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로 돌아온 ‘범죄도시’의 서민 영웅

황야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한 침대 광고의 문구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마동석이다. 그가 내놓는 영화들은 이제 업계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성공을 보장한다는 신뢰가 생겼다. 그건 한 특정 작품의 성공이 아니라, 마동석이라는 하나의 브랜드가 보장하는 성공이라는 점에서 흔들림 없이 편안하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범죄도시> 시리즈를 떠올려보라. 시즌3까지 했던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잘 떠오르는가. 그 이름은 마석도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건 마석도가 아닌 그 역할을 연기한 마동석이다. 그래서 <범죄도시>가 68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을 거둔 후, 코로나19의 터널을 통과해 초토화됐던 극장가에 엔데믹 분위기와 함께 <범죄도시2>가 무려 1천2백만 관객을 끌어모았을 때 나온 ‘신드롬’은 <범죄도시> 신드롬이 아니라 ‘마동석 신드롬’이었다. 바로 1년 후 연달아 <범죄도시3>가 나왔을 때도 ‘설마’는 ‘역시’가 됐다. 이미 이 시리즈의 스토리라인이 관객들에게 익숙해졌고 그래서 단물이 이미 쪽 빠진 껌처럼 여겨진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려 1천만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그것이 말해주는 건 영화가 아니라 마동석을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만이 가진 확실한 ‘한 방’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한 방’의 공식은 간단하다. 너무나 악랄해 보기 불편하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한 빌런들이 등장해 관객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고 나면, 그 긴장에도 흔들림 없이 등장해 관객들을 편안한 사이다의 세계로 이끄는 마동석의 모습이 이어진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간단한 ‘한 방’의 공식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범죄도시>가 마약과 연결된 강력사건들이 벌어지며 갈수록 살벌해지는 살풍경한 현실 사회를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와 공포에 떠는 소시민들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빌런들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마동석의 모습을 그렸다면, <부산행>에서는 좀비가 창궐한 부산행 KTX에서 맨주먹으로 저들을 때려잡는 마동석을 그렸고, <동네사람들>에서는 한 동네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악의 카르텔과 상대하는 체육교사 마동석을 그렸다. 하나 같이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는 적들이고, 거기서 마동석은 그들 앞에 벌벌 떨고 있는 소시민들을 보호하거나 구해주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이런 서사 구조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마동석은 그 서사의 경험을 공포와 편안함이라는 체감의 차원으로 전해주고 있다는 게 다르다.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는 실감에서 오는 공포가 관객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놓았을 때, 등장과 함께 보이는 거대하고 단단해보이는 체구만으로도 어딘가 ‘안전함’이 느껴지는 그 외적 이미지가 그렇다. 그 단단해 보이는 몸은 웬만한 칼도 뚫지 못할 것 같고, 심지어 총 한 방 맞아도 그리 큰 타격이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약자들의 든든한 보호막 같은 느낌을 준다. 게다가 그가 날리는 한 방에 마치 펀치볼처럼 날아가는 빌런들의 모습은 카타르시스도 안기지만 동시에 도무지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공포 또한 한 방에 날려버리는 효과를 준다. 이러니 마동석을 따라가며 관객들은 공포의 세계 속에서 안전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건 마치 롤러코스터의 작동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액면으로 보면 소름이 돋는 스릴이지만 안전함이 동반되어 그걸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그런 그가 돌아왔다. 이번엔 폐허가 되어버린 디스토피아 세상이다. 이제 당연히 사람들은 상상한다. 모든 게 무너져내린 폐허 속, 무법천지가 된 세상에서의 마동석은 어떨까.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핵주먹을 날리며 빌런들 때려잡는 든든한 서민 영웅의 모습일까. 예상대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황야>에서 마동석은 무법천지 세상에 유일하게 우뚝 선 비빌언덕 같은 인물(극중 인물의 이름조차 남산이다)로 등장해, 생체실험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겠다는 위험하고도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박사(이희준)와 대결한다. 그 결론은? 우린 이미 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궁금하다. 그가 어떻게 저들과 맞서 나가고, 저들에게 시원시원한 주먹을 날릴 것인지가.

 

이미 <부산행>이 칸느영화제에서 소개됐을 때부터 “저 친구는 누구냐?”는 이야기가 외국 관객들로부터 나온 바 있고, <이터널스> 같은 마블 작품의 슈퍼히어로로도 등장한 바 있으니 그가 출연하는 <황야>라는 작품에 대한 기대감 역시 글로벌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OTT 스트리밍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 <황야>는 넷플릭스 영화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29일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대만, 일본, 홍콩 같은 아시아국가 나아가 프랑스 같은 유럽에서도 글로벌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사실 <황야>는 평가도 낮고 평점도 낮은 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동석이 나오는 작품에서 작품성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관객들이 기대하는 건 이미 정해진 코스를 달리는 걸 반복해도 그 때마다 확실한 쾌감을 안겨주는 롤러코스터 같은 효능감이다. <황야>의 상당 부분이 마동석표 롤러코스터에 기대고 있다는 건, 이 작품과 세계관을 같이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비교해 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이병헌의 호연이 돋보였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속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을 통해 이른바 ‘아파트 공화국’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진지하게 담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황야>는 그 세계관만 가져왔을 뿐, 사실상 마동석이 디스토피아에서 펼치는 <범죄도시> 같은 작품에 가깝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마동석의 세계에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는 걸까.

 

그건 불안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사회가 만들어낸 페르소나로서의 마동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벌해진 사건들을 매일 같이 접하게 된 대중들로서는 마동석 같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잠시나마 곁에 두고픈 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심지어 세상이 무너져도 그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든든함에 대한 희구. 편안함을 넘어서 심지어 그 공포를 스릴로 바꿔 즐길 수도 있게 해주는 그런 존재에 대한 갈망이 마동석 신드롬에는 어른거린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서울의 봄>이 불러온 봄날의 훈풍이 계속 불려면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이 1천만 관객을 넘겼다. 혹자들은 ‘영화의 봄’이 다시 오는 게 아니냐는 기대의 목소리를 내놓는다. 그리고 은근히 이 봄기운이 <노량:죽음의 바다>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눈치다. <명량>이 무려 1천7백만 관객을 넘겼고, <한산> 역시 7백20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노량>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여기에 <서울의 봄>이 불러온 모처럼만의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봄날의 훈풍까지 불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서울의 봄>이 개봉하기 전까지만 해도 극장가는 침통한 분위기였다. 엔데믹에 비대면이 풀렸지만 올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의 성적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류승완 감독의 <밀수>가 5백만 관객을 넘기며 그나마 체면을 차렸을 뿐, 하정우, 주지훈 주연의 <비공식작전>도 또 설경구 도경수 주연에 김용화 감독이 연출한 <더 문>은 재앙에 가까운 참패를 경험했다. 특히 대한민국 최초로 달을 배경으로 한 우주 소재의 SF를 시도했던 <더 문>은 그 창대한 시도와는 너무나 초라한 50만 관객이라는 성적표를 받으며 무너져 내렸다. 

 

추석 시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동원 주연의 <천박사 퇴마 연구소>가 190만 관객으로 그나마 선전했고, 강제규 감독의 <1947 보스톤>이 1백만을 그리고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은 겨우 31만 관객을 동원했다. <1947 보스톤>이야 2020년 제작됐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묵혀졌다 나온 이른바 ‘창고영화’라 그 시의성 차이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송강호, 임수정, 오정세, 전여빈 등 호화캐스팅을 했고 평단의 반응도 좋았던 <거미집>의 흥행 참패는 아쉬운 지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극장가는 ‘겨울이 왔다’고 말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그건 코로나19를 겪으며 비대면 상황이 지속되면서 OTT가 대안적인 영화 소비 플랫폼으로 떠오르는 환경 변화가 만들어낸 위기였다. 그러다 갑자기 엔데믹으로 극장가가 열리게 되면서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영화들이 픽픽 쓰러져 나간 것이었다. 그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관객들은 영화에 묻기 시작했다. 그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영화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이전 호황기 시절의 영화는 멀티플렉스와 공조하며 천만영화를 심지어 만들어냈다. 적당한 블록버스터의 재미를 적당한 타이밍(여름방학 시즌이나 추석 대목 같은)에 멀티플렉스를 통한 스크린수 융단폭격을 하면 충분히 천만영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관객들이 극장에 가는 것이 중요한 여가로 자리잡혔을 시절의 이야기다. 하지만 비대면 시절을 겪으며 관객들은 알게 되었다. 집에서 OTT에 가입해 영화 한 편 정도의 비용으로 한달 구독료를 내면 한달 내내 다양한 영화들과 드라마들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이런 분위기니 개봉 전부터 ‘잘 빠졌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서울의 봄> 역시 흥행을 자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애초 목표는 천만이 아닌(누가 감히 천만을 운운할 수 있는 시절인가!) 4백만을 목표로 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걸 성공으로 세워뒀다는 것이다. 4백만도 어렵다는 업계 이야기들은 영화의 홍보 마케팅에 전력투구를 하게 만들었다. 영화 시작 몇 달 전부터 <서울의 봄>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고, 그래서 심지어 이미 개봉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이미 영화의 홍보가 충분히 이뤄진 상태에서 기자시사회가 열렸다. 호평이 쏟아졌다.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영화가 개봉됐고, 기다렸다는 듯이 극장에 몰려간 관객들은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영화는 4백만을 넘기더니 신드롬처럼 성적에 속도가 붙었다.  

 

<서울의 봄>이 성공한 건 먼저 당연하게도 영화가 좋았기 때문이다. 12.12 군사쿠데타라는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가져왔지만, 그 날 벌어진 사건들을 여러 인물들의 끝없는 선택과 갈등의 상황으로 그려냈다. 그래서 굉장한 액션 신은 많지 않았지만,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을 순삭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선택이 훗날 신군부를 등장시키고 그래서 80년 광주의 비극과 그 후로 꽤 오래 지속되는 암울한 시대를 야기했다는 메시지에 당대를 살았던 기성세대들은 물론이고 현재의 젊은 세대들까지 공감했다. 역사가 결국 여러 사람의 선택들의 총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걸 그 하루를 담은 사건을 통해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탄탄한 완성도를 가진 데다, 코로나 이후 달라진 영화 소비 방식 속에서도 굳이 극장에 가야할 이유를 주는 몰입감과 긴박감, 여기에 공격적인 홍보마케팅이 힘을 실어 준 ‘누구나 꼭 봐야할 것 같은’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서울의 봄>은 ‘영화의 봄’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등극했다. 

 

물론 <서울의 봄>이 영화계에 만들어낸 기대감은 좋은 일이고 또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금의 달라진 영화 소비 방식에 걸맞는 작품이었고, 그걸 효과적으로 알리는 노력들을 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이 영화가 천만관객을 돌파할 것인가를 두고 섣부른 기대들을 여기저기 내놓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시 천만관객의 시대로 회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닐게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천만이 아닌 중소규모지만 완성도 높은 작품을 지향하는 가성비 있는 기획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처럼, 콘텐츠의 새로운 시대는 거기에 맞는 새로운 소재와 형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변화된 환경을 깊이있게 들여다보고 과거의 관성들을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 봄이 올 것만 같았던 기대가 냉혹한 겨울로 돌아설 수 있으니 말이다. 장기 군부독재가 사라지고 봄이 도래할 것 같은 기대를 가졌지만 신군부라는 더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게 됐던 것처럼. (사진:영화'서울의 봄', 이 글은 이데일리 칼럼에 기고된 글입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5인방의 약점 극복기가 건드린 정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대한 한국 관객들의 반응이 뜨겁다. 요즘처럼 영화관의 관객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에, 이 일본 애니메이션은 150만 관객(24일 현재)을 돌파했다. 영화의 성공과 함께 세트로 출시된 만화와 관련 굿즈 시장들도 들썩이고 있다. 무엇이 이런 뜨거운 반응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일단 영화적으로만 보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을 보지 않은 일반 관객들 또한 빠져서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영화는 거두절미하고 북산고와 산왕공고의 경기를 전편에 걸쳐 보여주면서, 중간 중간 플래시백으로 그 경기를 뛰는 선수들의 과거사를 끼워 넣는다. 즉 과거 이들이 어떤 일들을 겪어 이 경기까지 오게 됐는가의 이야기를 개개인의 사적인 서사들을 통해 채워 넣고 있어, 경기에서 이들이 하는 패스 하나 슛 하나가 그 서사와 맞물려 굉장한 몰입감을 만들어낸다. 

 

그 서사는 다름 아닌 이 경기를 뛰고 있는 북산고의 다섯 인물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약점들에 대한 것들이다. 강백호가 주인공인 원작과 달리 가드 송태섭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에게 불어 닥친 비극을 밑그림으로 그려 넣는다. 아버지가 죽고 농구 유망주였던 형마저 사고로 사망한 후, 송태섭은 사고뭉치가 된다. 죽을 사람은 형이 아니라 자신이었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하는 송태섭에게 형은 절대적인 존재였지만, 이젠 극복해내야 할 대상이 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굳이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세워 놓은 건, 그가 그려내고 있는 ‘약점 극복기’라는 서사가 이 영화판 작품의 메인 테마라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즉 산왕공고와 치열한 경기를 펼치는 북산고의 다섯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약점들을 갖고 있다. 그것은 농구선수로서의 약점과 더불어 그들 개인사와 얽힌 약점들도 뒤얽혀 있다. 

 

송태섭은 키가 작다. 농구선수로 작은 키가 가진 약점은 이 인물이 거인 같던 형과 늘 비교되며 느꼈을 한계를 떠올리게 한다. 늘 넘사벽이었지만 형의 부재 앞에 지지할 데 없어 방황하고 절망하던 그가 마음을 다잡는 장면에서 그는 오키나와의 모래사장을 달리기 시작한다. 작은 키를 빠른 발로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주장 채치수는 ‘전국제패’를 외치며 그 일념 하나로 팀원들을 밀어붙이는 인물이지만, 리더로서 자신을 내려놓고 팀원들을 믿고 지지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리더로서의 무거운 어깨를 홀로 감당하려 하는 그 면면이 그에게는 큰 부담이자 약점이 된다. 그가 마지막 1분을 남기고 송태섭에게 리더가 하던 구호를 외치게 하는 장면은 그래서 채치수가 그 약점을 극복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서태웅은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패스를 하지 않는 인물이다. 혼자 잘난 맛에 뛰는 인물이 산왕공고라는 엄청난 팀 앞에서 이기고 싶은 욕망이 극에 달하자, 가장 각을 세웠던 강백호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백호는 농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룰조차 익숙하지 않은 약점을 갖고 있지만, 결코 질 수 없고 지지 않는다는 놀라운 ‘자존감’으로 무기력해져가는 북산고에 다시 힘을 불어넣는다. 정대만은 방황 끝에 다시 농구를 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력이 약하다. 하지만 그 약한 체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해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처럼 다섯 인물들이 자신들의 약점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단 하나의 경기 안에 녹여 놓았다. 그러니 엎치락뒤치락하는 경기의 묘미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서사에 빠져들고 그 서사는 다시 경기에 박진감을 더해주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하나하나 빌드업된 스토리들이 실제 농구 경기가 그러하듯이 마지막 몇 분의 클라이맥스에서 절정으로 폭발하는 그 순간은 그래서 관객들의 마음 또한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영화를 보다 울었다는 관객들은 그래서 <슬램덩크>로 유년시절을 보낸 3040 세대들만이 아니다. 물론 이 작품에 3040 세대들이 특히 열광할 수 있는 건 그 시절 이 작품이나, 당대의 농구 열풍 등이 한 시대의 풍경들을 현재로 끌어오기 때문이다. 그 시절 <슬램덩크>와 더불어 농구대잔치, <마지막 승부> 같은 시대적 사건들이 공명하듯 현재로 소환되는 아련함이 더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단지 과거의 추억이 아닌, 지금의 대중들(심지어 원작을 겪지 않았던 후세대들에게도)의 마음을 건드리는 현재적 의미 또한 갖고 있는 작품이다. 그건 많은 이들이 이미 언급하고 있고, 작품을 보면 단박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른바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정서를 이 작품이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데다 코로나19까지 겹쳐 도무지 넘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현실 앞에서, 저마다의 장벽을 마주한 다섯 인물들이 팀이 되어 그걸 극복해가는 서사가 주는 울림은 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진: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진짜 장애는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른바 ‘우영우’ 신드롬이다. 여기저기서 ‘우영우’라는 이름 석 자가 회자된다.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만평에도 등장하고, 이른바 윤석열 정부의 법치에는 ‘마음’이 없다(경향신문)는 칼럼에도 등장한다. 드라마 속에 나왔던 소덕동 팽나무인 수령 500년의 창원 북부리 팽나무가 실제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우영우가 푹 빠져 있는 고래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도 쏟아져 나온다.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신드롬은 너무나 갑작스럽다. 물론 작품은 더할 나위 없이 완성도가 높다. 그래서 0%대로 시작했던 드라마가 무려 13%(닐슨 코리아)까지 수직상승하고, ENA라는 낮선 채널의 인지도 또한 급부상시켰다는 건 어느 정도 공감 가는 일이다. 좋은 콘텐츠가 만들어내는 파급효과는 늘 있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우영우’가 동시다발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건 작품 내적인 요인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외적 요인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요인 또한 다양하겠지만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건 우영우(박은빈)라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캐릭터만큼, 그와 함께 로펌에서 일을 하는 최수연(하윤경) 같은 동료와 정명석(강기영) 같은 상사가 주는 메시지의 힘이다. 

 

사실 지나치게 이상화된 메시지는 현실성을 잃고 스토리를 너무 판타지로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정명석 같은 인물은 장애를 가진 우영우를 로펌에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어려운 현실을 들어 반대한다. 제 아무리 로스쿨 수석 졸업을 했어도 의뢰인도 만나고 변호도 해야 하는 변호사가 사회성도, 언변도 필요하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건 편견일 수 있지만 어찌 보면 직장 상사로서의 현실을 얘기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역시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있다. 하지만 그건 직접 우영우 같은 인물을 겪어보지 않아서 생긴 편견일 뿐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정명석은 적어도 문제의식을 늘 갖고 있고, 겪어본 후 무언가 잘못됐다고 여기면 바로바로 사과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첫 회에 우영우가 피고인 피해자를 만나러갈 때 “그냥 보통 변호사들한테도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가 금세 그 말이 잘못됐다는 걸 인지하고 “미안해요. 그냥 보통 변호사라는 말은 좀 실례인 거 같다”고 말하는 인물. 

 

그저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장애가 아니라도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우영우를 대하는 최수연이 특히 감동적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인물 역시 드라마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판타지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어찌 보면 함께 사는 사회에서 우리가 선택해야할 당연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인물로 그려진다. 다만 그 삶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를 우영우는 절감한다. 그래서 우영우가 그의 목소리로 이 평범하고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감동받을 수밖에 없다.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함께 사는 법이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라는 걸 우영우는 최수연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해준다. 

 

경쟁자의 위치에 서서 ‘권모술수’를 쓰기도 하는 권민우(주종혁)가 사내 게시판에 우영우가 사실상 ‘부정 취업’을 했다고 올리고 그래서 사내 직원들이 수군거리며 심지어 우영우 자신 역시 그걸 인정하자 최수연이 하는 일갈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서울대 로스쿨에서 성적 좋은 애들은 다 대형로펌으로 인턴 나가서 졸업 전에 입사 확정 받아. 근데 너만 정작 학교에서 맨날 1등 하던 너만 아무 데도 못 갔어. 그게 불공평하다는 거 다들 알았지만 그냥 자기 일 아니니까 모르는 척 가만있었을 뿐이야. 나도 그랬고.” 

 

최수연은 그런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도 그런 차별에 자신도 동참했다는 사실 또한 빼놓지 않는다. 하지만 우영우 역시 늘 당연하게 이런 차별을 받아와 문제의식을 잘 느끼지 못한다. “아무래도 내가 장애가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러자 최수연의 일갈이 또 한 방 뒤통수를 때린다. “장애인 차별은 법으로 금지 돼 있어. 네 성적으로 아무 데도 못 가는 게 차별이고 부정이고 비리야. 무슨 수로 왔든 늦게라도 입사를 한 게 당연한 거라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의 이야기로 ‘장애’를 소재로 가져왔지만 그 이야기가 자폐라는 특정한 질환만을 다루는데 머물러 있지 않다. 최수연이 말하듯 진짜 장애는 우영우를 둘러싼 편견 가득한 세상이 갖고 있다. 장애인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지하철 시위에 ‘자기 일 아니니까 모르는 척 가만’ 있고 나아가 나의 불편함만을 호소하는 세상이 그렇고, 법에 호소하는 다양한 서민들의 마음을 읽지 않고 법대로만 하겠다 말하는 마음 따윈 들여다보지 않는 세상이 그렇다. 

 

대단한 각성과 날카로운 세상 인식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니다. 정명석처럼 몰라서 편견을 갖고 있었다면 알았을 때는 이를 고치려는 마음이 있으면 되는 일이고, 최수연처럼 장애와 비장애 같은 경계를 차치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타인을 배려하고 나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삶이면 되는 일이다.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그래서 우영우라는 인물을 리트머스지를 내세워 ‘이상한 우리 사회’를 비춰주고 있다. 신드롬이 생겨난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진:ENA)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