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직후 글로벌 1위 찍은 ‘이쿠사가미’, 사무라이 버전 ‘오징어 게임’?

이쿠사가미

이건 <오징어 게임>과 <바람의 검심>을 합쳐 놓은 거 아닌가.

넷플릭스 새 시리즈 <이쿠사가미:전쟁의 신>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다.

시작은 사무라이 액션으로 문을 연다.

원테이크로 찍혀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 치열한 전쟁터에서 사무라이들이 맞붙는 장면이다.

사가 슈지로(오카다 준이치)는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만 곧 어디선가 날아온 무차별 포격에 함께 싸운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며 사무라이들이 이제는 설 자리가 없어진 상황을 이 전쟁 상황은 압축해서 보여준다. 

 

칼 쓰는 일 이외에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폐도령이 내려져 가난해진 데다,

마침 호열자(콜레라)까지 번져 죽어가는 가족을 안타깝게 바라봐야 하는 슈지로는

어느 날 교토의 텐류지에서 10만 엔 상금을 걸고 벌어지는 대회에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된다.

슈지로는 집을 떠나 그 대회에 참가하는데, 수백 명의 사무라이들이 모인 그 곳에서는 생존게임이 벌어진다.

살아남는 단 한 사람만이 10만 엔을 가져갈 수 있는. 

이쿠사가미

시작은 메이지 유신을 배경으로 칼잡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바람의 검심>을 떠올리게 하지만,

생존게임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오징어 게임>의 사무라이 버전으로 옮겨진다.

마지막 전쟁의 충격으로 칼을 뽑지 못하는 슈지로는 생계를 위해 참가한 소녀 카츠키와 생존하기 위해 칼을 빼들고,

죽고 죽이는 이 싸움에 뛰어든다.

<오징어 게임>이 그러하듯이 이 게임에도 주최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숨겨진 음모가 존재한다.

슈지로는 과거 한 스승 밑에서 배웠던 사형제나,

필요에 의해 동맹을 맺는 이들과 힙을 합쳐 게임의 배후를 추적하려 한다. 

 

이 정도면 <오징어 게임>의 냄새가 짙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돈과 권력을 가진 게임의 주최자가 있고,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참가자들의 생존 게임이 펼쳐진다.

주최자들의 음모를 파헤치고 대적하기 위한 참가자들의 연합이 생겨나고, 이들의 전쟁이 그려진다.

<오징어 게임>의 이야기 구조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쿠사가미>는 사무라이 버전 특유의 색깔을 입혀 눈을 뗄 수 없는 액션의 향연을 채워 넣는다.

<바람의 검심>에서 익숙했던 여러 특성을 가진 적들이 등장하고, 그들과 펼치는 다채로운 액션이 그것이다. 

 

<오징어 게임> 같은 데스 서바이벌 장르에 대한 글로벌 기대치가 생긴 것인지,

<이쿠사가미>는 공개와 동시에 OTT 순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서 넷플릭스 TV 시리즈 글로벌 1위를 찍었다.

전 세계 분포를 보면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 대부분은 물론이고 북미와 남미, 유럽, 남태평양 국가들까지 고른 인기를 보였다.

어딘가 <오징어 게임> 신드롬의 향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이쿠사가미

물론 <오징어 게임>이 갖는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들과는 달리,

<이쿠사가미>는 사무라이 액션 장르 특유의 비장미로 가득 채워져 있다.

생존 게임이라는 이야기 구조는 같아도 일본 특유의 로컬 색깔을 보다 부각시킨 것이고,

무엇보다 사무라이 장르를 좋아하는 이들의 취향을 극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시즌1에 해당하는 6회가 공개됐을 뿐이고, 서사도 이제 도입 정도다.

향후 시즌이 계속 공개되며 생겨날 글로벌 시너지가 예견되는 대목이다.

 

<이쿠사가미>의 등장은 넷플릭스 시리즈가 갖는 시즌제 성격의 제작 방식이

이제는 성공 콘텐츠나 장르의 로컬 버전 재해석으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알다시피 IP를 소유한 넷플릭스로서는 <오징어 게임> 같은 성공을 또 다른 방식으로 재연하고픈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무라이 버전이 가능하고 또 성과를 낼 수 있다면, 또 다른 로컬 색깔을 더한 작품들이 가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장르화를 통해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은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기업이 늘 해왔던 방식이지만,

그 상업적인 성공만큼 반복되는 서사에 대한 피로도도 높아질 수 있다.

실제로 <오징어 게임>처럼 게임화된 서사는 디즈니+에서 최근 공개된 <조각도시> 같은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게 됐다.

물론 무고한 이를 범죄자로 만들어내는 빌런과 싸우는 이야기지만,

<조각도시>에는 갑자기 빌런이 판을 벌인 레이싱장에서의 생존 게임이 펼쳐진다.

부유한 관전자들이 내려 보는 가운데. 

이쿠사가미

성공을 바라는 건 모든 작품의 공통된 욕망이지만,

그렇다고 작품이 균일화된 틀에 들어가 상품처럼 찍혀지는 건(물론 외형은 다른 것처럼 보이려 변환되지만)

어딘가 퇴행적인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이제 사무라이 버전의 <오징어 게임>이 등장해 이미 성과를 내고 있다는 건 어쩌면

이 열풍처럼 번질 데스 서바이벌이라는 장르의 확산을 예감케 한다.

그것은 어쩌면 넷플릭스 같은 관전자가 전 세계를 두고 펼치는

콘텐츠 서바이벌 전쟁의 ‘라스트 맨 스탠딩’ 게임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달리는 속도에서 걷는 속도로

응답하라 1988

급한 일이 없는 날이면 약속장소에 늘 30분 정도 일찍 나간다. 서촌이나 북촌, 인사동, 종로에서 주로 약속을 잡는데 그곳 골목길들을 걷는 게 재미있어서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해 골목길들을 슬슬 걸어 다니며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은 카페와 음식점들로 가득 채워져 말 그대로 인파가 몰리는 익선동 골목도 7,8년 전만 해도 한옥의 처마를 그늘 삼아 슬슬 걷기 딱 좋은 길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들고 그 길에 들어서면 고즈넉한 분위기에 순간 도시 한 복판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 골목길에 '거북슈퍼' 하나가 달랑 있었는데, 비 오는 날 그 가맥집에서 병맥주를 마시며 빗소리를 듣는 기분이 그만이었다. 물론 거북슈퍼가 있던 자리에 세련된 음식점들이 잔뜩 들어선 지금은 그곳을 잘 찾지 않는다. 그때의 정취가 잘 느껴지지 않아서다. 대신 요즘은경복궁역 뒤편 서촌 쪽에 약속을 하고 그 골목길들을 쏘다닌다. 그곳 골목길은미로처럼 뻗어있어 일단 들어서면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준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발길이 어디에 닿을지 못내 궁금해진다. 어쩌다 길을 따라 수성동계곡까지 올라가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걸 보다 보면 이곳이 서울 한복판에 숨겨진 별천지라는 생각이 든다. 구석구석 걸어 다녀야 비로소 보이고 발견되는 별천지.

 

그때는 가치를 미처 몰랐던 것들이 있다. 집에 놓여있던 유선전화기 앞에서 사랑하는 누군가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던 시간과, 마음을 글 몇 줄에 담아 적어보던 편지들 그리고 한쪽 귀로 나누어 듣던 워크맨 노래들 같은 게 그것이다. 골목길도 그랬다.그저 좁기만 했던 골목은 더럽게만 느껴졌고, 그 골목 한편에 놓인 평상에서 골목으로 들어오는 아이들 하나하나에 인사를 하고 참견을 하던 이웃 아주머니들의 오지랖은 불편하게만 생각되었다. 하다못해 왁자하게 떠들며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아이들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그 골목이 싹 밀어진 자리에 세워진 말끔한 아파트에 살다 보니 이제 알게 되었다. 그것이 꽤 그립고 따뜻한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은 쌍문동 봉황당 골목 풍경으로 시작한다. 택이네 집에서 함께 ‘영웅본색’을 보던 친구들이 6시 괘종시계 소리와 함께 집집마다 “밥 먹어라” 하고 부르는 엄마들의 소리에 집으로 돌아간다. 변진섭의 ‘새들처럼’이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카메라가 훑어 보여주는 골목길 정경은 당대를 살았던 이들의 기억을 되살려 놓는다.익숙한 철제문들과 현관 위에 놓인 화분들, 포스터들이 잔뜩 붙였다 떨어진 흔적이 가득한 담벼락, 위로 넣고 앞으로 빼내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옛날 쓰레기통과 그 옆에 놓인 연탄재들, 버려진 의자들, 대야들. 도둑이 넘어올 수 없게 깨진 사이다병과 맥주병을 거꾸로 꽂아 놓은 담장, ‘사글세 있습니다’, ‘잠잘 방 있습니다’ 같은 전단이 붙어 있는 전봇대, ‘양담배 있습니다’라 적힌 담뱃가게, ‘금은보석 고급시계’라 적힌 촌스럽기 이를 데 없이 화려한 봉황당이라는 간판... 그 풍경들 위로 훗날 이때를 회고하는 덕선의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 난 이 골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시간들을 우린 대체 뭘 하면서 보냈을까?”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건드린 정서적 뇌관은 지금은 찾기 힘든 그 골목길 풍경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렸거나 혹은 사라져 가는 것들을 그 1988년의 쌍문동 골목길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제 보니 그 골목길은 사람과 사람을 얇디얇은 벽으로 막아놓은 아파트와는 달리, 사람과 사람이 길로 연결된 정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그 골목에서 함께 놀며 자랐고 부모들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이웃인지 가족인지 알 수 없는 정이 있었다. '응답하라 1988'의 그 쌍문동 골목길은 지금의 차가운 디지털 세상의 풍경에 결핍된 어떤 것들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그 풍경을 보고 지금 도시에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골목길로 자꾸만 마음이 이끌리는사람들은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게다.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

응답하라 1988

내게도 그런 골목길들이 있었다. 포장도 되지 않은 흙길들이 대부분이었던 70년대 나의 고향 경기도 안성의 골목길들에는 여지없이 아이들이 와하고 소리치며 달려가곤 했다.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금을 그어 놓고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십자 가이상’, ‘팔자 가이상’, ‘오징어 가이상’, ‘접시 가이상’ 같은 놀이들을 하곤 했다.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가 바로 그때 했던 ‘오징어 가이상’을 소재로 한 것이다. 놀이터도 별로 없던 시절, 우리의 골목길은 땅만 있으면 뭐든 놀 수 있던 놀이 공간이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 가방을 던져 놓고 그 골목길로 나가면 항상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면 골목길 집집마다 밥 냄새가 피어올랐고,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밥 먹어라!”

 

새마을 운동의 물결이 그 시골 마을에도 일렁이기 시작하면서 땅에 금 긋고 놀던 놀이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밀려났다. 비가 오면 푹푹 들어가던 흙길은 널찍한 신작로로 바뀌었고 그 위로는 시멘트가 덮여 트럭 같은 차들이 달리기 좋은 길로 바뀌었다. 우리들은 금 그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았고, 방과 후 집으로(사실은 골목길로) 가던 발길은 이제 학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가끔 소나기라도 내리면 시멘트로 포장된 신작로 위로 먼지들이 몽글몽글 떠오르곤 했는데 그때 풍기던 텁텁한 냄새는 지금도 갑자기 소나기를 맞아 처마 끝에 비를 피할 때면 속절없이 코끝을 스치는 기억이 됐다. 빼앗긴 자의 아련함이랄까. 마음껏 금을 그으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곤 했던 우리들의 골목길이 시멘트로 덮이고 그 위로 신난다는 듯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빨라진 세상의 변화 속에서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갔다...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에세이의 ‘길의 원리 행함의 원리’라는 글을 통해 ‘길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고 했다. 길이란 사람의 ‘행함’에 맞게 나는 것이고 그래서 논두렁길의 구부러짐은 농사꾼의 몸의 조건에 따라 ‘이리저리 휘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길들이 어느 날 차들이 달리는 도로로 바뀌었다. 구불구불 넘어야 했던 산길 대신, 터널을 뚫어 낸 길로 차들이 쌩쌩 달려가면서 그 고갯길들의 ‘존엄’은 사라지게 됐다. 나의 기억 속에 구불구불 미로처럼 펼쳐져 있고 비가 오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들을 오목하게 파이게 했던 그 골목길 대신, 일직선으로 뻗어있어 편리하긴 하지만 각진 길들 과 빗물이 스미지 못해 하수도를 향해 흘러내려가는 시멘트길로의 변화는 그래서 사람의 길에서 자동차의 길로 바뀌며 생겨난 삶과 생각의 변화처럼 다가온다.

 

골목길의 땅은 빈 공간이었다. 거기에는 아무 표식도 기능도 강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빈 도화지나 마찬가지였다. 그 위에 우리들은 매일 오징어도 그리고 접시도 그리고 팔자도 그려가며 놀았다. 동그랗게 원을 그려놓고는 돌을 세 번 튕겨 만들어지는 공간만큼을 내 땅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물론 우리들의 놀이가 끝나고 나면 슥슥 다른 친구들의 발길에 지워진 후 그들의 도화지가 되었다.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의 공간. 하지만 그 공간 위로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덮이고 금이 그어졌다. 차도와 인도가 나뉘고 횡단보도가 생겼다. ‘사람은 왼쪽 자동차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규칙도 생겼다.

 

그 규칙을 가진 길은 ‘생산성’이라는 척도로 채워졌다. 느긋이 걷곤 하던 길을 이제 사람들은 경쟁하듯 달리기 시작했다. 차들이 쌩쌩 달렸고, 때론 사람과 사람이, 때론 차와 차가, 때론 사람과 차가 부딪쳐 사고를 냈다. 경쟁사회의 시작이었다. 땅에 금을 몇 개 긋고 하던 놀이의 ‘오징어 게임’은 이제 선을 넘으면 진짜 죽는 살벌한 경쟁의 ‘오징어 게임’이 됐다. 저녁이 되면 풍겨오던 밥 냄새와 “밥 먹어라” 외치던 엄마들의 목소리가 있던 자리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오징어 게임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서울로 전학을 온 나는 한동안 차만 타면 멀미를 했다. 차의 속도로 쌩쌩 달려가던 그 변화 앞에 몸이 미처 적응하지 못했던 거였다. 하지만 내가 서울의 속도에 적응하며 더 이상 차멀미를 하지 않게 되던80년대를 거치며 도시는 급속도로 변했다. 땅은 포장되었고, 오래되고 낡은 집들은 밀어내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와 빌딩들이 세워졌다. 외국인들의 시선에 특히 민감한 한국인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런 변화를 가속화했다. 개발 위에 다시 개발을 얻는 재개발이 서울 전역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30여 년 간 자잘한 도시의 골목길들이 사라져 갔다.

 

그런데 이건 웬일일까.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 경리단길, 마포구 연남동길, 망원동 망리단길... 최근 몇 년 간 도심을 중심으로 골목길들이 곳곳에서 생겨나 증식하고 있다. 거기에는 저 '응답하라 1988'이 상기시켰던 잃어버린 골목길에 대한 향수와 추억 그리고 나아가 어떤 보상심리 같은 것들이 어른거린다. 물론 개발과 재개발 속에서도 골목길들은 늘 존재했다. 70년대의 종로와 명동, 무교동거리가 상업화의 물결을 탄 도시의 활기였다면, 80년대 야타족과 오렌지족으로 대변되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는 과시경제의 상징이었고, IMF의 그늘 속에서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커져온 홍대거리는 젊은이들의 문화적 갈등과 고민의 흔적이었다. 그렇다면 최근 생겨난 가로수길부터 망리단길에 이르는 골목길들의 전성시대는 도대체 뭘까. 압축성장과 개발의 뒤안길에서 사라져 버린 길들에 대한 회한이자 그리움 같은 게 아닐까.

응답하라 1988

압축성장과 개발시대의 길이란 속도를 의미하는 차들이 장악한 공간이었다. 본래 마을이란 삶의 공간과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생겨난 상점들로 구성되어야 하지만, 그저 빨리 지나치게 만드는 차들의 길이 생겨나면서 공간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 될 수 없었다. 최근 들어서는 골목길들이 차들을 밀어내고 대신 ‘걷는 사람들’을 애써 채워 넣고 있는 건 그래서 반가우면서도 안쓰럽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자 신사동 가로수길은 그 골목골목까지 도시에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고, 부암동길은 도시적인 풍경 속에 자연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이 됐으며, 삼청동길은 역사가 보이는 길, 이태원 경리단길은 이국적인 풍경을 걷는 길이 되었다. 하지만 거기 그냥 있는 것이 당연한 길이 아니라 굳이 무슨무슨 길이라고 지칭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에게 골목길 같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 낯선 공간이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서울 구석구석에 골목길이 생겨나는 건 도시에 인간적인 온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나를 설레게 한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 생겨나는 골목길을 보다 보면 그곳 역시 자본화의 고속도로가 깔림으로 해서 밀려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할 수 없다. 카페와 음식점들로 가득 채워지기 전, 고즈넉한 한옥의 처마를 내주던 익선동 골목길이 그립다. 그곳 거북슈퍼에서 잠시 다리를 쉬게 하고 병맥주 한 잔을 홀짝이던 그 한적한 온기가 자본의 열기로 채워져 있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도 나는 약속시간 30분 전에 도착해 골목길을 찾는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걷다 보면 없던 길도 만들어질 거라고 믿으며.

2024.11.4

‘더 커뮤니티’, 첨예한 이념의 차이를 이들은 넘어설 수 있을까

더 커뮤니티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던 그들은 커뮤니티 센터 안내방송이 나오자 일순 얼어붙었다. 이 커뮤니티에 들어온 그들에게 사전에 그런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놀랍게도 12명 중 두 사람이 ‘그렇다’고 답했다는 것.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침묵으로 바뀌었다. 성향을 숨긴 채 화기애애한 대화를 하던 사람들 중에 그런 답변을 한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생겨난 변화다. 

 

이 장면은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 <사상검증구역 :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앞으로 무얼 보여주려 하는가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 서바이벌 예능은 ‘정치’를 소재로 했다. 저마다 다른 성향과 생각을 가진 12명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고, 합숙을 하며 주어진 미션들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며 더 많은 돈을 분배받는 게 목표다. 매일 리더를 뽑고 당연히 리더는 그만한 메리트와 더불어 더 많은 돈을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권력을 쥐기 위한 치열한 정치 대결이 펼쳐지게 되는 이유다. 

 

프로그램은 이들을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이라는 네 개의 키워드로 각각 좌파와 우파, 페미니즘과 이퀄리즘, 서민과 부유 그리고 개방과 전통으로 어느 쪽에 어느 만큼의 성향을 갖고 있는가로 나눠 놓았다. 하지만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중도적 입장의 가면을 쓰지만, 밤에 각자 방에서 채팅창으로 펼쳐지는 익명의 토론에서는 저마다의 다른 성향들을 드러낸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같은 젠더 주제에 대한 다소 과격한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이가 2명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들이 놀라고 침묵하게 되는 이유다. 겉보기와는 다른 생각의 차이가 드러나는 어떤 순간에 야기되는 갈등들이 예고되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건 이 프로그램이 마치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하나의 작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 첫 날의 리더를 뽑고 돈을 나누며 그 날 저녁 식사 비용으로 각자 받은 돈에서 몇 프로씩 나누어 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은 그래서 마치 하나의 정부가 만들어지고 세금을 몇 프로로 거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또 이튿날 미션으로 야외 노동을 하러 가기 위해 인원을 선발하는 과정 역시 노동을 분배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더 커뮤니티>는 이처럼 서로 다른 성향과 이념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사회를 만들어 살아갈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사회 실험’ 같은 흥미로움을 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프로그램은 ‘서바이벌’과 ‘리얼리티쇼’라는 예능적 성격도 놓지 않고 있다. 누군가의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의 성향을 정확히 맞추면 그 사람을 탈락시키고 돈을 벌 수 있는 룰이 주어졌고, 협동을 방해하기 위한 ‘불순분자’로 불리는 스파이도 심어 놓았다. 또 앞서 젠더 문제 같은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자신들의 성향을 드러내는 토론 시간(익명으로 펼쳐지지만 시청자들은 알 수 있다)이나, 그들이 그 안에서 연합을 하거나 배신을 하는 모습이 가감없이 잡히는 리얼리티쇼의 자극점들도 빠지지 않는다. 

 

그간 서바이벌이나 리얼리티쇼라고 하면 소재적으로 음악오디션이나 연애 리얼리티, 게임, 피지컬 같은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더 커뮤니티>는 서바이벌 장르에 ‘정치’ 같은 지금껏 시도되지 않았던 영역을 넓혀 놓았다는 데 의미와 가치가 있다. 특히 이념이나 사상처럼 한국사회에서 너무나 예민해 친구들끼리도 만나 속으로만 생각할 뿐 밖으로 내놓지 않았던 그 성향을 가감없이 꺼내놓고 부딪쳐 본다는 점은 의미있는 시도라 여겨진다. 

 

다만 우려스럽게 여겨지는 점은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으로 나눠 놓은 성향에 있어서 다른 것들은 어느 정도 가려질 수 있지만, 눈에 먼저 띠게 되는 남녀라는 성별이 혹여나 성대결 구도로 첨예화되지는 않을까 싶은 점이다. 물론 성별에 따른 성향이 모두 같다고 볼 순 없지만 이를 하나의 구별점으로 삼아 연합을 하거나 대결갈등을 만들려는 흐름들이 보이기도 해서다. 또 아무래도 이슈를 끌기 위해 가장 먼저 젠더 관련 질문들로 그 성향을 끄집어내 자극적인 화제성을 만들려는 것도 다소 우려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궁금해지는 건, <더 커뮤니티>가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가져온 이 서바이벌 실험이 과연 어떤 결론으로 끝을 맺을까 하는 점이다. 프로그램은 최종 미션으로 출연자들이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는 ‘신뢰게임’을 한다고 정해놨다. 그것이 말해주는 건 이 과정을 통해 성향이 다른 이들이 서로 다르긴 해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면서, 실제 이념과 생각으로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어떤 가능성이나 희망이 존재하는가를 들여다보는 일이 아닐까. 과연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몹시 궁금해지는 이유다. (사진:웨이브)

‘오징어 게임’, 456명과 456억 사이

오징어 게임

(본문 중 드라마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시청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어린 시절 공터에서는 흙바닥에 오징어 모양을 그려놓고 아이들이 오징어 게임(당시에는 오징어 가이상이라 불렸다)을 하곤 했다. 맨몸으로 공수를 나눠 부딪치는 게임은 꽤 과격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선사했다. 밥 냄새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저녁 시간이 되어 엄마들이 아이 이름을 불러서야 겨우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으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이 어린 시절의 게임들을 모티브로 가져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변주해낸다. 빚에 쪼들리면서도 경마 같은 도박을 통해 일확천금만을 꿈꾸는 기훈(이정재)은 이혼 당한 후 힘겹게 생업으로 버텨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며 딸 생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처지다. 그런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불쑥 게임을 제안한다. 딱지치기를 해서 이기면 10만원을 주고 지면 뺨 한 대를 10만원 값으로 때리겠다는 것.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두드려맞던 기훈은 결국 딱지를 뒤집고 돈을 번다. 그리고 오징어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받는다. 

 

<오징어 게임>의 이 시퀀스는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세계관을 압축해 보여준다. 돈과 뺨 맞기의 등치는 앞으로 기훈이 그 낯선 곳으로 끌려가 하게 되는 오징어 게임의 핵심적인 룰이다. 456번을 달게 된 기훈은 자신이 그 게임에 참여한 마지막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 곳에 모인 456명과 돈을 놓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게 된다. 각 한 사람의 목숨은 1억 원으로 매겨진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이들이 지내는 합숙장소의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투명 공 안으로 그만큼의 돈다발이 쏟아져 쌓여간다. 456명의 목숨 값은 그래서 456억이고 끝까지 살아남는 최종 1인은 그 456억을 가져가게 된다.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점에서 살벌하지만, 이들이 하는 게임은 너무나 상반된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심 게임들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부터 ‘구슬치기’, ‘오징어게임’ 같은 게임들이다. 요즘이야 각종 돈 들어가는(심지어 현질을 해야 하는) 인터넷, 모바일 게임들이 넘쳐나지만 당시만 해도 맨몸으로 쪽수만 맞으면 동네 어디서든 할 수 있었던 게임들. 그것도 너무 재밌어서 밤에 잠 잘 때조차 다음 날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던 바로 그 게임들이다. 설마 사람까지 죽이겠어 하는 의구심은 첫 게임에서 무차별 살상을 겪고 난 후부터 살벌한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동심 게임이 피가 튀고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변화해가는 것. 

 

<오징어 게임>은 방영 전부터 표절 논란이 나왔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서바이벌 게임’류 콘텐츠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일본 영화 <배틀로얄>이 그렇고, <신이 말하는 대로>,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된 일본 드라마 <아리스 인 보더랜드>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마치 게임 속에 들어간 것처럼 제시되는 미션들을 해결해야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류 콘텐츠들은 이제 계보를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이에 대해 황동혁 감독은 <오징어 게임>이 “2008년부터 구상한 작품”이라며 “유사포맷이라 언급되는 작품은 그보다 훨씬 이후에 공개됐다”고 했다. 우선권을 따지자면 이 작품이 원조라는 주장이다.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오징어 게임>의 오리지널리티는 여기 등장하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게임들과 이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의 캐릭터와 스토리가 부여하는 한국적 정서가 아닐까 싶다. <오징어 게임>은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가상의 게임 상황을 가져오지만, 이 가상을 통해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오히려 현실이다. 

 

구조조정을 당한 후 가게를 열었지만 실패한 기훈(이정재), 서울대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지만 횡령과 사문서 위조로 쫓기는 신세가 된 상우(박해수), 탈북자로서 동생을 보육원에 맡긴 채 어머니를 데려오려 브로커를 썼지만 도망쳐버려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새벽(정호연), 머리에 뇌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일남(오영수), 조직의 돈에 손을 댄 일로 쫓기는 조폭 덕수(허성태), 임금체불로 실랑이를 벌이다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간 사장의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갖고 도망친 외국인 근로자 알리(트리파티 아누팜) 등등.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이들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이 살벌한 게임 속으로 가져온다. 이들 모두의 현실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건 돈이지만 그 양상은 구조조정이나 학력사회, 탈북자 문제, 조폭, 외국인 근로자의 현실 등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건 오징어 게임의 룰이 공정, 평등 같은 가치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 결과에 따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만, 적어도 이 게임은 현실에서의 스펙 따위 필요 없이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어느 누구도 위계를 갖지 않는 평등함이 엄격한 룰로 제시된다. 물론 그건 허위다. 공정과 평등을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인간의 장기를 밀매하는 끔찍한 비리들이 자행된다. 결국 이 세계도 겉으로 내세우는 공정과 평등 같은 가치의 룰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죽고 죽이는 잔혹한 서바이벌의 룰을 따라간다. 그 가치 기준은 돈으로 귀결된다. 

 

가상의 게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배신하는 이들의 면면은 그래서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게임에서 지면 즉결처분되는 상황은 그래서 우리네 현실 또한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그 곳은 지옥이지만, 그 곳 바깥도 똑같이 지옥이다. 그걸 만드는 건 이 시스템을 굴리는 자들이고, 그 동력은 돈이다. 자본화된 사회가 만들어내는 머니 게임, 즉 돈과 사람의 가치가 등치되는 그 게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 

 

이야기는 빙 돌아서 다시, 아무 것도 없어도 맨 땅에 오징어 그림 하나 그려놓고 그토록 재밌게 놀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오징어 게임과, 이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오징어 게임을 병치해놓는다. 누군가에겐 재미이지만, 욕망과 좌절이 덧대진 누군가에는 목숨을 걸고 하는 서바이벌이 되는 세상. 456명이 456억으로 등치되는 세상. <오징어 게임>은 그렇게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돌려놓는다. 매일 같이 생존을 위해 사회로 나가는 당신은 과연 어떤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느냐고. 그 어린 시절 순수한 재미와 몰입감을 줬던 삶의 게임인지, 아니면 그 순수함이 사라진 후 벼랑 끝에서 벌이는 욕망의 게임이지, 이 드라마는 묻고 있다.(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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