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영 작가의 신작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는

일단 그 긴 제목이 시선을 끈다. 

여기에는 '모두'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서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가 그렇듯

이전까지 박해영 작가의 작품들은 '나'를 내세웠다. 

그러니 이 작품은 박해영 작가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의 차원에서 '모두'의 차원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게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전작들이 그러하듯이 

이번 작품에서도 사회에서 빗겨나 존재 소멸의 위기에 처한 인물이 등장한다. 

황동만(구교환)이 그 주인공이다. 

20년차 영화감독이라지만 아직 데뷔도 못한 그는

공식적으로는 '무직'이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는다. 

특히 같이 시작했던 친구이자 선배들이 모두 데뷔했기 때문에

그는 천덕꾸러기다. 

영화감독과 무직 사이의 괴리처럼

그는 소외되어 있고 그래서 존재 소멸의 불안을 겪는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남 잘 되는 거에 미쳐 죽고, 남 안 되는 거에 행복해 주는 모습은

주변인들에게는 민폐이자 극혐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생존 투쟁에 가깝다.

존재 소멸의 불안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꾸만 떠들어대게 되고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혼자서라도 뒷산에 올라 외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민폐와 짠함을 오가는 이 문제적 인물과

대척점에 서 있는  박경세(오정세) 감독은 

영화 다섯 편을 찍었다며 자신과 황동만은 급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존재 소멸의 불안 공포를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한 편이 나락 가면 자신도 저 황동만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그 역시 끝없는 인정투쟁을 하게 되는데

그가 황동만을 못잡아먹어 싸우려 드는 건

사실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그와는 다르다는 걸

애써 강변하기 위함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여기서 '나'의 개인적인 문제는 '모두'의 문제로 바뀐다. 

황동만이나 박경세나 그리 다른 처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 인정투쟁의 대열에 다양한 인물들을 끼워 넣는다. 

유일하게 황동만의 가치를 바라봐주는 변은아(고윤정)는

그렇게 된 이유가 자신 또한 존재 소멸의 불안 공포를 트라우마로 갖고 있어서다.

어려서 버려진 유기공포를 가진 그녀는

존재의 모멸감을 느끼게 만드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반응한다. 코피가 흐른다. 

한편 황동만의 형 황진만(박해준)도 한때 시를 썼던 문학인이지만 

지금은 건설현장에서 용접일로 입에 풀칠하며 살아간다.

꿈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황진만은 동생 황동만에게

생산성 있는 일을 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가 희석되고 있다는 불안과 절망에 휩싸여 있다. 

하루하루 술로 버티며 간간히 자살 욕구까지 느끼는 그는

사실 황동만이 걱정해 함께 살 정도로 더 위태위태하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이 작품은 이처럼 모두가 저마다의 인정 투쟁의 장 안에서

존재 소멸의 불안감을 느끼는 광경들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 낙인 찍는 사회 시스템이 그 주범이다. 

그 인정 투쟁의 장을 동력 삼아 사회가 움직이고 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모두는 끝없는 저마다의 인정 투쟁 싸움을 치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박해영 작가는 어떻게 돌파하고 뛰어넘으려 할까.

전작들에서는 망해도 괜찮다는 인식의 전환(나의 아저씨)이나

가짜 행복을 직시하고 진짜 행복을 추구하는 해방(나의 해방일지)을 얘기했다. 

하지만 아마도 이번 작품에서는 모두를 인정투쟁의 장에 올리는 시스템을 직시하라고 하지 않을까.

그래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그 사실을 깨닫고

싸움의 대상이 우리들끼리가 아니라

우리를 그 인정투쟁에 몰아넣는 시스템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인물간의 역학으로 말한다면

황동만과 변은아의 관계처럼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키워내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그 불안을 지워주는 새로운 관계의 제시가 아닐까 싶다. 

2026.4.29

728x90
반응형

양평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 앞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천 년이 넘는 시간을 한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나무가 주는 여러 감정들이 있다.

얼마나 외로울까,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그 아래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명들을 겪으며 나무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영화 <침묵의 친구>는 바로 나무의 시선이라는 그런 관점을 담은 신비로운 영화다.

침묵의 친구

영화는 1832년 한 독일 대학의 식물원에 뿌리내린 한 그루의 은행나무의 시점으로

서로 다른 시대의 세 인물의 이야기를 병치한다. 

첫번째 인물은 1908년 이 대학 최초의 여학생으로 식물학과에 입학한 그루타(루나 웨들러)다.

그녀는 입학 면접에서부터 모욕적인 성희롱을 당할 정도로 

남성중심적 사회(학교도 가정도 직장조차도)에 고립되어 있다. 

새벽에 숲에 들어가 나무와 교감한 것 때문에 방탕하다며 하숙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숙식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조수를 구하는 사진관에서 일하려 한다.

여성이 조수로 일한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시대에

사진관 사장은 처음엔 반대하지만 결국 그녀를 받아들여 사진기술을 알려준다.

그루타는 사진기술로 식물들을 찍기 시작하며

사진이 그림보다 식물의 구조를 기록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된다.

남성중심적 세상에 고립되어 잔뜩 위축되어 살아가던 그녀는

사진으로 식물을 연구하면서 자신감을 찾아가고

그 기술로 해외 식물연구를 하는 프로젝트에 유일한 여성으로 지원하게 된다.

배타적이고 남성 권력 중심적인 세상이지만 그녀를 세상과 연결시겨준 것들이 있다.

사진관 사장이 그렇고, 사진기술이 그러하며, 그녀가 늘 관심 있었던 식물에 대한 애정이 그렇다. 

침묵의 친구

그리고 그녀 같은 여성들의 이런 노력은 두번째 인물로 등장하는

1972년 하네스(엔조 브룸)가 짝사랑한 군둘라(마를레네 부로우) 같은 여성의 자유로운 시대로 연결된다.  

1970년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히피 운동이 펼쳐지던 시절에

군둘라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루타가 겪었던 여성으로서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그녀는

제라늄을 키우며 거기 연결된 전극으로 식물이 인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연구한다. 

어찌보면 그루타의 사진기술이 포착해낸 식물에 대한 연구가

군둘라의 연구로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인물의 주인공은 군둘라가 아니라 하네스다. 

그녀를 짝사랑하지만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그녀의 정원을 맴도는 청년이다.

본래 농촌에서 자라나 식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지만

공학도인 그는 여행을 떠난 군둘라를 대신해 제라늄을 돌보면서

이 생명체와 교감하기 시작한다. 

하네스의 제라늄에 대한 애정은 군둘라에 대한 짝사랑의 다른 표현일 수 있는데

하네스는 결국 제라늄의 전자기적 반응을 기계적으로 연결해(문을 열고 닫는 것 같은) 

자신의 행동과 말에 식물이 반응하고 소통하는 장치를 개발한다. 

짝사랑하는 이성이 떠난 외로운 정원에서 홀로 있지만

하네스는 그렇게 식물을 통해 그녀와 연결되고 싶어한다. 

침묵의 친구

세번째 인물은 2020년 코로나 19로 그 대학에 시설 관리인과 단둘이 고립되어 버린 토니(양조위)다. 

신경과학자로 이 대학에 부임해 인지과학을 가르치다 팬데믹으로 고립된 그는

식물원의 거대한 은행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다.

본래 아기의 뇌활동을 디지털 이미지로 포착해 연구하는 토니는

세계적인 식물학자 엘리스(레아 세두)에게 화상통화로 도움을 받아

나무와 소통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낸다. 

어찌보면 이 기술은 저 하네스가 외로운 정원에서 짝사랑의 마음으로 만들었던

기계장치로부터 진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이한 연구를 하는 토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해하던 시설 관리인은

어느 날 나무에 설치된 장치들을 모두 끊어버린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행동도 이해하지 못하는 토니와 관리인은 그렇게 단절되어 있다. 

하지만 시설 관리인이 점점 토니를 이해하게 되고

끊어버린 장치를 다시 연결해주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다시 이어진다. 

스마트폰 통역기로 대화를 이어가며 두 사람은 어느덧

나무 앞에 함께 앉아 나무가 전하는 소리들을 기다리는 연결된 존재가 된다. 

침묵의 친구

1908년을 담은 흑백필름으로 찍힌 그루타의 이야기와,

1972년을 담은 16미리 컬러 필름을 촬영된 하네스의 이야기는 그렇게

2020년 펜데믹 속 토니로 상징되는 현대인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다루고 있어 각각이 분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고립과 단절을 넘어서려 했던 행위들(누군가를 만나고 식물을 연구하는 등)이

그 긴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영화는 나무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침묵의 친구

'침묵의 친구'는 그래서 고립과 단절 속에 외로운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연결된 존재들인가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큰 위로를 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침묵의 친구'란 명시적으로는 나무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좀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그건 아직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가 서로 소통할 가능성을 지닌 '침묵의 친구'라는 의미도 있을 게다. 

물론 그 친구는 사람만이 아닌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을 포함하는 이야기다. (사진:영화 '침묵의 친구')

2026.4.17

728x90
반응형

초속 5센티미터

벚꽃이 피면 들려오는 노래가 '벚꽃엔딩'이라면

이 즈음 늘 떠오르는 영화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창기 애니메이션 '초속 5센터미터'다. 

초속 5센티미터. 실제로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그런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저 하늘하늘 날리며 떨어지는 벚꽃의 시간을

그렇게 구체적인 수치로 적어 보면

그 순간이 너무나 짧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 짧은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초속 5센티미터'라는 표현을 했던 것일 게다. 

 

함께 벚꽃이 날리는 도쿄의 거리를 달리며 좋아했던 타카키와 아카리.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다. 

어딘가 나서는 성향이 아닌 그들은 또래 아이들의 왕따를 당하기도 했지만

둘이여서 그걸 이겨낼 수 있었다. 

초속 5센티미터

하지만 청춘의 첫사랑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지키기 어려운 그들은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먼 거리로 떨어지게 된다. 

아카리가  도쿄에서 북쪽에 있는 도치키현의 이와후네로 이사하게 되면서다. 

3부작으로 된 '초속 5센티미터'의 1부는

어느 폭설이 내린 날, 이와후네에 있는 아카리를 찾아가는

타카키의 지난한 여정을 담았다. 

초속 5센티미터

'고토쿠지-신주쿠-오미야-오야마-이와후네'

도쿄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사실 타카키의 여정이

그리 멀지는 않다는 걸 알 것이다. 

하지만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날 만나기를 기대했던 두 사람의 바람은

벚꽃 대신 폭설이 내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열차로 인해 예상밖으로 빗나간다. 

가다 서다 종국에 눈이 쌓인 들판 한 가운데 멈춰서 버린 기차 안에서

타카키는 조바심과 걱정과 불안과 분노, 체념 등등

수많은 감정들을 겪는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 감정들을 특유의 사물 표현(열차가 마치 타카키 같이 느껴진다)으로 담아낸다. 

 

체념의 끝에 결국 도착한 타카키와 아카리는 

차가 끊기고 갈 곳도 없지만

아카리가 싸온 도시락을 나눠먹고 눈내린 거리를 함께 걷고

벚꽃 대신 눈이 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키스하며

밭옆에 있는 작은 헛간에서 날을 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그들은 헤어진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멈춰서 버린 듯한 순간을 타카키도 아카리도 잊지 못할 것이었다.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벚꽃의 아름다운 추락의 순간처럼. 

초속 5센티미터

두번째 에피소드는 가고시마로 이사를 간 타카키와

그를 짝사랑하지만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카나에의 이야기다. 

아카리와 헤어져 늘 저 편 먼 곳을 바라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타카키와

그런 그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면서도

마음을 건네지 못하는 카나에의 이야기는

또 다른 엇갈린 청춘의 첫사랑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는 아직은 스스로 서지 못하는 자신들과

어디로 향할 지 알 수 없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들어있다. 

그들은 언젠가 저 하늘로 쏘아질 수 있지만

아직은 그 발사대까지 '시속 5킬로미터'의 느린 속도로 이동되는 로켓 같다.

그래서 카나에는 끝내 타카키에게 고백하지 못한다.

그저 눈물 흘리고 "나한테 다정하게 대하지 말아줘"라고 말한다. 

그 순간 날아가는 로켓을 보고는 카나에는 알게 된다.

타카키가 늘 이 곳이 아닌 저 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초속 5센티미터

세번째 에피소드는 다시 도쿄다.

하지만 타카키와 아카리는 이제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어느 날 우연히 기차 건널목에서 마주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지나친다. 

어쩌면 그들은 한때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져 버렸지만

결코 잊히지 않았던 첫사랑과 첫 입맞춤의 순간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그들을 각자의 삶으로 걸어가게 한다.

초속 5센티미터

신카이 마코토는 말했다. 

"'초속 5센티미터'는 20년 지나서 객관적으로 보면 꼭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고 지금의 제 눈엔 상처가 아주 많은 작품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몹시나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눈부시기도 합니다. 저도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지금의 저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작품을 만들 생각도 별로 들지 않고요. 현재의 제가 잃어버린 무언가로 만들어진 작품 같아요. 돌이길 수 없다는 점, 또 그 때가 눈부시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청춘과 닮은 것 같기도 해요."

 

초속 5센티미터의 순식간에 지나가는 청춘의 시간이란

어딘가 불완전하지만 그래서 더 눈부신 것이다. 

2026. 4.13

728x90
반응형

(글에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는 노라(르나트 라인제브)가 어린 시절 집의 관점으로 글을 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집이라는 사물을 사람처럼 인격화해 그 관점으로 볼 줄 안다는 건

노라가 훗날 거대한 극장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로 성장한 그 재능을 슬쩍 보여준다.

센티멘탈 밸류

하지만 극장에서 무대에 서기 전 노라는 극도의 무대 공포증을 보여준다.

작은 것에도 신경이 쓰이고 무대에 서서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막상 무대에 나가면 노라는 좌중을 압도하는 연기를 선보인다.

그 연기 속에서 노라는 자신 속에 가득해 보이는 분노의 감정들을 마구 터트린다.

아마도 그건 현실에서는 꺼내놓을 수 없는 감정들이었을 게다. 

그 분노의 근원은 어린 시절 자신과 동생 아그네스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에 대한 원망이다.

 

엄마가 죽고 장례식에 아버지 구스타브가 찾아오면서 

노라와의 갈등이 표면으로 튀어나온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구스타브는 엄마의 추모를 위해 왔다기 보다는 

자신의 영화(아마도 마지막 영화)의 주인공을 노라가 맡아줬으면 하는 속내를 드러낸다. 

구스타브는 자신의 작품이 노라를 위한 것이고

그래서 노라만이 그걸 제대로 연기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노라는 이를 거절한다. 이유는 아버지와는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센티멘탈 밸류

영화는 노라와 구스타브의 개인적인 삶들을 병치해 보여준다.

노라는 유부남인 제이콥과 불륜 관계를 맺는데

그건 그 유부남이라는 거리가 자신의 진짜 모습의 20%만 내보여도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처럼 노라는 자신 안에 숨겨진 어둠과 상처들을 꺼내놓고 싶어하지 않는다.

절망과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었던 노라여서

동생 아그네스는 노라가 혼자 지내는 것을 불안해 할 정도다. 

 

노라가 무대 공포증 같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무대에 오르면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건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가려주는 배역이라는 가면을 쓸 수 있어서다.

그 안에서 노라는 안전함을 느끼고 그를 통해 속에 있는 감정들을 보다 꺼내놓을 수 있게 된다. 

센티멘탈 밸류

한편 구스타브는 영화감독으로서 성공했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

자신을 학교에 보내고 그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엄마 카린에 대한 상처가 있다.

(카린은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로 수용소에서 고문을 받고 살아돌아왔는데

아마도 그 때 겪은 일들이 자살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스타브가 그 집을 떠나게 된 데는 아내와의 불화도 있었지만

그 어린 시절의 상처가 균열처럼 남아있는 그 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집 밖에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가 살아왔지만 구스타브는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이 찍는 영화는 바로 그 집이 배경이고

작품도 거기서 직접 찍으려 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또 자신이 가족을 버리고 떠남으로 해서 

남은 딸들이 겪었을 아픔을 작품에 담아내며 그 상처들을 마주하려 한다. 

센티멘탈 밸류

이처럼 노라와 쿠스타브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는데

노라에게 그것이 연기라면 쿠스타브에게 그것은 영화다. 

연기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감정들을 노라는 좀더 안전하게 꺼내볼 수 있게 되고

쿠스타브는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의 상처를 보다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노라의 거절로, 그 역할을 대신 맡게 된 유명배우 레이첼이

구스타브가 쓴 대본 연기를 하며 몰입해 눈물을 흘릴 때

구스타브는 비로소 노라와 엄마 카린이 겪은 상처를 슬쩍 들여다보는 것 같은 시선을 갖게 된다. 

하지만 레이첼이 도저히 주인공의 선택(아들을 배웅하고 자살을 선택하는)을 이해할 수 없다며

배역을 포기하면서 구스타브의 작품은 접혀질 위기에 놓인다. 

센티멘탈 밸류

하지만 그 때 노라의 동생 아그네스가 구스타브의 대본을 읽어보고는 충격에 빠진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대본이 아니었다.(아마도 자살한 카린에 대한 이야기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건 노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그네스는 노라에게 그 대본을 가져와

특정 부분을 그냥 읽어 보라고 한다. 

그 대본을 무심히 읽던 노라는 점점 감정이 격해지며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살았던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가 "내게는 집이 필요해요"라고 그 대본을 통해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노라는 아버지의 영화에서 그 배역을 연기한다.

카린이 아들을 보내고 방으로 들어가 자살을 했던 순간을 영화로 재해석해 표현한 장면인데

카메라는 방 안으로 들어간 노라가 "컷"을 기다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구스타브의 컷 소리가 들리고 영화 촬영은 끝이 나는데

그 곳은 실제 집이 아니라 세트로 지어 재연된 집이다.

촬영이 끝난 세트를 서서히 빠져나오는 카메라 앵글에

구스타브와 노라 그리고 어린 아들 역할을 한 아그네스의 아들이 서로를 껴안는 모습이 담긴다. 

센티멘탈 밸류

영화와 연기라는 예술이 구스타브와 노라가 가진 상처를

들여다보고 관조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마지막 영화촬영 장면 안에 고스란히 담겨진다.

그걸 통해 구스타브는 엄마의 자살과 딸의 상처를 작품으로 객관화해 승화할 수 있었을 테고

노라는 딸을 버리고 간 아버지가 갖고 있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게다. 

예술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햄넷>에서도 죽은 아들을 영원히 작품을 통해 살려내려 한 윌의 위대한 예술이 있었듯이

<센티멘탈 밸류> 역시 저마다의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주는 예술의 위대함이 있다.

'센티멘탈 밸류'가 말하는 예술의 감정적인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사진:영화 '센티멘탈 밸류')

2026.3.31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