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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L>, 성호 그릴스가 회사, 대학, 편의점에 간 까닭

 

편의점 알바는 갑의 횡포를 견디며 친절을 판매하는 나약한 존재였어요. 깨달은 것도 있었고요.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거. 여러분도 명심하세요.”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을 기막히게 패러디한 <SNL코리아><Man vs City with 성호 그릴스>에서 정성호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생존기로 그려낸다.

 


'SNL코리아(사진출처:tvN)'

어찌 보면 이런 풍자는 자칫 비하 논란을 만들 위험성이 있다. 전국의 모든 편의점 사장들과 그 편의점이라는 근로 환경이 이 풍자가 그려내는 것처럼 갑질을 하거나 조악하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코미디의 풍자 코드는 이런 위험성을 베어 그릴스를 패러디한 성호 그릴스라는 기괴한 캐릭터를 내세움으로써 슬쩍 비켜나간다.

 

성호 그릴스는 도시의 환경 자체를 위협적으로 대응하는 과잉되고 과장된 캐릭터다. 그에게 편의점 사장은 사장이 아니라 도시의 포식자. 그러니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어 사장에게 한 소리를 듣고 있는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낮은 포복으로 숨어 들어가려는 성호 그릴스는 광인에 가깝다. 즉 이건 상황의 일반화가 아니라 성호 그릴스라는 도시의 위험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특정한 광인의 시각과 목소리라는 점이다.

 

이렇게 풍자가 만들어낼 일반화의 위험성을 광인이란 캐릭터로 슬쩍 넘어서자 그 풍자는 거칠 것이 없어진다. 회사라는 정글로 들어간 성호 그릴스에게 상사는 상위 포식자에 해당한다. 그 상위 포식자가 그를 발견하고 무언가 꾸지람을 하려 하자 성호 그릴스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며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몸을 부풀린다. 심지어 책상 위에까지 올라가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물론 베어 그릴스가 야생에서 보여줬던 모습의 과장이고 과잉이지만 그것이 의외로 이 도시 정글에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도 사실이다.

 

중간 중간에 이건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라는 베어 그릴스가 자주 던지는 말을 집어넣으며 얼토당토않은 대응을 해나가는 성호 그릴스. 바로 이 엉뚱함이 이 코미디의 웃음의 코드지만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건 그것이 단지 코미디만이 아닌 현실적인 이야기와 맞닿을 때 다가오는 현실 공감이다.

 

대학을 대학생들의 생존지로 그리면서 출석체크를 성대모사로 대신해주는 성호 그릴스의 모습이나 도서관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자신만의 영역표시를 하는 대목은 그저 웃음을 주는 것 같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취업의 관문을 얘기하다 보면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을 공감하게 된다는 것. 대학을 정글로 그리면서 인분교수를 패러디 대상으로 삼은 건 우리네 현실이 때로는 광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코미디와 별 다를 바 없는 지점이 생겨나기도 한다는 걸 통쾌하게 보여준다.

 

애초에 <SNL코리아>가 가진 두 가지 코드는 성적 농담과 정치 시사를 가리지 않는 과감한 풍자에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풍자가 점점 사라지고 성적 농담만 가득했던 <SNL 코리아>에 대중들은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된 <Man vs City with 성호 그릴스> 같은 코너는 이런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새로운 풍자 코드를 보여준다. 회사든 대학이든 편의점이든 어디서나 발견되는 갑질하는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처절한 생존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걸 성호 그릴스라는 캐릭터는 웃프게도 그려내고 있다.



Posted by 더키앙

정글은 왜 점점 슬퍼지는가

 

30년 전 한 사내가 뉴기니의 해변을 걷다가 얄리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이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백인들은 짐이 많은데 우리 뉴기니인들은 짐이 적은 걸까요?” 뉴기니에서 짐이라는 단어는 재산이라는 뜻이다. 이 뉴기니인 얄리의 질문은 지극히 단순해 보였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사실 같은 지구에 살면서도 왜 누구는 부자로 살게 됐고 또 누구는 가난하게 살게 됐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는 그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그 해답은 <총,균,쇠>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쓰여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그는 이 책으로 1998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사진출처:KBS)

얄리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총, 균, 쇠이다. 즉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삶의 분균형이 생길 수 있었던 원인이 그들이 발명한 총과 그들이 보유한 균(그들에게는 내성이 생겼지만 원시부족에겐 치명적인 이를테면 천연두 같은),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벼려진 칼을 생산하게 해준 강철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생겨난 현재의 빈부가 거기 사는 부족들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유럽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미리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유럽인은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그렇다면 거꾸로 이들이 ‘운이 좋아’ 갖게 된 총, 균, 쇠에 무참히 쓰러져간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요구된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다시 읽히고 다시 주목되는 건 바로 이런 자각 때문일 게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 오면서 서구인들의 사실상의 정복 전쟁을 마치 신대륙 발견 같은 문명의 전파로 보는 그들 중심적인 시각에 대한 반성은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계속 되고 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다수와 소수의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의 논리로서 경쟁보다는 공존의 의미를 찾는 건 결국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이 초래한 전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우리가 이미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최근 들어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남극의 눈물> 같은 눈물 시리즈 다큐멘터리가 오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적인 새로운 시각으로 이 공간을 다시 바라보기 위함이다. 아마존에 들어간 이들은 도시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오지일 수밖에 없는 그 곳에서 벌거벗고 살아가는 원시 부족들의 삶이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 삶일 수 있다고 증언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도시의 침탈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그들의 삶을 아프게 포착해낸다. 그들의 눈물이 우리들의 풍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다시 자각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 프로그램 또한 이 슬픈 정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고 있다. 최근 이 프로그램은 일부 장면들이 과장되게 연출되고 때로는 섭외된 원주민들을 출연시켜 조작방송을 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으로 홍역을 겪기도 했다. 물론 <정글의 법칙>은 그 기획의도가 서구의 대표적인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어 그릴스의 프로그램이 제목처럼 인간과 자연을 여전히 대결구도로 그리고 있다면, <정글의 법칙>은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 다시 찾아내는 가족개념이라든가 원주민들이나 자연과 도시인이 어우러지는 공존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껴지는 비애감은 이러한 좋은 의도로 찾아간 카메라조차 거기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일 게다. 이미 도시의 바람을 쐰 원주민들은 과거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공간에 머물지 못하고 도시로 떠나기 일쑤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에 가서 목격한 것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살아왔던 공간에서 벗어나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과거에는 백인 침략자들을 위협하곤 했던 말라리아가 이제는 도시에 모여든(전염이 강해졌다)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현실이다. 아마도 수많은 방송사들이 이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재조명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어도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을 도시로 끌고 와 결국은 파괴하는 행위가 된 것은 아니었을지. 그들의 삶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혹여나 방송 프로그램으로서 도시인들의 시각과 욕망을 더 투영한 것은 아니었을지.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정글의 법칙>이 정글 속에서 발견한 미덕은 뭐든 문명의 이기를 덕지덕지 붙인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그것들을 떼어내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진짜 삶의 의미일 게다. 그들은 문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자연 뿐인 그 깊은 정글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네온사인 불빛대신 별을 보기 시작했고 자동차 소리 대신 새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이 소비되는 통에 그 가치를 알 수 없었던 한 끼 식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고, 따뜻한 집에 안락한 침대에 널브러져 진짜 안락의 의미를 모르던 우리들에게 그저 비 피하고 등 펼 수 있는 곳에서의 하룻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정글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시선으로 정글을 바라본 것일 지도 모른다. 진짜 정글은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그 자체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존의 눈물>에 이어 <남극의 눈물>을 찍고 돌아온 김진만 PD는 이 ‘조심스러움’에 대해 필자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희가 황제 펭귄을 찍을 때도 짝짓기부터 산란과 부화 과정을 쭉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으로부터 애정이 우러나더라고요. 어제 아팠던 펭귄들이 오늘 가보면 얼어 죽어가고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정말 마음이 아프죠. 규정 때문에 펭귄들이 알을 품을 때는 70m 안쪽으로는 접근 자체를 못해요. 그러니 만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죠. 만약 규정을 어겼다가는 바로 쫓겨납니다. 촬영하는 동안 호주기지 대원들이 내내 감시를 하고 있어요. 새끼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면 옷 안으로 넣어주고 싶고 대피소로 데려가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먹이고 싶었어요. 그러면 바로 원기를 찾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가슴이 미어져도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이 얘기는 지금 현재 원주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방적인 시선과 그 조심스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글의 법칙>의 논란 속에서 불쑥 불거져 나온 몇몇 이야기들은 또 다른 비극이 정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만든다. 실제로 원주민들은 이제 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위협적인 동작을 연출하고,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사냥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조금 심한 농담 속에는 감독이 “액션!”을 외치면 옷을 하나 둘 벗고는 원주민 차림(사실은 거의 벌거벗은)으로 카메라 앞에 나선다는 얘기까지 돌고 돈다. 물론 이것이 모두 사실일 리는 없을 테지만 어쨌든 카메라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원주민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 정복의 시대에 원주민들을 정글에서 몰아낸 것이 총, 균, 쇠였다면 이제 정보의 시대에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가 아닐까. 카메라는 심지어 그 카메라의 목적이 그들의 삶을 지켜내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그들의 삶 속에 도시의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도시에 그들의 삶조차 상품화하고 대상화시켜버린다. 따라서 카메라의 세례(?)를 받은 원주민들은 더 이상 과거의 원주민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진다. 카메라는 그래서 자본주의의 첨병인지도 모른다. 정글이나 오지마저도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 어느 것이든 상품화해버리는 자본의 속성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암울한 징후처럼 보인다. 이제 카메라는 어디든 들어가고 그래서 그 내밀한 정글을 파헤쳐 그들의 삶을 하룻밤의 오지 체험으로 바꾸고 있다. 또 그렇게 카메라를 따라 들어간 자본은 그 원주민들의 삶 또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많은 원주민들이 카메라가 영혼을 뺏어간다고 믿었던 것은 그만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 아닌가. (이 글은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Posted by 더키앙

<정법> 논란의 최대 피해자는 김병만이다

 

공든 탑도 무너진다. 심지어 땀으로 차곡 차곡 쌓아놓은 탑이라고 할지라도. <정글의 법칙>의 계속되는 논란과 그로 인해 눈물 흘리고 있는 김병만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김병만은 과연 무슨 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우리에게 진짜 ‘달인’으로서 개그를 훌쩍 뛰어 넘는 그 땀과 노력에 박수를 치게 만들었던 그였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또 정글에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 바나나를 따 먹고, 나무를 해서 잠자리를 마련하거나 배를 띄우고, 통발로 잡은 물고기로 라면 스프 넣은 어죽을 해서 멤버들과 나눠 먹었던 그였다. 콩가 개미에 물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도 촬영을 강행하려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렇게 하나 하나 땀으로 세워놓은 자기만의 세계가 한 순간에 거짓으로 매도당하게 되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병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 매체가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는 양 폭로한 것처럼, <정글의 법칙>에 등장했던 많은 장소들은 관광 상품으로도 존재한다. 사실 그 어느 오지라고 하더라도 관광 상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히말라야도 그렇고 사하라 사막도 그러하며 툰드라 지대라고 그렇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상황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 상품 아닌 것이 없는 것처럼.

 

다만 관광 상품으로 가는 것과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 낯선 길을 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실제로 관광 상품이 있는 루트라고 하더라도 그 길을 처음 가는 이들이 스스로 겪게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를 수 있다. 사전에 그 길이 어떤 것이든 가보지 않은 김병만으로서는 그 낯설고 뭐든 개척해가야 할 길이 진짜 힘겨운 길이었을 게다.

 

‘관광 상품’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너무 포괄적이며 자극적이다. 마치 <정글의 법칙>이 지금껏 지나온 길들이 그저 돈 내면 누구나 할 수 있는(그것도 관광이니 즐길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다) 것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오지를 체험하는 여행과 도시 여행은 다르고, 군대 체험과 시골 체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또 그 여행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꾸리고 계획하느냐에 따라서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그저 ‘관광 상품’이라는 표현 하나로 묶어버리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의도적이고 자극적인 행위다. 특히 김병만이 영상에서 보여줬던 때로는 피가 나고 때로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위험천만했던 상황들이 모두 조작이며 ‘관광 상품’ 체험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너무 과한 일이다.

 

김병만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열심히 한 죄밖에는 없다. 죄가 있다면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이 100% 리얼을 강조했다는 것일 게다. 아무리 수사적인 의미라고 하더라도 김병만이 말한 것처럼 카메라가 돌아가는 데서 100% 리얼이란 있을 수 없다.

 

사실 이것은 수많은 리얼을 표방한 프로그램들이 리얼리티 논란을 겪는 이유이기도 하다. 논란은 그것이 100% 리얼이 아니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굳이 100% 리얼이라고 강조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제작진들은 리얼을 강조함으로써 영상의 실감과 자극을 높이려는 목적이지만 이것은 때론 부메랑처럼 돌아와 리얼리티 논란으로 불거지곤 한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도 리얼리티 논란을 겪은 적이 있고 실제로 일부 장면에서는 재연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전에 이미 ‘생존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재연된 장면도 일부 있습니다’ 같은 자막으로 설명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만일 이런 어느 정도의 연출이 없이 모든 걸 말 그대로의 리얼로 찍는다면 그것은 안전성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을 시청률을 위해 사지로 몰아넣는다는 윤리적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그 실감 그대로를 전달하기가 어렵다.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에서도 떨어진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흔히들 이렇게 묻는다. 100% 리얼이 아닌데 왜 정글에 가는 걸까. 이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리얼 자체가 아니라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은 사전 자막 고지에 들어 있는 것처럼 시청자들에게 생존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그 목적에 부합하고 효과적이라면 재연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 목적을 보지 않고 리얼이 주는 자극을 먼저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정글의 법칙>의 목적도 리얼 그 자체가 아니다. <정글의 법칙>은 도시를 벗어나 정글이라는 상황 속에서 생존을 넘어선 공존의 의미를 찾아보는 목적을 갖고 있다. 원주민과의 만남은 그들이 문명과 이미 접촉한(대부분이 그럴 것이지만) 이들이라고 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풍습들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어떤 공감하고 공존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에 더 의미가 있었을 게다. 이 의미를 보지 못하면 결국 자극만 남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얼 공방 속에는 자극에 대한 제작진과 시청자 사이에 놓여있는 모종의 약속이 깨진 것에 대한 허탈감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정글의 법칙>의 가장 큰 잘못은 연출이 가능하고 때로는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프로그램을 통해 사전 고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이 제 아무리 다큐와의 접목을 추구했다고 해도 결국은 예능 프로그램의 틀을 벗어날 수 없고, 예능은 어떤 식으로든 특유의 스토리텔링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자막은 상황을 좀 더 극대화시키고 편집은 아무런 의미 없어 보였던 행위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은 예능이 아니라 다큐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재미를 추구하는 예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매번 리얼리티 논란이 나올 때마다 먼저 드는 느낌은 달을 보지 않고 그걸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리얼리티냐 아니냐는 자극의 틀은, 결국 제작진으로 하여금 100% 리얼처럼 보이려는 비뚤어진 욕망을 만들어내고, 시청자로 하여금 그 욕망만을 소비하게 만든다. 리얼리티 논란 속에서 <정글의 법칙>이 가졌던 본래의 좋은 기획 의도는 점점 잊혀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논란으로 의도치 않은 피해를 보게 된 건 바로 김병만이라는 사실이다. 제작진이 사전에 준비해놓은 정글 속이라고 해도 김병만이 그 속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제아무리 편집되고 연출된 영상이라고 해도 이미 대중들이 방송을 통해 무수히 봐왔던 것들이다. 결국 그렇게 찍은 영상을 요리하는데 있어서 생겨난 문제라면 그것은 제작진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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