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는 노라(르나트 라인제브)가 어린 시절 집의 관점으로 글을 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집이라는 사물을 사람처럼 인격화해 그 관점으로 볼 줄 안다는 건

노라가 훗날 거대한 극장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로 성장한 그 재능을 슬쩍 보여준다.

센티멘탈 밸류

하지만 극장에서 무대에 서기 전 노라는 극도의 무대 공포증을 보여준다.

작은 것에도 신경이 쓰이고 무대에 서서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막상 무대에 나가면 노라는 좌중을 압도하는 연기를 선보인다.

그 연기 속에서 노라는 자신 속에 가득해 보이는 분노의 감정들을 마구 터트린다.

아마도 그건 현실에서는 꺼내놓을 수 없는 감정들이었을 게다. 

그 분노의 근원은 어린 시절 자신과 동생 아그네스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에 대한 원망이다.

 

엄마가 죽고 장례식에 아버지 구스타브가 찾아오면서 

노라와의 갈등이 표면으로 튀어나온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구스타브는 엄마의 추모를 위해 왔다기 보다는 

자신의 영화(아마도 마지막 영화)의 주인공을 노라가 맡아줬으면 하는 속내를 드러낸다. 

구스타브는 자신의 작품이 노라를 위한 것이고

그래서 노라만이 그걸 제대로 연기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노라는 이를 거절한다. 이유는 아버지와는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센티멘탈 밸류

영화는 노라와 구스타브의 개인적인 삶들을 병치해 보여준다.

노라는 유부남인 제이콥과 불륜 관계를 맺는데

그건 그 유부남이라는 거리가 자신의 진짜 모습의 20%만 내보여도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처럼 노라는 자신 안에 숨겨진 어둠과 상처들을 꺼내놓고 싶어하지 않는다.

절망과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었던 노라여서

동생 아그네스는 노라가 혼자 지내는 것을 불안해 할 정도다. 

 

노라가 무대 공포증 같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무대에 오르면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건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가려주는 배역이라는 가면을 쓸 수 있어서다.

그 안에서 노라는 안전함을 느끼고 그를 통해 속에 있는 감정들을 보다 꺼내놓을 수 있게 된다. 

센티멘탈 밸류

한편 구스타브는 영화감독으로서 성공했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

자신을 학교에 보내고 그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엄마 카린에 대한 상처가 있다.

(카린은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로 수용소에서 고문을 받고 살아돌아왔는데

아마도 그 때 겪은 일들이 자살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스타브가 그 집을 떠나게 된 데는 아내와의 불화도 있었지만

그 어린 시절의 상처가 균열처럼 남아있는 그 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집 밖에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가 살아왔지만 구스타브는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이 찍는 영화는 바로 그 집이 배경이고

작품도 거기서 직접 찍으려 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또 자신이 가족을 버리고 떠남으로 해서 

남은 딸들이 겪었을 아픔을 작품에 담아내며 그 상처들을 마주하려 한다. 

센티멘탈 밸류

이처럼 노라와 쿠스타브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는데

노라에게 그것이 연기라면 쿠스타브에게 그것은 영화다. 

연기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감정들을 노라는 좀더 안전하게 꺼내볼 수 있게 되고

쿠스타브는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의 상처를 보다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노라의 거절로, 그 역할을 대신 맡게 된 유명배우 레이첼이

구스타브가 쓴 대본 연기를 하며 몰입해 눈물을 흘릴 때

구스타브는 비로소 노라와 엄마 카린이 겪은 상처를 슬쩍 들여다보는 것 같은 시선을 갖게 된다. 

하지만 레이첼이 도저히 주인공의 선택(아들을 배웅하고 자살을 선택하는)을 이해할 수 없다며

배역을 포기하면서 구스타브의 작품은 접혀질 위기에 놓인다. 

센티멘탈 밸류

하지만 그 때 노라의 동생 아그네스가 구스타브의 대본을 읽어보고는 충격에 빠진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대본이 아니었다.(아마도 자살한 카린에 대한 이야기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건 노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그네스는 노라에게 그 대본을 가져와

특정 부분을 그냥 읽어 보라고 한다. 

그 대본을 무심히 읽던 노라는 점점 감정이 격해지며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살았던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가 "내게는 집이 필요해요"라고 그 대본을 통해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노라는 아버지의 영화에서 그 배역을 연기한다.

카린이 아들을 보내고 방으로 들어가 자살을 했던 순간을 영화로 재해석해 표현한 장면인데

카메라는 방 안으로 들어간 노라가 "컷"을 기다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구스타브의 컷 소리가 들리고 영화 촬영은 끝이 나는데

그 곳은 실제 집이 아니라 세트로 지어 재연된 집이다.

촬영이 끝난 세트를 서서히 빠져나오는 카메라 앵글에

구스타브와 노라 그리고 어린 아들 역할을 한 아그네스의 아들이 서로를 껴안는 모습이 담긴다. 

센티멘탈 밸류

영화와 연기라는 예술이 구스타브와 노라가 가진 상처를

들여다보고 관조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마지막 영화촬영 장면 안에 고스란히 담겨진다.

그걸 통해 구스타브는 엄마의 자살과 딸의 상처를 작품으로 객관화해 승화할 수 있었을 테고

노라는 딸을 버리고 간 아버지가 갖고 있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게다. 

예술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햄넷>에서도 죽은 아들을 영원히 작품을 통해 살려내려 한 윌의 위대한 예술이 있었듯이

<센티멘탈 밸류> 역시 저마다의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주는 예술의 위대함이 있다.

'센티멘탈 밸류'가 말하는 예술의 감정적인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사진:영화 '센티멘탈 밸류')

2026.3.31

눈을 떠보니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는 어느 우주 한 가운데 있다.

잠들어 있던 그가 깨어나 침상에서 내려와 의식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벗고 빠져나오는 한 생명의 탄생을 보는 것만 같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지구 종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확률은 낮지만 단 한 번의 기회에 희망을 걸고 

우주로 보내진 중학교 교사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시작은 우주에 홀로 남겨져 외로운 한 존재로부터 문을 연다. 

 

그는 혼자다. 그리고 외롭다.

그건 아마 어마어마한 우주 속에 지구라는 별이 갖는 느낌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는 그 외로움의 극단에서 진짜 희망이 어디서 피어날 수 있는가를 

눈도 코도 입도 없이 바위에 거미 같은 다리가 달린 외계인과의 만남을 통해 보여준다. 

 

첫 만남은 공포지만, 그것은 상대가 보여주는 환대의 제스처 앞에 반가움으로 바뀌고

그들은 조금씩 소통을 해나가며 공통의 목표를 공유한다. 

그것은 각자의 별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고 

각자의 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이 바위처럼 생긴 외계인에게 

'로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에게 어울리는 목소리도 정해준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라이언 고슬링의 모노드라마가 

로키를 만나 함께 하는 버디 무비가 되고,

광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던 스펙터클은

두 우주의 존재들이 펼여내는 우정의 드라마가 된다. 

 

그리고 지구를 구하고 우주를 구하는 그 거창한 일은 결국

나와는 다른 존재를 환대하고

그와 함께 협력하며

나아가 서로를 구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보여주는 우주는 그래서 

실제 별들이 펼쳐진 우주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 외롭게 던져진 하나하나의 존재들이

저마다의 우주라는 걸 그려낸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자살미션'인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기 전

그레이스가 겪었던 갖가지 갈등과 그 속에서 함께 한 사람들과의 시간들은

하나의 우주가 머금고 있는 기억들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을 구하고, 자신과 다른 타자를 구하는 것은

그들이 함께 한 우주를 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일이 된다. 

 

어찌 보면 영화는 이 단순한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것인데

보는 이들은 어찌할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된다.

그건 그 단순한 깨달음과는 정반대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의 행태들이 저들의 우정과 너무나 비교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고실험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그래서

무엇이 이 외로운 우주에서(삶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우린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것.

돌 하나에도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 생명을 느끼는 것.

그것이 해답이 아닐까.  

프로젝트 헤일메리

자연(自然)은 한자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자연이 벌이는 일들은 그래서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살고 죽는 일은 그냥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자연처럼 '그냥 그러하다'고 살고 죽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햄넷'은 그런 점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여진 어찌할 수 없는 거리가 만들어내는 비극을 그리면서

예술이 그 비극을 어떻게 승화해 그 사이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는가를 그린 작품으로 다가온다.

햄넷

'햄넷'은 11살의 나이에 사망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들이다.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이자 동명의 소설을 쓴 매기 오파렐은

11살에 사망한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햄릿'이라는 걸작의 탄생 사이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매기 오파렐이 영감을 얻은 스티븐 그린블랫의 에세이 '햄넷의 죽음과 햄릿의 탄생'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햄넷의 죽음이 햄릿을 탄생시키는 그 과정을 담는다.

햄넷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마치 자연이 잉태한 듯한) 아녜스(제시 버클리)는

어느 날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한 라틴어 교사 윌리엄(폴 매스칼)의 구애를 받는다.

이내 사랑에 빠진 그들은 아이를 갖게 되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된다.

하지만 결혼 후 극작에 대한 갈망을 풀지 못하는 윌리엄이 자신을 잃어가자

아녜스는 그를 런던으로 떠나 보낸다. 

떨어져 지내지만 쌍둥이 남매까지 낳아 세 아이를 키우는 아녜스와

런던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생기를 찾고 고향을 오가는 윌리엄은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

햄넷

하지만 이들의 행복에 자연이 드리운 그림자는 비극을 몰고 온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쌍둥이 남매 중 몸이 약하던 딸이 감염되지만

햄넷은 '용감하게' 사신의 시선을 속여 자신의 삶을 동생에게 주고 대신 죽는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냥 벌어진' 자연의 일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인간의 고통(특히 부모의)은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이다. 

"넌 꼭 살거야"라고 애써 말해줬지만 끝내 죽은 아들 앞에 아녜스는 절망하고

그 아들의 임종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윌리엄은 죄책감에 빠진다. 

절망 속에서도 윌리엄은 연극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고 

그것은 아녜스를 분노하게까지 만든다.

햄넷

윌리엄이 연극으로 성공해 세운 작품이 희극이 아닌 비극이고

그 비극의 제목이 아들의 이름을 딴 '햄릿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아녜스는

런던으로 와 그 연극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아들의 이름을 함부로 쓴 그 연극에 분노하지만

어린 햄넷을 닮은(자랐으면 아마도 그렇게 컸을),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가 등장하면서부터

아녜스는 연극에 몰입하게 된다.

또한 햄릿의 죽은 아버지 역할로 윌리엄이 분칠을 한 채 연극에 등장하자

비로소 아녜스는 윌리엄이 얼마나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했고

그 마음을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담아내려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차라리 죽고 아들을 살렸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진 것이다. 

햄넷

거대한 숲처럼 꾸며진 연극무대에 난 작은 문은

아녜스가 잉태되어 있었고, 첫번째 아이를 낳았던 숲의 동굴 같은 구멍을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 곳(자연)으로부터 삶이 시작됐지만

그 구멍은  그 삶이 다시 되돌아갈 죽음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죽은 매를 그 곳에 묻어준 것처럼.

하지만 갑작스런 죽음에 부부는 아들을 그 자연(구멍)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윌리엄은 연극 무대에 그려진 작은 문을 통해

아들을 비로소 자연으로 되돌려 준다. 

예술이 불가항력적인 자연 앞에 놓여진 인간의 비극을

애도하고 승화함으로써 이를 수용하게 해주는(자연으로 되돌리게) 장면이다. 

햄넷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죽음은

당사자들만의 애도와 공감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그걸 보는 모든 이들의 애도와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스스로 그러한) 일이고

모든 인간이 결국에는 겪는 것이라는 걸 알려줌으로써

우리를 울면서도 웃게 만든다. 

햄넷

무심하지만 무자비한 자연과

그 앞에서 너무나 사랑했기에 어쩔 수 없이 비통해하는 인간

그리고 이를 애도하고 공감함으로써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예술.

'햄넷'은 이 거대한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술의 비의를 담아낸 명작이다.

(사진:영화'햄넷')

2026.3.6.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내려서 자신이 달려온 쪽을 바라본대요. 

그건 자기가 쉬려는 것도 아니고 말을 쉬려 하려는 것도 아니고

혹시라도 걸음이 느린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기다려주는 배려였대요.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대요."

파반느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싶다는 경록(문상민)의 고민에

미정(고아성)은 의외의 인디언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서 말한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말고 나의 속도로 살아가면 좋을 거 같아요."

파반느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반느>는 바로 이 속도에 대한 영화다. 

세상의 속도와 나의 속도. 

세상이 맞다고 주장하는 삶과 나의 삶.

모든 이들이 가는 길과 내가 가고 싶은 길.

세상의 잣대와 나의 가치관...

이런 것들을 이 영화는 대결시킨다. 

파반느

경록과 미정 그리고 이들 사이에 큐피트처럼 들어온 요한(변요한)은

그 세상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처럼 보인다. 

경록은 배우가 된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린 어린 시절의 상처를 겪으며

세상의 잣대를 혐오하고 경멸하게 된 청춘이다. 

미정은 못생겼다는 이유로(그것도 저들의 잣대이지만) 백화점 동료들의 멸시를 받는 청춘이다. 

요한 역시 데이비드 보위를 추종하며 저들 똑같이 살아가는 이들을 냉소하는 청춘이다. 

 

세상의 속도와 다른 나의 속도는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내 속도가 맞고 세상의 속도가 틀리다 여기며

나만이 진짜고 저들은 다 가짜라 생각하지만

모두가 그 세상의 속도로 달려가게 되면서

나만이 가짜이고 저들이 진짜는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파반느

경록이 그렇게 흔들릴 때

미정이 해주는 인디언 이야기는 그래서

그를 진짜이게 해준다. 

그의 속도가 맞다고 얘기 해준다. 

파반느

사랑이 나를 진짜이게 해주는 어떤 것이라면

경록과 미정은 그런 사랑을 시작한다. 

세상의 속도에서 비껴나 가짜라 손가락질 받던 청춘들은

그래서 서로의 속도를 바라봐주며 

서로가 진짜라는 걸 알게 해주는 사랑을 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사랑을 한다. 

파반느

인디언의 말 달리는 이야기에서 등장하듯

이 영화에서 '달린다'는 이미지는 중요한 의미로 반복된다.

서로가 서로를 부르고 원했을 때  

그들은 상대를 향해 달려간다. 

그렇게 숨가쁘게 달려온 서로에게 그들은

"왜 달려왔어요? 걸어와도 괜찮은데."라고 말한다.

걸어와도 되는데 달리게 되는 그 초조한 마음에서

청춘의 서투름과 그래서 더 비극이 될 수도 있지만

절절히 빛나는 마음들이 눈송이처럼 따뜻하게 피어난다.  

파반느

청춘의 사랑을 그린 청춘멜로지만

삶의 속도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여러 번 복기하면 할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너무도 아련한.

(사진: 영화 '파반느')

202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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