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천국보다 낯선? 혹은 어디나 똑같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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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혹은 어디나 똑같은

D.H.Jung 2011. 5. 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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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낯선 곳에 가는 걸 원체 좋아하질 않는다. 그런 내가 20대 중반에 혼자 12시간 비행을 해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그 때는 영어가 젬병이었다) 멜버른의 그것도 한참 외곽에 있는 대학교 기숙사를 찾아갔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모험이었다. 홍콩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포비아(Phobia)를 경험했다. 탑승시간은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이국의 공항에서 길 잃은 청년이 겪었을 공포감을 생각해보라. 가까스로 비행기를 타고 멜버른에 도착해서 택시 타고 물어물어 기숙사에 도착했는데, 마침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면 주변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 바람에 거의 이틀을 굶다시피 살아야 했다. 문밖을 나서면 외계인이 달려들기나 하는 것처럼, 기숙사 방에 콕 박혀서. 그 때 기숙사 벽 한쪽에는 내가 가져간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이란 영화는 영화보다 포스터를 먼저 알게 되었다. 영어로 'Stranger Than Paradise'라고 크게 적힌 포스터 속에는 두 남자가 차 밖에 서 있고 차 안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모두 선글라스를 낀 그 모습에 유난히 풍성한 뭉게구름이 피어난 하늘은 정말 이국적이었다. 영화는 못 봤어도 그 포스터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어딘가 떠날 때 갖게 되는 막연한 설렘 같은 것들이 거기에서는 느껴졌다. 말 그대로 막연한.

멜버른 다운타운에서 빌려와 본 '천국보다 낯선'은 그러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헝가리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에바가 뉴욕에 사는 건달 친척 윌리와 그 친구인 에디와 함께 클리브랜드를 여행하면서 철도길에서 하는 대사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엄청 멀리 온 것 같은데, 여기도 똑같네." 그러니까 포스터에 있는 그들은 그렇게 멀리까지 천국처럼 낯설 것이라 여겨진 미국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다를 바 없는 스산한 거리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포스터를 보고 나니 그간 멜버른 생활에 적응해온 나 자신이 다시 보였다.

사실 피부색만 조금 달라도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여기며 눈을 피하던 나는 어느새 동네 펍(Pub)에 앉아 주민들과 맥주를 마시며 안 되는 영어로 더듬더듬 농담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이 때 음주영어를 한 탓에 술을 마셔야 영어가 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반응? 낯선 것을 워낙 싫어하는 나만큼 별의 별 포비아를 가진 사람도 드물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힘겨워 평생 친구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사귀는 나로서는, 신종 인플루엔자니 방사능이니 하는 각종 살벌한 이질적인 것들의 틈입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래도 그나마 이정도 버티고 사는 건 아마도 그 때 멜버른에서 겪었던 '천국보다 낯선' 경험 덕분일 게다. 세상에 어디 낯선 곳(것)이 따로 정해져 있을까. 이 곳에 있으면 저 곳이 저 곳에 있으면 이 곳이 낯설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년 후 밟은 한국땅에서 그 낯설음에 일순 포비아를 느꼈다. 맙소사! 인간의 간사함이라니.
(이 글은 사보 모터스라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