백인들은 짐이 많은데 우리 뉴기니인들은 짐이 적은 걸까요?” 뉴기니에서 짐이라는 단어는 재산이라는 뜻이다. 이 뉴기니인 얄리의 질문은 지극히 단순해 보였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사실 같은 지구에 살면서도 왜 누구는 부자로 살게 됐고 또 누구는 가난하게 살게 됐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는 그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그 해답은 <총,균,쇠>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쓰여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그는 이 책으로 1998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사진출처:KBS)

얄리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총, 균, 쇠이다. 즉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삶의 분균형이 생길 수 있었던 원인이 그들이 발명한 총과 그들이 보유한 균(그들에게는 내성이 생겼지만 원시부족에겐 치명적인 이를테면 천연두 같은),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벼려진 칼을 생산하게 해준 강철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생겨난 현재의 빈부가 거기 사는 부족들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유럽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미리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유럽인은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그렇다면 거꾸로 이들이 ‘운이 좋아’ 갖게 된 총, 균, 쇠에 무참히 쓰러져간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요구된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다시 읽히고 다시 주목되는 건 바로 이런 자각 때문일 게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 오면서 서구인들의 사실상의 정복 전쟁을 마치 신대륙 발견 같은 문명의 전파로 보는 그들 중심적인 시각에 대한 반성은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계속 되고 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다수와 소수의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의 논리로서 경쟁보다는 공존의 의미를 찾는 건 결국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이 초래한 전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우리가 이미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최근 들어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남극의 눈물> 같은 눈물 시리즈 다큐멘터리가 오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적인 새로운 시각으로 이 공간을 다시 바라보기 위함이다. 아마존에 들어간 이들은 도시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오지일 수밖에 없는 그 곳에서 벌거벗고 살아가는 원시 부족들의 삶이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 삶일 수 있다고 증언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도시의 침탈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그들의 삶을 아프게 포착해낸다. 그들의 눈물이 우리들의 풍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다시 자각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 프로그램 또한 이 슬픈 정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고 있다. 최근 이 프로그램은 일부 장면들이 과장되게 연출되고 때로는 섭외된 원주민들을 출연시켜 조작방송을 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으로 홍역을 겪기도 했다. 물론 <정글의 법칙>은 그 기획의도가 서구의 대표적인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어 그릴스의 프로그램이 제목처럼 인간과 자연을 여전히 대결구도로 그리고 있다면, <정글의 법칙>은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 다시 찾아내는 가족개념이라든가 원주민들이나 자연과 도시인이 어우러지는 공존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껴지는 비애감은 이러한 좋은 의도로 찾아간 카메라조차 거기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일 게다. 이미 도시의 바람을 쐰 원주민들은 과거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공간에 머물지 못하고 도시로 떠나기 일쑤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에 가서 목격한 것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살아왔던 공간에서 벗어나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과거에는 백인 침략자들을 위협하곤 했던 말라리아가 이제는 도시에 모여든(전염이 강해졌다)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현실이다. 아마도 수많은 방송사들이 이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재조명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어도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을 도시로 끌고 와 결국은 파괴하는 행위가 된 것은 아니었을지. 그들의 삶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혹여나 방송 프로그램으로서 도시인들의 시각과 욕망을 더 투영한 것은 아니었을지.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정글의 법칙>이 정글 속에서 발견한 미덕은 뭐든 문명의 이기를 덕지덕지 붙인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그것들을 떼어내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진짜 삶의 의미일 게다. 그들은 문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자연 뿐인 그 깊은 정글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네온사인 불빛대신 별을 보기 시작했고 자동차 소리 대신 새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이 소비되는 통에 그 가치를 알 수 없었던 한 끼 식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고, 따뜻한 집에 안락한 침대에 널브러져 진짜 안락의 의미를 모르던 우리들에게 그저 비 피하고 등 펼 수 있는 곳에서의 하룻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정글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시선으로 정글을 바라본 것일 지도 모른다. 진짜 정글은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그 자체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존의 눈물>에 이어 <남극의 눈물>을 찍고 돌아온 김진만 PD는 이 ‘조심스러움’에 대해 필자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희가 황제 펭귄을 찍을 때도 짝짓기부터 산란과 부화 과정을 쭉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으로부터 애정이 우러나더라고요. 어제 아팠던 펭귄들이 오늘 가보면 얼어 죽어가고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정말 마음이 아프죠. 규정 때문에 펭귄들이 알을 품을 때는 70m 안쪽으로는 접근 자체를 못해요. 그러니 만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죠. 만약 규정을 어겼다가는 바로 쫓겨납니다. 촬영하는 동안 호주기지 대원들이 내내 감시를 하고 있어요. 새끼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면 옷 안으로 넣어주고 싶고 대피소로 데려가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먹이고 싶었어요. 그러면 바로 원기를 찾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가슴이 미어져도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이 얘기는 지금 현재 원주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방적인 시선과 그 조심스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글의 법칙>의 논란 속에서 불쑥 불거져 나온 몇몇 이야기들은 또 다른 비극이 정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만든다. 실제로 원주민들은 이제 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위협적인 동작을 연출하고,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사냥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조금 심한 농담 속에는 감독이 “액션!”을 외치면 옷을 하나 둘 벗고는 원주민 차림(사실은 거의 벌거벗은)으로 카메라 앞에 나선다는 얘기까지 돌고 돈다. 물론 이것이 모두 사실일 리는 없을 테지만 어쨌든 카메라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원주민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 정복의 시대에 원주민들을 정글에서 몰아낸 것이 총, 균, 쇠였다면 이제 정보의 시대에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가 아닐까. 카메라는 심지어 그 카메라의 목적이 그들의 삶을 지켜내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그들의 삶 속에 도시의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도시에 그들의 삶조차 상품화하고 대상화시켜버린다. 따라서 카메라의 세례(?)를 받은 원주민들은 더 이상 과거의 원주민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진다. 카메라는 그래서 자본주의의 첨병인지도 모른다. 정글이나 오지마저도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 어느 것이든 상품화해버리는 자본의 속성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암울한 징후처럼 보인다. 이제 카메라는 어디든 들어가고 그래서 그 내밀한 정글을 파헤쳐 그들의 삶을 하룻밤의 오지 체험으로 바꾸고 있다. 또 그렇게 카메라를 따라 들어간 자본은 그 원주민들의 삶 또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많은 원주민들이 카메라가 영혼을 뺏어간다고 믿었던 것은 그만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 아닌가. (이 글은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가난으로 모든 걸 다 잃고 팡틴이 부르는 이 노래.

아프고 힘겨운 삶을 얘기하지만

그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노래.

그래서 위로가 되는 노래.

수잔 보일이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모두의 냉소적인 시선을 단박에 눌러버린 이 노래.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모두에게 위안이 되기를.

 

I Dreamed A Dream

 

I dreamed a dream in times gone by
난 흘러간 시간에 꿈을 꿨네
When hope was high
희망은 높았고
And life worth living
삶은 가치가 있었을 때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난 사랑이 절대 안 죽을 거라 꿈꿨네
I dreamed that God would be forgiving
난 신이 용서할 거라 꿈꿨네
Then I was young and unafraid
그리고 나는 어렸고 두려움이 없었고
And dreams were made and used and wasted
꿈들은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버려졌네
There was no ransom to be paid
지불해야 할 몸값이 없고
No song unsung
불러지지 않은 노래가 없고
No wine untasted
맛보지 않은 와인이 없네
But the tigers come at night
하지만 호랑이는 밤에 오지
With their voices soft as thunder
그들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부드럽고
As they tear your hope apart
그들이 너의 희망을 찢어 버릴때
And they turn your dream to shame
그리고 그들이 너의 꿈을 부끄러움으로 만들어 버릴때
He slept a summer by my side
그는 내 옆에서 한 여름을 잤지
He filled my days with endless wonder
그는 내 삶을 끝없는 놀라움으로 채웠지
He took my childhood in his stride
그는 내 어린 시절을 그의 걸음에 넣었고
But he was gone when autumn came
하지만 가을이 오자 그는 가버렸지
And still I dream he'll come to me
그리고 여전히 난 그가 돌아오기를 꿈꾸지
That we'll live the years together
우리가 오래오래 같이 살기를
But there are dreams that cannot be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꿈들이 있고
And there are storms we cannot weather
또 견딜 수 없는 폭풍도 있지
I had a dream my life would be
난 꿈을 꿨지, 내 삶이
So much different from this hell I'm living
지금 살고 있는 이 지옥같은 상황에서 정말 많이 달라지기를
So different now from what it seemed
그것이 어떻게 보이던가는 지금 너무 많이 달라졌지
Now life has killed
이제 삶이 내가 꾸었던 그 꿈을
The dream I dreamed.
없애 버렸네

포럼에 나간다는 것보다 수펄스와 함께 한다는 것에 더 관심이 갔던 게 사실입니다.

'서울 디지털 포럼'에서 '<K팝스타>와 엔터테인먼트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세션을 꾸리는데

함께 나가자는 박성훈 PD의 제안에 잠시 망설였었죠.

그런 경험도 없는 데다가 또 무슨 얘기거리가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펄스도 나온다고 하더군요.

단박에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수펄스'(사진출처:SBS)

수펄스가 포럼에 나온 이유는 이번 포럼의 주제가 '공존'이었기 때문입니다.

수펄스는 <K팝스타>에서 경쟁하면서도 하모니를 통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사실 그 어떤 강연보다 수펄스의 하모니를 한번 들려주는 것이

공존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세션 발표일 당일, 연사대기실에 별도로 마련된 방에서 수펄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연예인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은 별로 없는 편인데

수펄스는 그래도 기대하게 만들더군요.

그래도 얘기를 나눠보니 천상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연습을 하며 맞추는 하모니에서는 소름이 돋아 올랐죠.

이래서 가수는 가수구나 했습니다. 노래할 때는 '그 분'이 오셔서 돌변하는 거죠.

 

그날 발표일에 YG의 수펄스 재결성에 대한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박지민 양은 JYP로 결정된 상황이라,

그 빈자리는 YG행이 이미 결정되었던 이하이양이 채우게 되었죠.

수펄스 친구들은 그 사실을 그 현장에서 알았던 모양입니다.

뉴스를 확인하고 뛸듯이 기뻐하더군요.

물론 박지민 양은 조금 아쉬운 표정도 있었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얼굴로 기뻐해주었습니다.

 

 

맨 왼쪽이 저고 그 다음이 박성훈 PD, 그리고 수펄스(사진출처:SBS)

강연은 "수펄스의 노래를 듣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그래도 세션이니 지루한 토크를 좀 하겠습니다"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다들 이야기보다는 노래에 더 관심이 있었죠.

공존에 대한 의미를 한참 얘기하고는 수펄스가 노래하는 시간에는

저도 밑으로 내려와 박수를 치며 노래를 들었습니다.

수펄스가 부른 'fame'에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은 일제히 호응을 해주더군요.

비로소 '공존'이란 의미의 이번 포럼이 완성되는 느낌이랄까..ㅎ

 

하여간 제게는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수펄스도 만나고 포럼 경험도 하고

'공존'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갖게 되었죠.

아이들처럼 즐거워 하며 퇴장하는 수펄스를 보면서

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의 하모니를 선사할 것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부쩍 커버린 진짜 K팝스타를 보게 될 지도 모를 일이죠.

어린 시절, 형은 가끔씩 수수께끼를 내고는 하루 종일 답을 알려주지 않곤 했다. 답이 뭘까 곰곰 생각하며 답답해하는 내 모습이 자못 재밌었던가 보다. 하루가 꼴딱 지나고도 답을 몰라 묻는 내게 형은 적선하듯 답을 알려주곤 했다. 그런 형이 미웠던 걸까. 언젠가부터는 형에게 묻지 않고 혼자 문제를 풀려고 하는 욕구가 강해졌다.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풀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어려워 문제풀이를 결국 들여다봐야 할 때마다 형의 장난스런 얼굴이 떠올라 괜스레 약이 오르곤 했다. 어쨌든 세상사에 다 그럴 듯한 이유가 있고 또 모두 어떤 답이 분명히 있다고 착각하게 됐던 건 아마도 이 어린 시절 체화된 문제 풀이 경험 때문일 게다. 하지만 어디 사는 게 수학문제 같을까. 때론 답이 없는 게 삶이고, 어쩌면 그저 문제만 던져진 것이 삶이라는 것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하이킥'(사진출처:MBC)

수학공식 같은 드라마를 볼 때마다 "저건 거짓말이야"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래서일 게다. 첫 회를 보면 마지막 회를 예감할 수 있는 공식적인 드라마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때마다 이건 어딘지 아니다 싶은 마음에, 언젠가부터는 마지막 회를 안보는 습관까지 생기기도 했다. 그 예정된 결말이 과정들을 너무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곤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그런 결말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붕 뚫고 하이킥' 같은 의외의 결말도 있으니까.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교통사고. 멈춰버린 시간. 희극과 비극이 겹쳐지는 그런 결말. 그래서 보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는 결말. 수학문제처럼 답이 있다고 여기는 우리들의 단순해진 생각을 단번에 뒤집어놓는 충격요법.


그래서일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마지막을 수놓은 신세경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장면 장면의 디테일 속에 숨겨진 것들을 끌어 모아, 신세경이 애초부터 귀신이었다거나 연년생 동생이 있었다는 해석은 얼마나 대중들이 그 충격으로부터 그럴 듯한 답을 구하고픈 욕망이 강했던가를 잘 말해준다. 수수께끼 같은 결말을 던져주고 답을 주지 않을 때, 이제 그 남은 빈 여백은 온전히 각자가 채워 넣어야 할 것이 되어버린다. 어린 시절, 알려주지 않는 수수께끼의 답을 내 상상력으로 채우려 했던 것처럼.


삶이 답 없는 문제의 풀이과정 같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중년의 나이에 도달해서였다. 사실 그저 널려진 자연 속에 어떤 법칙이나 흐름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건, 그 해석이 삶에 유리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별 그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다만 그 별들을 바라보며 별자리를 그리고 거기에 이야기를 덧붙인 사람들의 해석이 있었기에 그 별에 의미가 생긴 것이리라. 우리는 날 때부터 커다란 빈 도화지 한 장을 받았고 아무런 법칙도 흐름도 물론 답도 없는 저 마다의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운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삶의 흐름이 생각했던 답에서 멀어진다고 하여, 슬퍼하거나 당황해하지 말라. 그것이 우리네 삶의 본질이니. 다만 주어진 것을 해석하고 풀이하라. 그것이 우리 삶을 저마다의 의미로 만들 것이다. '하이킥'의 결말이 우리에게 던진 숙제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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