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동물원

동물원만큼 우리의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내는 곳이 있을까.

존 버거는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동물원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동물원의 공적인 존재 목적은 관람객들에게 동물을 구경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원에 처음 들어선 사람이 그 곳에서 동물다운 동물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장소란 어디에도 없다.

고작해야 깜박이며 스치듯 외면해 버리는 동물들의 시선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존 버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동물원이 근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무너뜨리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제국주의시대에 본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권력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당대의 동물원에는 동물들만이 아닌 식민지 원주민들도 전시되어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으니까. 

이상한 동물원

하지만 우리의 익숙해진 동물원 경험들은

그 진짜 '동물다운 동물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동물들조차

진짜 동물처럼 여기는 인식의 오류를 불러 일으킨다. 

그만큼 인간중심적으로 바뀐 세상에 타자로서 동물들의 위치는 딱 그 철창 안의 모습 정도라고 우리는 착각한다. 

실로 요즘 세상에 맹수에 물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 일은 거의 사라졌으니

맹수란 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우리는 인지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동물원들은 눈속임을 한다. 

늘상 동물원을 찾으면 맥없이 늘어져 있는 맹수들을 보며 실망하는 구경꾼들 때문이다.

병들고 나이든 동물들이 잘 안보이게 된 건 그래서다. 

 

SBS 2부작 다큐멘터리 '이상한 동물원'은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이상한 동물원은 청주동물원이고

그 동물원을 이상하게 운영하는 사람은 수의사계의 이국종이라 불리는 김정호 수의사다. 

이 동물원은 병들고 나이든 동물들이 가득하다.

이상한 동물원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좁은 철창에 갇혀 지내다 겨우 살아나온 반달곰.

흙도 풀도 없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지내다 삶의 의지 자체를 잃어버린 사자.

도시에서 발견됐지만 보낼 곳이 없어 안락사 직전까지 간 여우.

선천적으로 부리에 장애를 가진 독수리.

백내장에 걸린 수달...

다른 동물원들이 기피하거나 숨기려 하는 동물들이 이 이상한 동물원에는 가득하다. 

 

"그 전에는 동물원에서 부상을 입어서 장애가 생기면 뒷공간에 있었어요.

보여주기 좀 어렵다.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영구 장애 동물들을 데려오면서 사람들이 공감을 어느 순간부터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동물원에는 어리고 건강한 동물들만 있을 수는 없다."

 

김정호 수의사는 장애동물과 약자동물들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건 형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장애 때문에 바보라 놀림받다 끝내 실종된 형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회한이 그에게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야생으로 갈 수 없는 야생동물들은 동물원으로 와서 생을 이어간다.

그들이 구조되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동물원에 온 아이들이 보고 듣게 될 것이고

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선 우리 형은 더이상 바보가 아닐 것이다.'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겹쳐진다.

과거 동물 프로그램들이 구경의 차원에서 인간화의 방식으로 그리고 반려와 공존의 차원으로 

계속 관점이 바뀐 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타자를 보는 시선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상한 동물원

 

그래서 김정호 수의사의 이런 질문과 관점은 

우리 사회의 '정상성 담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연 장애인이나 노인, 어린이, 여성, 외국인 근로자 등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그들이 혹여나 약자라는 이유로 세상에도 없는 존재 취급을 하는 건 아니냐고 질문한다.

동물원은 그래서 어쩌면 거대한 시스템으로 통제되어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거꾸로 말해 동물원을 구경의 공간이 아니라

동물의 진정한 안식처인 생추어리로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삶과 사회를 좀더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광장과 밀실.

남북이 분단된 우리에게 이 두 단어는 특별한 은유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은 일찍이 이렇게 표현했다.

남한은 밀실은 넘치나 광장이 없고, 북한은 광장은 있으나 밀실이 없다고

 

김보솔 감독의 애니메이션 <광장>은 이 소설에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눈보라에 칼바람이 부는 북한이 배경이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의 이방인인 평양 주재 스웨덴 서기관 보리에게 북한은 낯선 곳이다. 

하지만 보리는 그 살풍경한 곳에 조금더 머물고 싶어한다.

그 곳에서 만나 사랑하게된 교통보안원 서복주 때문이다. 

광장

그 곳은 이방인과의 접촉 자체가 감시되고 금지된다.

시장에서 귀여운 어린 아이와 대화를 해도

그 아이와 엄마에게 누군가 다가와 그걸 문제삼는 곳이다.

보리와 복주는 길거리를 함께 걷거나 손을 잡는 일조차 쉽지 않다. 

내밀한 접촉은 자칫 스파이짓으로 오인될 수도 있는 일이다.

 

보리의 북한 통역관인 리명준도 그래서 늘 거리를 둔다.

집에 들어가 삶은 계란에 맥주 한 잔을 하자고 해도

그 사소한 일조차 리명준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광장

사실 알고보면 리명준은 보리를 감시하고 감청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보리가 복주를 만나는 일을 탐탁찮아 한다.

그것이 복주에게 일으킬 파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은 그들에게는 '평양추방' 같은 조치가 취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내뿜는 입김이 더 뜨거워지듯

금지는 욕망을 더 간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조금 더 평양에 머물겠다는 간청이 거절되고

복주마저 사라져 버리자 보리의 억눌렀던 감정은 폭발하고만다.

복주를 찾아 평양을 헤매고 찾을 수 없게되자 리명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리명준은 그런 보리를 "이기적인 새끼"라 욕하며 비난한다. 

광장

꽁꽁 얼어붙은 동토인지라 더더욱 간절한 온기가 느껴지는 보리와 복주의 사랑이야기를 다뤘지만

<광장>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바로 리명준이다.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굳은 얼굴로 등장하지만

저들의 사랑을 감시하고 바라보면서 조금씩 변화해간다. 

 

김보솔 감독은 아마도 리명준의 변화를 통해 

이 견고해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체제에도 생겨나는 

작은 균열을 그리고 싶었던 듯하다. 

광장

작품 속에 여러 차례 메타포로 등장하는 계란은 리명준의 변화를 말해준다. 

보리가 호의로 건넸지만 그가 뿌리쳐 깨버린 계란,

감시되는 걸 알아차린 보리가 술에 취해 던져 리명준이 감시하던 건물 창문을 깨버린 계란,

그리고 그것이 삶은 계란인 줄 알고 이마로 깼다가 터져버린 날계란이 그것들이다.

마치 바위를 치듯 날아가던 그 계란들은 조금씩 리명준을 변화시킨다. 

 

끝내 리명준은 보리가 복지를 찾는 일을 돕는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외교관의 물음에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외로웠나 봅니다."


왜 외로움일까. 외로움이란 감정이 생겨났다는 건 무얼 뜻하는 걸까.

사실 이 살벌한 감시체계 안에서는 외로움조차 느낄 수 없다.

늘 불안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어서다.

하지만 외로움을 느꼈다는 건 리명준에게 인간적인 감정이 생겼다는 의미다. 

그건 작은 균열이자 희망이다. 

광장

기억에 선명히 남는 장면은 

눈 내린 광장 위로 리명준이 자전거를 타고

그 위에 자유로운 궤적이 그려지는 장면이다. 

첫 장면에 등장한 북한의 광장에는 

마치 서야할 자리를 지정하는 듯한 숫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쓰여 있었다.

그 숫자들이 눈에 덮이고 그 위로 리명준이 자전거로 그려내는 궤적은 

그의 외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는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이지만 이토록 스산하고 쓸쓸하게 마음을 휘어잡은 작품이 있었나.

<광장>의 그 궤적이 오래도록 가슴에 선을 그어 놓았다. 

2026.1.22

빛은 우리에게 색을 가져다 준다.

어둠의 무채색을 밀어낸다. 

김도영 감독의 영화 '만약에 우리'는 그 삶의 색깔에 대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세계를 병치한다.

무채색의 세계와 색채를 가진 세계.

고향을 떠나온 청춘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무채색을 색채로 바꾼다. 

현실은 고시원과 작은 자취방을 전전하지만

서로의 꿈을 지지하며 그 무채색의 삶은 색깔을 갖게 된다.

만약에 우리

자신이 만든 게임으로 100억을 벌겠다는 꿈을 가진 은호(구교환)와 자신이 설계한 집을 갖고픈 정원(문가영).

은호의 꿈은 시골 식당을 운영하며 가난하게 살아온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픈 욕망에서 피어나고,

정원의 꿈은 보육원에서 자라나 가족도 내 집도 없이 지냈던 삶에서 피어난다. 

서울은 그런 꿈을 꾸는 곳이지만, 그 꿈은 현실과는 너무나 멀다. 

 

어느 날 짐을 싸들고 은호의 자취방으로 온 정원이 말한다. 

"고시원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조그마한 창문으로 해가 손바닥만 하게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슬펐어."

그러자 은호는 비록 자취방이지만 커튼을 활짝 쳐 햇볕을 방안으로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이거 너 가져." 

무채색의 삶에 색깔을 주는 건 서로를 향한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면 충분하다.

만약에 우리

하지만 그것으로 무거운 현실을 그들이 이겨낼 수 있을까. 

자신 혼자라면 버텨낼 수 있을지 몰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어가고 그래서 서로의 꿈을 서로가 가로막고 있다고 여겨지자 그들은 안타깝게도 이별한다. 

 

그렇게 서로 각자의 긴 시간을 지나 그들은 다시 우연히 만난다. 

그들은 각자의 꿈을 이뤘다.

은호는 자신이 만든 게임으로 성공했고

정원은 건축사가 되어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들의 꿈을 이뤘지만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그 무엇도 해줄 수 없는 삶이 됐다. 

은호가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낳아 가정을 꾸렸기 때문이다. 

 

햇볕 잘 들어오는 집 한 칸 마련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게 된 그들이지만

그들은 그 무엇도 해줄 수 없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건 

그걸 해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걸 주고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만약에 우리

'만약에 우리'는 가진 것 없는 청춘이 꿈과 사랑 사이에서 둘다 갖지 못하는 현실을 그렸다. 

유약영 감독의 원작인 '먼훗날 우리'에서는 다시 만나 서로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게 된 그들이 나누는 명대사가 나온다.

"네 바람대로 다 됐다면?"

"결국 다 가졌겠지."

"서로만 빼고."

이 대사는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며 꿈을 이뤘다고 해도 결국은 서로를 사랑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걸 암시한다.

꿈과 사랑은 어째서 이다지도 엇갈리게 된 걸까. 

만약에 우리

사랑과 현실의 대결이랄까. 

'만약에 우리'에는 그것이 느껴진다. 

제 아무리 사랑으로 현실을 버텨내려 해도 

결국 현실이 사랑을 갈라서게 만드는 잔혹한 시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에릭이 제인을 못찾으면 어떻게 돼? 새드엔딩이잖아."

은호가 만드는 게임 속에서 에릭은 제인을 찾아다니는데 만일 못찾으면 어떻게 되냐고 정인이 물었을 때 은호는 답한다.

"세상이 흑백이 되어버려."

결국 그 흑백의 세상은 게임 속에서나 채색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게임 속이라고 해도 그건 이들의 아름다운 기억이 된다. 

한 뼘 볕이 들어오던 시절에도 총천연색이었던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여행은 참 다양하게도 비유된다.

삶을 인생의 여정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글을 쓰는 일도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가는 여행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역시 잠시 이 쪽의 불을 끄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행과 나날

여행에는 낯설음과 익숙함 혹은 새로움과 진부함 나아가 차이와 반복의 이중주가 담겨 있다.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은 낯설고 새롭고 어딘가 지금과는 차이가 있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하지만 제아무리 낯설고 새롭고 차이가 나는 경험으로서의 여행이라도

같은 곳에 오래 머무르거나, 혹은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그 경험은 익숙해지고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삶은 그래서 이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 새로움과 진부함 사이 그리고 차이와 반복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행위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그것 역시 삶과 여행을 빼닮았다는 걸 알고 있다.

처음에는 새로운 단어들이나 말들이 갈수록 익숙해지면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 단어나 말들이 지긋지긋해지고 더이상 쓰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 

여행과 나날

“나는 말(言)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여행과 나날'에서 각본가인 '이(심은경)'는 그렇게 말한다. 

이는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각본가로 일하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쓰는데, 아마도 그녀에게 처음부터 일본어가 쉬웠을 리는 없다. 

이건 심은경이라는 배우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느꼈던 소회하고도 일치한다.

그 일본어를 쓰며 하는 연기는 그래서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한국어로 하던 연기의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연기를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본어가 점점 익숙해지면서 이는 그마저 '말의 틀'에 갇히고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슬럼프에 빠지기 전 그녀가 쓴 작품으로 된 영화는 여름 날 어느 낯선 바닷가에서 만난 소년 소녀의 이야기다.

대단한 사건도 대단한 대사도 없지만 묘하게도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그 영화는

그 무료한 바닷가에서 함께 바다 속으로 뛰어들고 수영하는 광경을 관능적으로 담아낸다. 

작가의 이의 무료함은 그렇게 영화라는 세계 속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여행의 낯설음을 꿈꾸게 한다. 

여행과 나날

그 작가의 권태로움이 극에 달해 말의 틀에 갇혀버린 이는

이제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말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 세계가 어느 여름날의 바닷가 소년 소녀의 판타지에 가까운 상상이었다면

현실 속 이가 떠난 세계는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 속 지도에도 없는 허름한 여관에서 만난 

괴팍해 보이는 아저씨 주인과 만난 지극히 현실적인 경험이다.

여행과 나날

하지만 이는 온천도 스키장도 아닌 이 지도 바깥에 있는 이 낯선 여관에서

주인 아저씨 벤조와 일상을 보내며, 그가 하는 엉뚱한 짓에 가담해 의외의 작은 모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벤조가 왜 혼자 그런 외진 곳에서 여관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연도 알게 된다.

그 엉뚱한 모험을 한 후 이가 한껏 웃는 얼굴로 벤조에게 

“이렇게 즐거웠던 건 오랜만이에요.”라고 말할 때

벤조가 툴툴 대며 옆자리로 눕는 장면은 이 영화의 깨알같이 빛나는 대목이다. 

여행과 나날

벤조의 사연은 자못 비극적이고 아련한 면이 있고,

그건 그의 하루하루를 온통 채우는 일상 그 자체다. 새로울 리도 없고 그러니 즐거울 리도 없다.

하지만 벤조의 그 일상 속으로 여행해 들어온 이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 바깥으로 나와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낀다. 

 

영화는 잔잔하기 이를 데 없고 대사도 많지 않다. 

특히 전반부에 등장하는 이가 쓴 작품 속 바닷가 소년 소녀의 이야기는

익숙한 영화 문법과는 사뭇 동떨어진 광경들이 등장하며

낯선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여행과 나날

하지만 그것이 영화였고, 그 영화의 각본을 쓴 이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익숙함에 갇혀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새로움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 또 하나의 영화다. 

극중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이

익숙함의 틀에 갇혀 즐거움을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즐거운 여행으로 인도하는가를 담아낸다. 

 

이 영화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가 된다.

여행을 하고 있거나 혹은 나날(일상)을 살아가고 있거나.

그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즐거움을 추구하며.

여행과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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