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상사’, IMF판 ‘미생’ 혹은 ‘이태원 클라쓰’의 잔상

태풍상사

이건 <미생>일까 아니면 <이태원 클라쓰>일까. 어쩌면 그 둘 다를 껴안는 IMF 버전의 청춘의 성장기는 아닐까. tvN 토일드라마 <태풍상사>에는 많은 명작들의 잔상들이 느껴진다. IMF로 위기를 맞은 상사를 배경으로 이를 극복해 갈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는 점에서는 <미생>이 떠오르고, 철없던 청춘이 그곳에서 바닥부터 시작해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릴 거라는 점에서는 <이태원 클라쓰>가 떠오른다. 

 

탄탄한 알짜기업으로 태풍상사를 일궈낸 아버지 강진영(성동일)의 그늘 아래서 철없이 누리기만 했던 강태풍(이준호)은 IMF의 엄혹한 시기를 맞아 회사가 위기에 처하고 아버지마저 갑자기 돌아가시자 날선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의 회사를 되살려야 하고 가족 같은 직원들도 챙겨야 한다. 늘 놀기만 하는 철없는 대학생이었던 그는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이제 막 시작한 드라마지만, 그 안에는 벌써부터 다양한 재미요소들이 엿보인다. 먼저 IMF 시절인 90년대 말의 복고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로 드라마는 시선을 끌었다. 누가 봐도 줄리아나로 보이는 디스코테크의 풍경이나, ‘사랑의 스튜디오’의 장면들과 타자기에 주판, 팩스, 전화기만 봐도 옛 오피스의 느낌이 묻어나는 태풍상사의 모습들이 그것이다. 그 위에서 이준호가 어딘가 촌스러우면서도 힙한 느낌이 묻어나는 복고풍 댄스 같은 것들이 당대를 살았던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고, IMF가 터지며 벌어진 상황은 당장 강태풍의 각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제 위기를 맞아 흔들리는 태풍상사를 살려내기 위해 강태풍은 저 혹독한 현실로 뛰어들어야 한다. 뭐 하나 상사를 이끌어나갈 경험치나 실력을 갖춘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원예학과를 다니며 꽃을 가꾸고 키우는 걸 좋아한다는 건 우연한 설정처럼 보이지 않는다. 향후 화훼 산업으로 태풍상사를 꽃피울 거라는 밑그림이랄까. 

 

물론 강태풍과 더불어 오미선(김민하)이라는 또 다른 청춘의 성장기도 예고되어 있다. 태풍상사 경리로 커피 타고 팩스 보내는 등의 잡무를 주로 하고 있지만, 회사에 떨어진 오더의 위험성을 알고 대표에게 조언할 정도로 일에 있어서의 남다른 두뇌와 감각이 기대된다.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옆에 안영이(강소라)가 있었고, <이태원 클라쓰> 박새로이(박서준) 옆에 조이서(김다미)가 있었듯, 상사 경험이 전무한 강태풍 옆에서 그를 도와 성공하게 하는데 톡톡한 역할을 할 인물이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건 <이태원 클라쓰>의 장근원(안보현), 장대희(유재명) 부자처럼, <태풍상사>에는 강태풍의 성공 욕망을 더욱 자극할 개망나니 표현준(무진성)과 이기기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그의 부친 표박호(김상호)가 등장한다. 표상선이라는 컨테이너 화물선 해운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태풍상사와는 계속 부딪칠 것으로 예상된다. 복수심은 아니지만 강태풍이 성공해 그들을 꺾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악역들이다. 

 

드라마는 본래 시작점에 모든 갈등의 요소들과 그 수위들을 캐릭터 구성을 통해 세워놓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태풍상사>는 잘 빌드된 캐릭터들이 예고하는 다채로운 서사의 기대를 갖게 만든다. 청춘들의 성장드라마에 치열한 비즈니스 전쟁이 벌어지는 오피스물 그리고 확실한 적수가 보이는 복수극의 요소가, 90년대 말 IMF를 벗어나는 그 시기의 추억을 향수하게 만드는 복고의 맛으로 잘 차려져 있다고나 할까. 시작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이준호의 태풍 같은 열연이 과연 <태풍상사>가 만들어낼 폭풍의 계절로 돌아올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사진:tvN)

‘탁류’, 이 혼탁한 세상을 이들은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까

탁류

“우리 아버지 머슴이여.” 디즈니+ 드라마 <탁류>에서 무덕(박지환)의 안사람 작은애(오경화)는 남편이 왈패의 엄지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율(로운)을 앉혀놓고 다짐을 받아 놓으려 한다. 무덕이 엄지가 된 건 바로 남다른 완력과 싸움 기술을 가진 시율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려서다. 그는 자신이 어쩌다 무덕의 아내가 되어 살게 됐고 그를 살게 해준 무덕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주기위해 먼저 자신의 기구했던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근디 흉년에 너무 먹을 게 없어 갖고 울 큰언니 갖다 팔았어. 고다음 보릿고개엔 둘째 언니를 갖다 팔고. 아들은 팔 수 없응께 내 차례가 됐지. 대감집 종으로 팔려 갔는디 역병에 걸려 갖고 피를 토항께 그냥 길바닥에 픽 버리고 가대. 열이 펄펄 나 갖고 눈밭에 누웠는디 추운 줄도 몰랐어.” 사람 목숨이 쌀 줌도 안되는 가치로 평가받던 민초들의 삶이 그녀의 이야기 속에 묻어난다. 살려고 자식을 팔고, 그렇게 팔려간 이는 병에 걸리면 버려지던 그런 시대. 이 대사는 <탁류>라는 작품이 담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잘 드러낸다. 그건 바로 민초들이다. 

 

<탁류>를 쓴 천성일 작가는 물론 <도망자 PLAN B>나 영화 <7급공무원> 같은 현대극을 집필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사극 <추노>로 기억되는 작가다. 그만큼 <추노>라는 작품이 파격적인 명작으로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망 노비와 그 노비를 잡는 추노꾼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가 버린 민초들의 삶을 사극을 통해 기록하려 했던 이 작품은 해학적이면서도 비장한 서사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탁류>는 오랜만에 천성일 작가가 바로 그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저 작은애의 말처럼 이 작품은 가진 것 없이 가난해 가족에게조차 버려진 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눈 떠 보니 요 집이여. 저 냥반이 몇 달 동안 괴기도 멕이고 약도 멕이고 그러면서 나를 살려내더라고. 그 길로 쭉 눌러 앉아 갖고 그 사람 각시가 됐제. 그 사람 아주 작지만 선한 마음이 있어. 근디 것도 너무 작아 갖고 없는 거나 매한가지여. 근디 그랴도 쬐끔은 살 자격이 있지 않겄는가. 내가 밥은 잘해 줄랑께 그 사람 등지지만 말어. 응? 약속할 수 있지?”

 

작은애가 시율에게 하는 이 말은 <탁류>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를 예감케 한다. 그건 이 혼탁한 마포나루의 강물 같은 세상 속에서 가진 것 하나 없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살아나가는가를 그릴 거라는 이야기다. 없어도 설움 받고 버림받는 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우면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아주 작지만 선한 마음’들로 버텨낸다. 무덕이 저 작은애의 숨을 이어 붙였듯이, 이제 시율은 무덕과 그 식솔들이 살아갈 수 있게 손을 내밀어준다. 

 

세상은 탁류 그 자체다. 마포나루 왈패들은 몸뚱아리 하나로 먹고 살려 이들의 고혈을 짜고, 관리들은 그 왈패들의 고혈을 짠다. 아무거나 갖다 붙여 세를 받고, 그 세금은 그 위로 상납된다. 사극으로 그려진 옛 세상의 풍경이지만, 지금이라고 다를까 싶은 시청자들도 적지 않을게다. 죽어라 일해도 뭐 하나 나아지는 것 없어 보이는 막막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분들이라면 더더욱. 

 

“이런 게 가족입니다. 함께 하면 부러지지 않습니다.” 시율은 싸리비를 예로 들어 자신들이 어떻게 이 험난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를 말한다. 그러자 작은애가 옆에서 장단을 쳐준다. “고럼 같이 먹고 같이 굶고 그게 가족이지.” 이 작지만 선한 마음들은 과연 저 거센 탁류 앞에서 지켜지고 서로를 살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까. 해학적인 인물들에 웃다 보면 어느새 눈물 나는 천성일표 민초 사극에 각별한 애정이 가는 이유다.(사진:디즈니+)

‘다 이루어질지니’, 사탄 김우빈과 사이코패스 수지가 그려낸 천년의 사랑

다 이루어질지니

이건 마치 김은숙 작가가 모래로 쌓아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 같다. 태초와 현재, 고려와 아라비아, 한국과 두바이, 현실과 상상... 같은 무수한 씨실과 날실을 엮어 짠 이야기의 직물 같다. 그것이 모래 같은 상상의 이야기를 재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기처럼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야기는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어도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샤흐라자드가 그 힘을 보여줬듯이.

 

아무 것도 없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모래만 가득한 사막에 모래바람을 타고 나타나는 지니의 이야기가 탄생한 것도 그래서일 게다. 김은숙 작가의 넷플릭스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는 바로 그 지니의 이야기를 가져와 시공을 뛰어넘는 대서사시로 재해석했다. 마술램프에서 나타나 무엇이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주인공이니 일단 일상과 맞닿아 있는 평범한 이야기일 수는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시공을 초월하며 마법을 부려 누군가를 부자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때론 젊어지게 해주기도 하는 존재가 주인공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중요한 건 이 상상의 세계로 빚어진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어떤 비의를 전할 것인가다. 그건 알라딘의 마술램프 이야기로 익숙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에 의해 역설적으로 파멸하는 인간들을 통해 전하는 욕망의 허망함에 대한 것이다. 마술램프의 정령 이블리스(김우빈)는 그래서 소원을 이뤄지게 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세 가지 소원을 통해 인간을 시험대에 올리는 존재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욕망에 의해 파멸에 이른다. 이블리스가 신이 창조해낸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이유다. 

 

하지만 고려시대 아라비아까지 노예로 끌려왔다가 이블리스를 만나게 된 소녀는 오히려 그를 시험대에 올린다. 세 가지 소원을 죽어가면서도 모두 타인을 위해 빌었던 것. 이블리스는 이제 환생으로 다시 태어난 소녀를 통해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인간과 또다시 내기를 벌여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 소녀는 바로 기가영(수지)이다. 사이코패스로 개구리의 배를 가르고 또 가르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없던 소녀. 그래서 엄마도 그녀를 일찌감치 버렸지만, 괴물이 될 수도 있었던 그녀를 사람으로 만든 건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다.

 

“니가 누구를 안아 주모 내도 니를 안아줄 끼고 니가 누구를 칼로 끄으모 내도 니를 칼로 끄을 끼다. 니가 누구를 직이모 내도 니를 죽일 끼다. 이게 내랑 니 규칙이다, 알았나?” 할머니가 내건 규칙과 더불어 가영은 닭 잡는 낫으로 글을 가르쳐주고 개를 향하던 끌로 나무를 파 장승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날 선 칼로 요리를 하게 해준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감정 없는 돌멩이 같은 가영을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보석처럼 키워줬던 것.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는 지니 앞에 기가영은 의외의 인간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에 욕망 자체가 별로 없다. 시험에 빠뜨리려는 이블리스와 시험 자체가 무소용인 기가영의 대결은 그래서 팽팽해진다. “우리 할머니가 인간은 선한 존재랬어. 세상에서 나쁜 건 나 하나야.” 그렇게 말하며 네가 틀렸다는 기가영 앞에서 이블리스는 수천년 간 자신이 봐왔던 인간의 파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기가영은 첫 번째 소원을 그 증명의 내기에 쓴다. 길에서 만나는 5명의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이 과연 파멸하는지 아닌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이코패스인 기가영이 순수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명을 해낼 대표자로 나선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면이 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마로 주로 그려지지만, 영겁의 세월 동안 삶과 죽음을 무수히 목격하고 경험한(영생 혹은 환생을 통해) 그 전지적 신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없이 욕망도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건 마치 이블리스의 시선과도 비슷하다. 죽이고 살리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이블리스나 기가영이나 그리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 이블리스와 사이코패스 기가영의 대결은 흥미진진해진다. 

 

그 대결은 일종의 수수께끼다. 과연 그런 순수한 인간이 존재하는가를 두고 벌이는 정령과 인간의 ‘세 가지 소원’이라는 룰을 갖고 벌이는 도박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지적 신의 관점으로 흘러가는 서사는 그래서 보통의 드라마들과는 다른 진입 통로를 갖고 있다. 일상적 서사 안에서 극적 사건이 벌어지며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천 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고, 그것도 고려와 아라비아, 한국과 두바이, 천국과 지옥 등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 판타지 서사의 진입 통로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이블리스와 기가영이 사막 한 가운데서 만나 티격태격하며 벌이는 초반의 이야기는 일상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때론 황당하고 때론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진입 장벽을 넘어서면 이제 이야기의 무한한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정령과 인간의 대결과 사랑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운명과 슬픔, 그리움 같은 것들을 통해 작품이 건네는 기막힌 위로와 감동 그리고 깨달음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13부작으로 넷플릭스 드라마로서는 꽤 긴 호흡처럼 초반에는 여겨졌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13부작도 부족할 지경의 폭발적인 상상의 세계들이 계속 펼쳐진다. 그러면서 이 모래폭풍처럼 다가와 인간들을 시험에 빠뜨리다 자신도 시험에 빠져버리는 이블리스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과 삶의 비의를 슬쩍 들여다보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13부를 다 들여다보고 나면 이런 질문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은숙 작가는 특유의 은유적 표현들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작품 속에 담았다. 사탄이라 불리지만 더할 나위 없이 선해 보이는 이블리스나, 사이코패스지만 그 차가움으로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기가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고, 영원한 삶을 욕망하는 인간이지만 정반대로 불멸자가 되어 고통받는 반인반령의 존재도 등장한다. 특히 모든 걸 다 이루어지게 해주는 전지전능해보였던 이블리스가 정작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 앞에 무력해지는 상황이나, 금은보화를 원하는 욕망 속에서 파멸하는 한 도시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삶의 아이러니를 기막히게 표현해낸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손아귀에 쥐어진 것처럼 여겨지다가도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로 형상화된 지니의 모습은 그 자체가 이러한 욕망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그래서 그 모래를 끝없이 갈망하며 손아귀에 쥐려 하지만, 결국은 죽어 그 모래 같은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운명을 뒤늦게야 깨닫지 않던가. 결국 인간의 증명은 그런 가진 것에 의한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가진 것을 잃었을 때 갖게 되는 슬픔과 눈물 같은 것일 수 있다고 김은숙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하고 있다. 모래알처럼 그저 억겁의 세월 동안 부서지고 스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누군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슬퍼하는 감정들이 더해져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사진:넷플릭스)

색다른 인생 리셋, ‘착한 여자 부세미’ 반응 예사롭지 않다

착한여자 부세미

장윤주는 자신의 이미지를 작품에 따라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 아는 것 같다. ENA 월화드라마 <착한 여자 부세미>에서 그녀가 맡은 가선영이라는 인물은 악역이다.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는 소시오패스 악역. 그래서였을까. 장윤주는 딱 붙여놓은 머리에 마치 곤충의 더듬이 같은 모양으로 머리카락 한 가닥을 늘어뜨린 모습으로 등장했다. 마치 사마귀의 형상 같은 그 모습은 등장만으로도 섬뜩한 인상을 준다. 

 

<착한 여자 부세미>는 제목에 이 주인공의 ‘착함’을 내세웠다. 정반대로 말하면 이 부세미(전여빈)라는 이름으로 3개월을 생존해내야 하는 김영란의 반대편에는 ‘악함’이 있다는 뜻이다. 장윤주가 등장부터 섬뜩한 인상으로 구현해낸 가선영이라는 인물이 그 악의 중심이다. 그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재혼으로 부녀 관계가 된 아버지 가성호(문성근) 회장의 모든 재산이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며 어떤 짓을 해서라도 빼앗으려 한다. 

 

가선영은 가성호 회장이 자신의 엄마와 결혼해 이 모든 재산들을 빼앗아 갔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상 가성그룹은 가성호 회장이 맡아서 국민 라면 신화를 만들어내 성장한 회사다. 그러니 가선영의 이 비뚤어진 욕망은 파괴적인 집착에 가깝다. 집사를 이용해서 가성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먹는 음식에 독을 타는 일도 서슴없이 할 인물이다. 빼앗겼다 믿는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는. 

 

반면 가성호 회장이 경호원으로 뽑은 김영란은 가선영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 아버지의 상습적인 가정폭력 속에서 자랐고, 엄마는 가끔 나타나 돈이나 뜯어가는 존재다. 생리대 살 돈 만 원이 없어서 이를 훔치다 실형으로 6개월을 살다 나오기도 했다. 엄마 때문에 빚더미에 앉아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가성호 회장의 말대로 그녀는 “약점이 많은 사람”이다. 

 

가성호 회장의 마음이 그 약점 많은 사람에게 기우는 것처럼, 시청자들의 마음도 김영란의 처지에 연민을 느낀다. 그녀가 인생 리셋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리고 동아줄로서 가성호 회장이 손을 내민다. “나랑 결혼하자.” 황당한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가성호 회장이 살해당한 자신의 친딸에 대한 복수를 위한 거라는 점과 자신 또한 이 지긋지긋한 삶의 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김영란은 결국 가성호 회장의 손을 잡는다. 

 

만 원이 없어 실형을 살 정도로 궁핍하고 엄마의 빚을 갚기 위해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재벌가의 상속녀가 된다? 신데렐라류의 멜로를 통한 신분상승이라면 별 흥미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을 게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멜로 대신 복수라는 카드를 내세운다. 게다가 상속을 받게 한 장본인인 남편(?) 가성호 회장은 말기암 판정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내 인생에 로맨스는 없다”고 말하는 김영란처럼, 멜로 같은 건 애초부터 싹을 잘라버린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멜로가 아닌 3개월 생존하기를 통해 김영란이 스스로 인생리셋에 성공하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시오패스로 갖가지 독하고 악한 짓을 골라 하는 가선영과 그 잔당들과 대결하고, 저들을 무너뜨리기를 바란다. 개인의 인생리셋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걸 가지려 사람 목숨 따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자들에게 한 방을 날리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가 시작부터 그 빠른 전개에 시청자들을 동승하게 만든 저력이다.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장윤주와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얼굴로 갈아 끼운 전여빈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팽팽한 힘도 빼놓을 수 없다. 

 

같은 재벌 회장이지만 가성호 회장은 저 가선영 같은 인물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존재다. 독이 들었을 지도 모르는 산해진미보다 봉지에 적힌 레시피 대로 정직하게 끓여낸 라면을 원하는 이 사람은 가진 것 없어도 착하고 올바른 김영란의 가치를 알아보고 “합격”을 외친 사람이다. 과연 그가 가치를 알아본 김영란은 상속녀로서 부세미라는 이름으로 무창에 숨어 들어가 3개월을 생존해낼 수 있을까. 시시각각 좁혀오는 가선영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을까. 거기서 만난 딸기농사짓는 바른 청년 전동민(진영)과는 어떤 관계가 만들어질까.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색다른 인생리셋 드라마가 과연 많은 이들의 인생드라마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사진: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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