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천국보다 낯선'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이란 영화는 영화보다 포스터를 먼저 알게 되었다. 영어로 'Stranger Than Paradise'라고 크게 적힌 포스터 속에는 두 남자가 차 밖에 서 있고 차 안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모두 선글라스를 낀 그 모습에 유난히 풍성한 뭉게구름이 피어난 하늘은 정말 이국적이었다. 영화는 못 봤어도 그 포스터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어딘가 떠날 때 갖게 되는 막연한 설렘 같은 것들이 거기에서는 느껴졌다. 말 그대로 막연한.
멜버른 다운타운에서 빌려와 본 '천국보다 낯선'은 그러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헝가리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에바가 뉴욕에 사는 건달 친척 윌리와 그 친구인 에디와 함께 클리브랜드를 여행하면서 철도길에서 하는 대사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엄청 멀리 온 것 같은데, 여기도 똑같네." 그러니까 포스터에 있는 그들은 그렇게 멀리까지 천국처럼 낯설 것이라 여겨진 미국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다를 바 없는 스산한 거리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포스터를 보고 나니 그간 멜버른 생활에 적응해온 나 자신이 다시 보였다.
사실 피부색만 조금 달라도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여기며 눈을 피하던 나는 어느새 동네 펍(Pub)에 앉아 주민들과 맥주를 마시며 안 되는 영어로 더듬더듬 농담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이 때 음주영어를 한 탓에 술을 마셔야 영어가 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반응? 낯선 것을 워낙 싫어하는 나만큼 별의 별 포비아를 가진 사람도 드물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힘겨워 평생 친구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사귀는 나로서는, 신종 인플루엔자니 방사능이니 하는 각종 살벌한 이질적인 것들의 틈입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래도 그나마 이정도 버티고 사는 건 아마도 그 때 멜버른에서 겪었던 '천국보다 낯선' 경험 덕분일 게다. 세상에 어디 낯선 곳(것)이 따로 정해져 있을까. 이 곳에 있으면 저 곳이 저 곳에 있으면 이 곳이 낯설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년 후 밟은 한국땅에서 그 낯설음에 일순 포비아를 느꼈다. 맙소사! 인간의 간사함이라니.
(이 글은 사보 모터스라인에 게재된 글입니다)
'옛글들 > 스토리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함에 대하여 (3) | 2011.06.17 |
---|---|
짐승남 되려고 짐승처럼 살아야겠냐 (0) | 2011.06.10 |
존재감이여! 미치도록 보여주고픈 (0) | 2011.04.14 |
공감의 시대, 21세기식 소통법 (0) | 2011.04.11 |
제 점수는요... 합격! 두근두근 쿵쿵! (0) | 2011.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