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강정’, 명작과 괴작을 가를 이 황당한 드라마의 분수령은?

닭강정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의 기계에 들어갔던 딸이 닭강정으로 변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이 펼쳐놓는 상상의 세계는 이토록 황당하다. 치킨집을 소재로 해 무려 1600만 관객을 동원한 초대박 영화 <극한직업>에 이어 이병헌 감독이 또다시 닭을 소재로 한다는 점을 <닭강정>은 강조한다. 그래서 작품 소개도 ‘신계(鷄)념 코믹 미스터리 추적극’이라고 적시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시청자들이 ‘신계(鷄)념’ 추적극으로 보게 될지 아니면 ‘황당무계(鷄) 추적극’으로 볼 지는 아직 미지수다.

 

포스터만 봐도 느껴지듯이 <닭강정>은 B급 병맛 코미디다. 이상한 노래를 중얼거리며 춤을 추며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으로 첫 등장하는 백중(안재홍)만 봐도 딱 알아차릴 수 있다. 이건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서 몇 발짝 정도 하늘 위로 들어올려져 있는 상상의 세계가 펼쳐질 거라는 걸 백중의 그 등장만으로 금세 예감할 수 있다. 그 병맛 가득한 백중의 등장을 길거리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데 그건 바로 시청자들의 시선 그대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백중은 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듯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추며 거리를 걸어나간다. 그건 <닭강정>이 앞으로 펼쳐나갈 상상의 소신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민아(김유정)가 닭강정으로 변해버리자, 그의 아빠 선만(류승룡)과 그를 짝사랑해온 백중은 충격과 절망감에 빠져버리고, 어떻게든 이 닭강정을 다시 민아로 되돌리려 안간힘을 쓰는데 그 황당한 상황은 그 자체로 코미디가 된다. 누가 봐도 닭강정일 뿐인데 그걸 딸이라며 소중하게 챙기려는 두 사람의 진짜 절실해 보이는 안간힘이 부조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그 황당한 상황에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다가, 마치 하나하나의 시트콤처럼 상황이 주는 웃음에 조금씩 빠져들다가, 점점 이 말도 안되는 상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선만과 백중의 절실함까지 공감하게 되는 이상한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이병헌 감독이 꿈꾸는 것이고 <닭강정>이라는 세계가 제대로 시청자들을 그 안으로 빨아들임으로써 사람이 닭강정이 되는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됐을 때의 일이다. 만일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 이 작품은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알 수 없는 괴작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관건은 <닭강정>이라는 세계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어떤 힘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힘을 만드는 관건은 세 가지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니 얼마나 ‘웃음의 밀도’를 높여 놓았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황당한 상황도 정신없이 웃게 만드는 빵빵 터지는 코미디를 촘촘하게 세워두면 결국 비현실도 선선히 받아들이게 되는 힘이 만들어진다. 이건 많은 판타지나 비현실을 담는 콘텐츠들이 자주 전략적으로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현실을 강조하면 오히려 비현실이 드러나는 콘텐츠들은 유머 코드를 슬쩍 채워넣음으로써 정반대로 비현실성을 가리는 전략을 쓰는 것.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 같은 작품이 그 비현실성을 뛰어넘어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들어줬던 힘 역시 바로 이 웃음의 밀도가 그만큼 촘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웃음에서도 중요해지는 건 그저 황당하고 표피적인 웃음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현실의 은유나 풍자적인 웃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이 <닭강정>의 다소 황당무계한 세계관을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고 열광할 수 있는가를 가르는 두 번째 관건이다. 

 

<닭강정>의 황당한 설정이 주는 코미디는 과연 어떤 현실을 은유하고 풍자하는 것일까. 사람이 닭강정으로 변한 그 상황은 우리에게 표피적인 웃음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 화면만 열면 여기저기 우후죽순 등장하는 먹방들처럼 지나치게 먹거리에 집착하는 사회에 대한 풍자적 시선이나, 혹은 이를 산업화하는 자본화된 세상 꼬집기 같은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결국 비현실을 가져와 만들어내는 웃음은 현실을 밑그림에 깔고 있을 때 그저 휘발되지 않는다. 시리즈 같은 긴 호흡의 작품이라면 그걸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은 결국 이 현실 공감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닭강정>이 괴작이 아니라 재기발랄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명작이 되기 위한 관건은 이 비현실을 현실로 믿게 만드는 연출과 연기적 요소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신뢰가 투텁다. 안재홍은 첫 등장부터 이 작품이 어떤 세계를 갖고 있는가를 그 길거리를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추며 걸어나가는 장면으로 납득시켰고, 류승룡은 딸이 닭강정으로 변했다는 황당한 사건을 금세 믿게 할 정도로 충격에서부터 부정이 느껴지는 슬픔까지 담아 진지하게(그래서 웃기지만) 연기해냈다. 

 

여기에 이병헌 감독 특유의 말맛이 살아있는 대사와 그 상황들을 효과적인 병맛 코미디로 그려내는 연출이 더해졌다. 그러니 일단 온라인 시사회로 언론에 선공개된 3회까지만 보면, 황당하지만 저도 모르게 빠져드는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단언할 수 있다. 다만 그 힘이 연기와 연출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진짜 이 작품의 코미디가 건드리는 현실 은유의 깊이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는 나머지 7회분을 다 봐야 제대로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명작일지 괴작일지, 공개된<닭강정>을 의구심과 설렘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보려는 이유다. 닭강정에 맥주 한 잔 곁들여 불금을 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사진:넷플릭스)

‘20세기 소녀’, 넷플릭스가 꺼내놓은 K멜로 세계도 반응할까

20세기 소녀

첫 사랑이다. 간만에 다시 느껴보는 첫 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가슴 아픔까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20세기 소녀>는 간만에 보는 본격 멜로의 감성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심장수술을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연두(노윤서)를 위해 그의 둘도 없는 친구 보라(김유정)는 친구가 짝사랑하는 백현진(박정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알려주기로 한다. 그런데 백현진을 관찰하다 보니 그의 친구 풍운호(변우석)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보라는 풍운호와 가까워지지만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연두가 짝사랑했던 인물이 백현진이 아니라 풍운호였다는 사실이 충격을 받는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 풍의 첫 사랑 서사다. 친구와의 우정과 이성과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삼각, 사각으로 얽히는 관계 속에서 처음에는 설레다가 깊어지고 그래서 아파하게 되며 힘들어하는 그 저릿하지만 익숙한 이야기. 세기말의 레트로한 감성이 있는데다 풋풋한 청춘남녀들의 사랑과 우정이야기가 펼쳐져 있어 어딘가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익숙한 첫 사랑의 서사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고, 과몰입하게 되더니 어느 순간 눈물을 훔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옛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20세기 소녀>의 풋풋한 사랑과 우정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이 익숙한 스토리에 관객을 빠져들게 만드는 K멜로 특유의 섬세한 밀당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중전화, 삐삐 같은 지금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20세기 연애의 매개체들은, 애타는 청춘남녀들의 마음이 곧바로 연결되지 않고 엇갈리기도 하는 중요한 장치들이 된다. 전화 한 통이나 혹은 문자 메시지 하나로 쉽게 연결되고 쉽게 끊어지는 21세기와는 전혀 다른 감성이 바로 이 20세기식 연애에는 자연스러운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가 어른이 된 나보라에게 배달된 낡은 비디오테이프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이런 감성을 말해준다. 

 

첫사랑 서사는 어딘가 현재의 나가 바라보는 그 때 그 시절의 서툴렀지만 순수하고 풋풋했던 우리 모두의 감성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20세기 소녀>는 20세기와 21세기로 구분되는 달라진 시대적 감성을 또 다른 관점으로 붙여 놓는다. 그래서 21세기에 바라보는 20세기의 사랑이야기는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네 영화에서 멜로 장르는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이 되어버린 게 현실이다.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 떠오르는 건 2019년 방영됐던 <유열의 음악앨범> 정도다. <8월의 크리마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행복(2007)>, <호우시절(2009)> 같은 레전드 멜로를 연출했던 허진호 감독이 본격 멜로에서 벗어나 <덕혜옹주(2016)>나 <천문:하늘에 묻는다(2019)> 같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든 건 아무래도 극장이라는 공간에서의 멜로가 더 이상 관객들을 끌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신 허진호 감독은 2021년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안방극장에 멜로를 그려 넣었다. 

 

<건축학개론(2012)> 같은 첫사랑 서사를 담은 멜로가 극장에서 열풍을 일으키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여기에 OTT 같은 안방극장이 본격화되면서 멀티플렉스 극장은 그만큼 블록버스터화한 영화들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에서 만나는 첫사랑 서사를 담은 본격 멜로 영화 <20세기 소녀>는 더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극장의 변화로 인해 설 자리를 잃어가던 멜로 영화가 다시금 설 자리를 마련한 듯한 반가움이다. 

 

이 작품은 특히 최근 들어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에 의해 <연모>, <스물다섯 스물하나>, <갯마을 차차차>, <사내맞선> 등등 전 세계에 저변이 만들어지고 있는 K멜로의 저력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향후 글로벌 반응이 궁금해진다. 서구의 멜로에서는 보기 어려운, 피부가 아니라 가슴을 간지럽게 하고 뛰게 만들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K멜로의 힘이 이 작품 안에 녹아 있다.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 저마다 가슴 한 편의 첫 사랑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시간 속에 빠져보기를.(사진:넷플릭스)

‘홍천기’, 간만에 잘 빠진 판타지 사극의 탄생

홍천기

하람(안효섭)이 볼 수 있었을 때 홍천기(김유정)는 앞을 못 봤고, 홍천기가 보게 됐을 때 하람은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이 설정은 홍천기와 하람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은 이 드라마를 더 애틋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사랑은, 서로를 동시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어떤 가림막이 세워지고 그래서 그 가림막을 뛰어넘어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의 애틋함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어려서 기우제 날 우연히 만나 함께 복숭아 서리를 나서고 복사꽃 아래서 조금씩 마음을 나눴던 홍천기와 하람. 당시 앞 못 보던 홍천기는 그 날 나누었던 말과 복사꽃 향기로 하람을 기억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우제 날 홍천기와 하람의 처지는 정반대가 된다. 기우제의 희생 제물로 서게 된 하람의 몸속으로 마왕이 깃들고, 그걸 알게 된 삼신(문숙)이 마왕이 깨어나는 걸 막기 위해 하람의 눈을 빼앗고 그 눈을 홍천기에게 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홍천기는 눈을 뜨고 하람은 눈이 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두 사람은 다시 운명처럼 만나지만 서로를 단박에 알아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람은 점점 어려서 만났던 복사꽃 아래 소녀와 홍천기가 겹쳐지고 호위무사를 통해 그가 바로 그 소녀였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복수를 꿈꾸는 그는 홍천기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다만 한 걸음 떨어져 그를 도울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홍천기도 하람이 그 때 복사꽃 아래서 만났던 소년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그림 오디션인 ‘매죽헌 화회’는 ‘본다’는 사실을 모티브로 한 <홍천기>의 성장서사와 운명적 사랑이야기가 잘 드러난 에피소드다. 그림 고수들이 모여든 가운데, ‘달빛 아래 핀 매화가 향이 그윽해, 나비가 봄이 벌써 온 줄 알고 떼 지어 날아든다’는 1차 화제의 그림으로 홍천기는 하늘로 곧게 뻗은 매화가지와 둥글게 피어오른 달 그리고 그 매화 향기를 찾아 날아든 듯한 나비를 그렸다. 하지만 그 나비 화제는 사실 양명대군(공명)이 모작의 범인을 찾기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모두가 홍천기의 그림에 탄성을 자아낼 때 양명대군은 그 매화의 그림이 너무 과하다는 트집을 잡아 불통을 준다. 나비 그림을 통해 모작의 범인이 바로 홍천기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에 승복할 수 없는 홍천기가 양명대군에게 불통의 이유를 묻고 팽팽한 설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때 갑자기 나타난 나비 한 쌍이 홍천기가 그린 매화 그림 위로 날아와 앉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그 광경을 보던 고화원 성화 한건(장현성)이 홍천기에게 완통패를 써 그를 통과시킨다. 그가 이번 그림 대회를 통해 찾으려던 ‘신령한 화공’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매죽헌 화회의 나비 에피소드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 앞에 선 청춘들을 위한 위로처럼 보인다. 품계와 신분을 공개하지 않고 뽑는 일종의 ‘블라인드 오디션’을 한다 했지만 결국 양명대군의 판단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는 것 아니냐고 항의하는 홍천기에서 스펙사회에서 질식되어 가는 청춘들의 초상이 그려진다. 그렇게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을 알아봐주는 나비 한 쌍의 이야기는 그래서 판타지지만 믿고픈 통쾌한 서사로 다가온다. 

 

또한 매죽헌 화회는 홍천기가 하람을 알아보게 되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즉 2차 화제를 낼 주인공으로 양명대군이 하림을 지목하는데 그가 낸 화제가 홍천기의 기억 속 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것. ‘봄기운 산중에 가득하고 복사꽃 사이를 노니는 데 홀연 복숭아가 기다려져 아침저녁으로 찾는구나’. 그 화제는 다름 아닌 홍천기와 하림이 어려서 복사꽃 아래를 뛰어 놀던 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즉 ‘보지 못한다’는 은유이자 설정은 <홍천기>에서 여러 갈래로 활용된다. 그 첫 번째는 스펙이 없다는 이유로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청춘이라는 알레고리로 쓰이고, 두 번째는 사랑에 있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눈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 물론 그것은 이 드라마가 소재로 삼고 있는 그림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다. 눈을 그려 넣어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는 ‘화룡점정’의 고사를 뒤집어 그렇게 그려낸 신령한 그림에 마왕을 봉인한다는 설정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홍천기>에 등장하는 나비에는 그래서 눈 모양이 날개에 담겨 있다. 나비를 자신의 수결로 그려 넣는 홍천기는 눈을 그려 넣는(보게 만드는) 화공이다. 마왕이 봉인된 하람의 뒷목덜미에는 나비문양이 새겨져 있다. 봉인이 깨지면 나비문양이 사라지고 마왕이 깨어난다. 결국 홍천기라는 신령한 화공이 해야 하는 일은 그 마왕을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봉인하고 하람을 본래대로 되살리는 일이다. 이 판타지 설정을 잘 들여다보면, 매죽헌 화회에서 매화 그림으로 진짜 나비를 끌어들인 그 에피소드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건 향후 그가 하람의 몸에 깃든 마왕을 나비처럼 그림 속으로 끌어 들일 거라는 복선일 테니 말이다. 

 

화룡점정의 고사를 활용한 판타지 설정, 그리고 ‘보지 못한다’는 은유를 통해 그려내는 청춘들의 성장 서사와 더불어 그려지는 운명적인 사랑의 알레고리. 간만에 잘 빠진 판타지 사극의 전조가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마왕 같은 다소 황당해 보이는 판타지에 괜스레 눈 멀지 말고, 그 판타지가 그려내려는 결코 얕지 않은 이야기에 눈을 뜰 일이다. 판타지 사극이라고 해서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건 선입견에 눈먼 자들의 편견일 뿐이니.(사진:SBS)

‘홍천기’, 청춘들을 통해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

홍천기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건 어떤 고통일까. 아마도 누구나 당연한 듯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진 채 태어난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고통일 게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청춘들은 번갈아가며 앞을 못 보는 저주를 입은 채 살아간다. 마왕을 그림 속에 봉인하기 위해 영종어용을 그린 아버지 홍은오(최광일)로 인해 홍천기(아역 이남경)는 앞을 못 보는 마왕의 저주를 받은 채 태어난다. 한편 마왕의 봉인식을 주관했던 하성진(한상진)은 토사구팽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그로부터 9년 후 마왕의 저주로 인해 오랜 가뭄이 찾아오고 그래서 기우제를 올리는 날 홍천기와 하성진의 아들 하람(아역 최승훈)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성주청 국무당 미수(채국희)가 하람을 인신공양의 제물로 쓰려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마침 주향대군(곽시양)이 봉인을 열어버린 마왕이 튀어나와 하람의 몸에 깃들면서 살아남게 된다. 대신 그 순간 삼신(문숙)이 등장해 하람의 몸에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 눈을 가져가고, 대신 그 눈을 홍천기에게 맡긴다. 이로써 앞을 못 보던 홍천기는 눈을 뜨게 되고 하람은 앞을 못 보게 된다. 

 

마왕이 등장하고 그로 인한 저주를 막기 위한 삼신이 등장한다. 그러니 판타지라도 사극의 배경을 가져온 <홍천기>의 시작은 그 장면 자체가 낯설기 그지없다. 사극에 마왕을 CG로 표현해 넣는다는 건 제아무리 잘 표현해도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장태유 감독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앞부분에 대놓고 다소 황당하고 이질적인 이 판타지의 면면들을 과감하게 채워놓는다. 마치 한 편의 설화처럼 전제해 놓고, 그 이질적인 판타지 이후에 차근차근 사극 특유의 색깔을 덧칠해 시청자들을 몰입시키겠다는 연출의도다. 

 

기우제 날의 엇갈린 운명이 있던 날로부터 19년 후, 성인이 된 홍천기(김유정)와 하람(안효섭)은 저마다의 매력으로 이 사극의 시청자들을 다시금 몰입시킨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남다른 그림의 재주를 가진 홍천기는 모작을 그려 번 돈으로 마왕의 저주로 광증이 생긴 아버지를 어떻게든 고쳐보려 하고, 눈이 먼 하람은 그 와중에도 서문과 주부이자 신비로운 인물 일월성이란 이름으로 가족을 잃게 만든 왕실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그들은 저마다 아픔이 있고 그래서 그걸 넘어서기 위한 욕망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욕망에 눈이 머는 인물들은 아니다. 청춘이 마주한 만만찮은 고통 속에서 이를 벗어나려 애쓸 뿐. 

 

이 판타지 사극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앞을 못 본다’는 설정이나 눈이 갖고 있는 은유다. <홍천기>가 담고 있는 그림이라는 소재에서 ‘눈’은 우리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용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라 말했다는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공의 이야기에서 나온 고사성어다. 그 고사성어를 <홍천기>는 정반대의 이야기로 끌어들인다. 눈을 그려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고, 눈을 그려 넣은 영종어용에 마왕을 깃들여 봉인하는 방식으로. 

 

<홍천기>에서 하람이 겪게 된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은 마왕을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봉인의 의미를 갖는다. 그건 그가 원해 벌어진 일이 아니고 고통스런 형벌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세상은 구원받는다. 청춘에게 내려진 고통이 세상을 구원하는 희생의 의미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람에게 봉인된 마왕은 홍천기를 다시 만나게 됨으로써 깨어난다. 그런데 하람의 봉인에서 빠져나온 마왕이 노리는 건 홍천기의 눈이다. 삼신이 옮겨 놓은 그 눈을 가져와야 자신이 진짜 깨어날 수 있어서다. 

 

여기서 하람은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마왕과 본래 자신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갈등하는 존재가 된다. 홍천기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하람과, 그의 눈을 빼앗아야 하는 마왕이 그 한 몸에서 싸우게 되는 격이다. 과연 하람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 사랑일까. 욕망일까. 결말을 섣부르게 예단할 순 없지만 그 이야기에 화공인 홍천기의 그림이 한 역할을 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사람의 몸에 깃든 마왕을 그림으로 봉인해내는 것. 그 과정에서 하람과 홍천기는 어떤 운명적인 사랑을 그려내게 될까. 

 

판타지 사극이지만, <홍천기>의 이야기는 묘하게 현재의 청춘들을 위로하는 목소리가 얹어져 있다. ‘앞을 못 본다’는 그 설정의 은유가 그렇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청춘들은 그들 앞에 놓여진 어려움이 마치 자신들의 탓인 양 한탄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드라마는 시작부터 어린 하람(최승훈)과 홍천기(이남경)의 대화 속에 풀어놓는다. 

 

“너도 똑같애. 내가 앞을 보지 못해서,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어머니가 날 낳자마자 돌아가셔서 난 친구가 없다.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 해 저주 받은 아이라고... 난 그냥 복숭아를 같이 먹고 싶었어.” 같이 복숭아 서리를 해 도망친 후 이를 질책하는 하람에게 홍천기가 그렇게 말하자 하람은 그것이 모두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미안해. 헌데 니 어머니가 널 낳고 돌아가신 것도, 네가 앞이 보이지 않게 태어난 것도,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도 네 탓이 아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너에게 벌어진 일이 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라구.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허니 어쩔 수 없는 일로 너를 탓하지 말아라.”

 

이 짧은 대사의 주고받음 속에 <홍천기>가 앞으로 펼쳐나갈 청춘들의 이야기에 머금은 위로의 정체가 숨겨져 있다. 그 현실 앞에 분노가 끓어오르지만(그것이 마왕이 튀어나오는 순간이 아닐까), 서로를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사랑이 있어(홍천기와의 로맨스가 그것일 게다) 해법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하람과 홍천기의 희생을 통해, 세상이 어려워도 그나마 살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 바로 청춘이라는 걸 그려내는 것만으로 이 드라마가 주는 위로는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눈을 그려 넣어주지 못해 훨훨 날지 못하는 청춘이라는 용을 깨워낼 수 있기를.(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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