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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정 작가가 ‘붉은 달 푸른 해’의 미로에 시청자들을 가둔 까닭

역대급 문제작이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MBC 수목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는 사실 쉽게 다가오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도현정 작가가 아동학대라는 이 특수한 범죄를 그리 쉬운 방식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게다. 가장 흔한 스릴러의 문법으로 아동학대를 당하는 피해자가 등장하고, 그 가해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 이어지는 그 고전적인 방식을 도현정 작가는 쉽게 취하지 않았다. 

대신 작가가 선택한 건 미로였다. 의문의 사건들이 터지고, 각각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패턴이 담긴다. 그것은 살해된 자가 있는 곳에 시가 있고 아이가 있다는 공통점이다. 보통 스릴러는 병렬적인 사건을 다루는 형사에 집중하거나, 범인과 형사 간의 끝없이 쫓고 쫓기는 과정을 담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하지만 <붉은 달 푸른 해>는 각각의 사건들이 관련 없는 듯 터지고, 작가도 쉽게 그 전말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볼수록 미로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여기에 어린 시절의 충격적 경험으로 그 때의 기억을 지워버린 채 살아가는 차우경(김선아)과 이 사건을 추적하는 강지헌(이이경) 형사의 시점이 더해지면서 이 미로는 더 복잡해진다. 차우경은 녹색 옷을 입은 소녀를 계속해서 환영으로 보게 되고, 그 소녀가 이끄는 곳에서 연쇄적으로 터지는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흔한 고구마와 사이다를 반복하는 시청자들로서는 이 드라마에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복잡한 미로 방식의 전개다. 

하지만 이 미로는 기묘하게도 시청자들을 잡아 끌어당긴다. 그것은 일련의 사건들이 아동학대와 관련이 있다는 게 조금씩 드러나고, 그 뒤에 붉은 울음이라는 조종자에 의해 아동학대 가해자들이 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여기서도 복잡한 감정에 휘말린다. 그것은 범인이라고 하면 응당 잡혀야할 악역이어야 하지만, 이 드라마 속에서 악역은 범인이 아니라 범인에게 살해당하는 어른들이다. 그들은 끔찍한 아동학대를 해왔고, 결국 붉은 울음에 의해 응징되는 것. 

한울센터에서 일하던 이은호(차학연)가 범인이라는 게 밝혀지고 차우경에게 총을 겨눠 결국 강지헌의 총에 맞아 죽게 되면서 그 감정은 복잡해진다. 범인을 잡아 통쾌하기는커녕 차우경과 강지헌이 그러하듯이 그에 대한 연민과 슬픔의 감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태주(주석태)가 이은호의 형이었고 그가 당한 지옥 같은 학대를 듣고는 붉은 울음이 되어 저 비정한 어른들을 응징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도 마찬가지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형사 강지헌이 윤태주가 “당신이라면 용서할 수 있었겠냐”는 질문에 “용서 못했을 것”이라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시청자들 또한 공감하는 대목이다. 

어느새 시청자들은 이 미로를 헤매며 여러 사건들을 겪고, 그 과정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벅찬 책임감’이라는 걸 실감한 강지헌의 변화를 그대로 느끼게 된다. “용서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응징하지는 않는다”는 강지헌의 이야기는 또한, 차우경이 기억을 되찾고 새엄마인 허진옥(나영희)이 죽게 한 친동생이 바로 녹색 옷을 입은 소녀라는 걸 알고도 응징하지 않는 이야기와 연결된다. 차우경이 격분하여 허진옥을 향해 망치를 들었을 때, 그의 손을 잡고 그를 끌어안아 이를 막은 건 바로 그 ‘녹색 옷을 입은 소녀’의 환영이었다. 

사이다도 없고 그렇다고 고구마도 아니다. 다만 미로 속에서 헤매다 그 미로의 구조를 다 알게 된 마지막에 이르러 그걸 설계한 도현정 작가의 진심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이 작가가 얼마나 아동학대 문제가 야기하는 가해자는 물론이고 피해자들의 지옥을 깊이 들여다보려 했고, 한 마디로 표현해낼 수 없는 그 복잡한 감정을 미로를 통해 시청자들도 똑같이 느껴보게 하려 애썼는가가 느껴지는 데서 오는 뭉클함이다. 작가는 미로에 시청자들을 가뒀고, 시청자들은 기꺼이 그 미로에 빠져들었다. 도현정 작가에 입덕했다는 시청자들의 목소리가 허튼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느껴지게 하는 드라마였다.(사진:MBC)

Posted by 더키앙

‘붉은 달 푸른 해’, 아동학대자들에 대한 응징 그 양가감정

누가 봐도 아동학대를 해온 부모라는 게 뻔해 보이지만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아이가 그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그 광경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건 인지상정이 아닐까. MBC 수목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서 아동학대를 당해온 하나를 친딸이라며 개장수 고성환(백현진)이 굳이 데려가는 그 모습을 보는 차우경(김선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사 강지헌(이이경)은 위험할 때 누르면 자신이 찾아가겠다며 아이의 손목에 스마트워치를 채워주며, 고성환에게 자신들이 항상 주목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장면은 <붉은 달 푸른 해>라는 문제작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동학대는 그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는 가해사실을 부인하기도 하고, 그걸 은폐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은 다시 그 부모에게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과연 이런 부모들을 부모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를 차에 태우고 가는 길에 고성환은 “그걸 말했냐”고 물었고, 아이는 얘기하지 않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면 어떻게 될 거라고 했냐고 되묻는 고성환에게 아이는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린다”는 끔찍한 말을 했다. 아이가 당한 학대와 그걸 숨기려던 이유가 이 대화 속에는 들어 있었다. 

하나가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놀이터에서 놀다 아이들이 발견한 죽은 새를 하나가 묻어주는 장면은 그 학대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예감하게 해준다. 하나는 죽은 무언가를 묻어주었거나 묻는 장면을 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죽은 새를 그렇게 묻어줬던 게 아닐까. 

결국 개장수 아빠와 집으로 가게 된 하나는 그 날 밤 끔찍한 소리를 듣고는 차우경에게 전화를 건다. 차우경은 아이가 또 학대를 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 밤에 차를 몰아 하나의 집까지 달려오지만, 아이가 들은 소리는 개장수 아빠가 끔찍한 응징을 당하는 소리였다. 그걸 보게 된 차우경 또한 그 응징자에 의해 납치됐다. 강지헌은 과연 차우경과 하나를 구해낼 수 있을까. 

아동학대를 하는 부모와 그 부모를 응징하는 누군가를 보는 감정은 그래서 복합적이다. 그런 부모도 부모냐며 공분을 일으키지만 그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는 장면에서는 시원하다기보다는 끔찍함을 느끼게 된다. 이건 어쩌면 우리가 뉴스 등을 통해 아동학대 사건을 들여다볼 때 느끼게 되는 양가감정이다. 심지어 죽이고픈 살의까지 느껴지는 분노가 피어오르지만, 그런 살의가 갖는 불편함 또한 느껴지기 마련이다. 

‘부모 같지 않은 부모’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보면 <붉은 달 푸른 해>라는 제목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붉어서 해인 줄 알았는데 달이었다는 것이고, 푸르러서 달인 줄 알았는데 해였다는 의미. 부모인 줄 알았는데 끔찍한 아동학대범이었고, 반대로 잔혹한 연쇄살인범인 줄 알았는데 끔찍한 아동학대범들을 처단하고 아이를 구해내려는 이였다는 것. 차우경은 과연 어느 쪽일까. 또 미스터리한 인물인 이은호(차학연)는?(사진:MBC)

Posted by 더키앙

‘붉은 달 푸른 해’가 되돌아보게 만든 교육문제와 아동학대

“난 달라. 당연히 다르지. 난 우리 빛나가 잘되라고 한 거잖아. 조금만 참으면 미래가 달라지는 데. 애가 자꾸 다른 짓을 하니까.” MBC 수목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서 민하정은 자신이 딸 이빛나(유은미)를 학대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는 자신이 한 행동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이가 더 잘되라고 한 행동이라는 것. 

모든 것들에 이유를 달고 있었지만 그 행동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명백한 아동학대였다.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이유를 내세워 아이를 감금하고, CCTV까지 달아서 아이의 행동을 감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아이에게는 ‘사랑의 매’라며 체벌을 가했다. 그 사실을 차우경(김선아)에게 고백한 빛나는 온 몸에 난 상처들을 드디어 보여줬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차우경의 질문에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니깐. 엄마가 하는 일은 다 옳고, 다 날 사랑해서 하는 거니까요. 회초리로 맞는 것도 상처가 나는 것도 대학만 가면 다 끝나는 일이니깐. 근데 그 전에 내가 죽을 것 같아요.” 아이는 그 모든 학대조차 엄마이기 때문에 감내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아동학대가 가진 특별한 지점을 드러낸다. 

아동학대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지만, 그 관계가 부모 자식 간이라면 안타깝게도 피해자 스스로 이를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실제 학대가 벌어져도 사건화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특히 ‘교육과 미래를 위해서’ 같은 명분이 붙을 때는 그것이 학대인지조차 가해자도 피해자도 인지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민하정이 자신의 행동을 아동학대라 여기지 못했다는 건, 그가 “짐승”이라고 했던 해찬이 아빠가 한 짓과 자신이 한 짓이 다르지 않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동학대를 하는 누군가에 분노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짐승이라 부르던 아동학대자였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결국 뒤늦게 자신이 해왔던 짓이 아이를 학대해온 거라는 걸 깨달은 민하정이 그래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논리적이다. 그는 아동학대자에게 분노한 바 있고, 그게 바로 자신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고는 이제 자기 자신이 그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처단하는 선택을 하게 된 것.

<붉은 달 푸른 해>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뚜렷한 일관된 메시지를 제시해왔다. 그건 바로 아동학대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민하정과 이빛나의 이야기에는 <붉은 달 푸른 해>가 바라보는 아동학대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다. 아동학대라고 하면 그저 특별한 범죄자들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평범해 보이는 집안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 특히 치열한 경쟁체제에 내몰리고 있는 잘못된 교육 시스템 속에서 어쩌면 아이들은 저마다 학대당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다 너 잘되라고 한 일이라거나 사랑해서 그랬다거나 하는 그럴 듯한 합리화를 들이대지만 잘 들여다보면 우리네 교육이 ‘미래를 위해서’라며 감내하라 말하는 그 보이지 않는 체벌이 지금도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돌이켜봐야 하지 않을까. 아이는 호랑이를 그래도 가면을 쓴 엄마라고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실상 이런 비뚤어진 경쟁시스템 속에서 어른들은 엄마 가면을 쓴 호랑이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사진:MBC)

Posted by 더키앙

문제작 '붉은 달 푸른 해'의 미로에서 느끼는 끔찍한 현실

보면 볼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미궁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안을 더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이고, 또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MBC 수목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는 오랜만에 보는 문제작이다. 이를 문제작이라고 말하는 건, 기존의 드라마 문법을 따라가기보다는 오히려 색다른 길을 찾아감으로써 시청자들을 혼돈에 빠뜨리고, 그 미궁의 늪에서 허우적대게 만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미궁 속으로 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드라마의 독특한 힘 때문이다.

드라마는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여러 개의 살인사건들을 시작부터 툭툭 던져놓는다. 아동학대 치사 혐의로 형을 살고 나온 박지혜(하주희)가 폐놀이공원에 세워진 자동차 안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고, 그를 죽인 범인은 그의 범죄를 혐오하던 의사로 역시 자해 끝에 자살하고 만다. 두 번째 사건은 평소 아내와 아이를 학대해오던 김동숙(김여진)의 남편이 차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남편을 죽인 걸로 의심받던 김동숙은 ‘붉은 울음’이라는 인물이 남편 살해 방법을 알려줬다고 증언한다. 세 번째 사건은 주인공인 차우경(김선아)이 일하는 한울 아동센터 창고에서 미라가 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그 미라가 된 여자에게는 호적 신고가 되지 않은 딸이 있다는 게 밝혀진다.

사건들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드라마는 이 사건들이 동일한 키워드들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그 연결고리를 만든다. 그건 죽음과 아이 그리고 시다. 첫 번째 사건의 희생자인 박지혜의 집에서는 서정주의 시 ‘문둥이’의 한 구절인 ‘보리밭에 달 뜨면’이라는 글귀가 발견되었고, 자동차 변사사건에서 죽은 남자가 갖고 있었던 300만원이 말려진 신문에는 ‘짐승스런 울음은 울음같이 달더라’라는 싯구가 발견되며, 또 미라가 된 여인의 뒷벽에는 천상병 시인의 시 ‘썩어서 허물어진 살, 그 죄의 무게’라는 문구가 발견된다.

그래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강지헌(이이경)은 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차우경의 믿지 못할 이야기를 점점 믿기 시작한다. 중요한 건 이 관련 없어 보이는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어찌 보면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차우경이라는 점이다. 차우경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다. 아마도 어린 시절 비슷한 학대를 경험했을 것이라 여겨지는 이 인물은 어느 날 한 낮에 몰고 가던 차에 치어 아이가 죽는 사고를 겪은 후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과거의 트라우마가 눈앞에 환시처럼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실 죽은 건 사내아이였지만 그 아이가 초록원피스를 입은 소녀라고 생각하는 차우경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이 소녀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소녀가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살인사건들의 실마리 속으로 그를 인도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학대받는 아이들을 구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이 제각각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어째서 연결되어 있고, 그 배후에 있는 ‘붉은 울음’이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면서 동시에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차우경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초록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누구일까. 그리고 차우경이 이 소녀의 환시를 계속 볼 정도로 겪게 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드라마는 그래서 이 살인사건들의 연결고리가 되는 배후를 추적하면서 동시에 차우경의 읽어버린 기억 속 초록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누구인가를 추적한다. 답을 알려주진 않지만 그 역학구조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즉 차우경은 어린 시절 겪은 어떤 일 때문에 학대받는 아이들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고, 바로 그런 집착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을 추적하는 스릴러에서 주인공이 움직이게 되는 동력으로 자신의 트라우마가 작용한다는 건 흥미로운 발상이다.

사건은 아직 제대로 드러난 게 없기 때문에 분명한 전말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차우경이 갖고 있고 그래서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한 집착이 조금씩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똑같이 생겨나게 된다는 점이다. 시청자들도 미치도록 궁금하고 거기 어디선가 학대를 겪고 있을 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차우경처럼 구해내고 싶어진다. 심지어는 그 냉혹한 어른들을 단죄하고 싶어진다. 이건 아마도 작가는 사건의 전말을 쉽게 알려주지 않고 그 끔찍하지만 앞뒤를 구분하기 힘든 미로 속에 시청자들을 헤매게 만든 이유일 게다. 적어도 우리는 그 미로를 헤매는 동안 어딘가 있을 지도 모르는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떠올리고 경각심을 갖게 될 테니 말이다.

너무 많은 아동학대에 대한 이야기들이 신문 사회면에 등장하다보니 이제는 점점 둔감해져버린 현실이 되었다. 어린이집에서 벌어지는 믿기 힘든 사건들이나 부모 같지 않은 이들이 저지르는 학대 사건도 그 때는 끔찍했다가 차츰 잊히기 일쑤다. 그러니 이 비정한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의 미로 속에 잠시간 빠뜨리는 것으로 이 드라마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해님달님’으로 알려진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말하는 호랑이가 등장하는 잔혹동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이 드라마는 그래서 진짜 어른이 잡혀 먹히고 아이들마저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비정한 세상을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통해 보여준다. 한참을 보다보면 차우경이 그러한 것처럼 나라도 나서서 동아줄을 내려주고픈 분노와 죄책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사건들을.(사진:MBC)

Posted by 더키앙

'미쓰백', 거칠지만 따뜻한 한지민이라 더 매력적

아동학대의 현장을 본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끔찍한 실상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절감하게 된다는 건 가치 있는 일일 게다. 그런 점에서 영화 <미쓰백>은 우리가 언젠가 뉴스에서 짤막하지만 충격적이었던 아동학대 사건을 더 깊숙이 들여다본다.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는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방치된 아이 지은이(김시아). 그 아빠의 애인은 아이를 짐으로 보며 학대한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허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지만, 그건 다만 우리가 믿고 싶지 않을 뿐이지 없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만 보였다면 그건 뉴스나 르포이지 영화는 아닐 것이다. <미쓰백>이 영화로서 힘을 갖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제목에 담겨진 이 영화의 주인공 미쓰백 백상아(한지민)의 시선이 담겨져서다. 그 자신도 학대당한 기억이 있는 이 주인공은 어느 날 한겨울 보기에도 추워 보이는 원피스 하나를 입고 달달 떨고 있는 아이를 보게 된다. 한눈에 봐도 학대받는 아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손길을 내주지 않는 아이. 미쓰백이 그 아이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게 되는 건 그 아이에게서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미쓰백이 자신의 삶이 더 고달파 외면하려던 아이를 점점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손을 내밀게 되며 나아가 아이를 구해내는 그 과정을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미쓰백 스스로 자신을 학대받던 아이로 방치하며 살아왔던 삶에 손을 내미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미쓰백은 아이를 구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도 구해내려 안간힘을 쓴다. 영화가 끔찍함을 넘어서 가슴 먹먹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미쓰백이 상처로 가득한 아이를 꼭 껴안는 그 장면은, “나 같은 것”으로 치부하며 스스로를 비천하게 취급해온 자신을 껴안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그래서 미쓰백이라는 캐릭터와 그 인물을 연기하는 한지민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우리가 지금껏 봐왔던 한지민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미쓰백>의 백상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영화는 시작부터 빠르게 백상아의 거친 일상을 잡아낸다. 한지민은 재게 손을 놀리며 다소 거칠게 갖가지 일을 하는 동작들만으로 이 인물이 가진 예사롭지 않은 삶의 편린들을 느끼게 해준다.

욕을 해대고, 늘상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니고, 얼굴이고 몸이고 항상 상처 하나씩은 달고 다니는 이 백상아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의 학대받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서 어찌 보면 자신의 삶을 학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처 가득한 지은이의 등장은 들춰내고 싶지 않던 과거의 자신을 다시금 꺼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거친 삶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따뜻함을 희구하는 마음을 가리기 위함이었다는 걸 아이 앞에 한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이 과정은 그래서 한지민이라는 배우에게도 그간의 고정되어 가던 이미지가 만들어낸 틀을 벗게 해주는 시간들로 다가온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한지민에게 이런 거칠면서도 따뜻한 매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래서 영화 속 백상아가 지은이를 통해 자신을 구원해내듯이, 연기자 한지민은 백상아라는 캐릭터를 통해 연기자로서의 자신의 또 다른 면을 꺼내 보인다. 왜 그간 이런 매력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미쓰백>은 그렇게 한지민을 꼭 껴안으며 말하고 있는 작품 같다.(사진:영화'미쓰백')

Posted by 더키앙

‘마더’ 가정폭력이 만든 비극, 그 비극을 넘어서는 법

tvN 수목드라마 <마더>는 대물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똑같이 끔찍한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는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진(이보영)은 엄마가 되는 선택을 했고, 설악(손석구)은 괴물이 되는 선택을 했다. 그 대물림은 어째서 이렇게 다른 선택으로 이 두 인물을 이끌었던 걸까.

그 다른 선택은 이렇게 상처받은 아이들이 그 후에 누군가에 의해 사랑으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았는가 아닌가에 따라 나뉘어졌다. 수진은 영신(이혜영)을 만나 그로부터 지극한 보살핌을 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수진의 마음에 남은 상처가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세상이 그렇게 모질지만은 않다는 걸 영신을 통해 느꼈을 게다. 

하지만 설악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자살해버린 엄마가 남긴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처를 그에게 납치된 어린 윤복(허율)은 단숨에 들여다봤다. “삼촌 그 때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 내가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 엄마 죽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죠?” 윤복이 설악의 상처를 들여다 본 건 자신 또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설악의 그 깊은 상처와 자책감은 그를 괴물로 만들었다. 엄마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자책감은 그가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동기로 작용했다. 그는 아이들에게서 용서하지 못할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그 아이의 죽음 앞에 슬퍼하는 엄마들에게서 자신의 엄마를 보는 것이다. 물론 그의 범행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악독한 짓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괴물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

<마더>가 촘촘하게 잘 짜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는 건 바로 이 수진과 설악의 대결구도에서 나타난다. 애초에 작가는 이런 두 인물의 대결구도를 통해 가정폭력의 문제, 진정한 부모의 자격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상처를 겪었음에도 누군가는 엄마가 되고 누군가는 괴물이 된 그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폭력적인 세상 속에서 그래도 남은 희망은 무엇인가를 드러내려 했다는 것이다. 

수진은 어느새 윤복의 엄마가 되어있고, 윤복의 친모가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수진에게 돈을 요구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부모 자식으로 이어지는 혈연보다, 피는 달라도 진정한 사랑으로 엮어진 관계가 더 진정한 부모 자식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윤복에게 읽어줬던 동화책의 내용처럼 수진은 끝까지 어디든 아이를 찾아가 꼭 안아주려 한다. 그건 아마도 그를 거둬 사랑으로 키워준 영신을 통해 알게 된 부모의 사랑법일 게다.

그리고 윤복의 구원은 또한 수진 자신의 구원이 되기도 한다. 이미 친모로부터 버림받은 윤복의 상처를 수진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다. 그 아픔을 영신이 그래준 것처럼 보듬어 치유해주는 건 수진이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영신이라는 인물에게서 전해진 사랑은 그렇게 수진을 통해 윤복에게 대물림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세 사람이지만 이들은 그래서 그 어떤 부모 자식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된다. 

설악의 과거사까지 밝혀지면서 <마더>가 담으려는 이야기의 메시지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가정폭력이 만들어내는 비극이 어떤 결과로 대물림되는가 하는 것이고 그 비극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연 수진은 설악으로부터 윤복을 구해내고 이 비극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아이를 유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청자들이 수진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건 인지상정일 게다.(사진:tvN)

Posted by 더키앙

‘마더’가 어른들의 마음을 이토록 움켜쥘 수 있는 건

아이는 날도 밝지 않은 새벽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연다. 거기에는 새 할머니 영신(이혜영)네 집에 와서 갖게 된 예쁜 옷들이 가득하지만 아이는 그 집에 들어올 때 입었던 옷을 챙겨 입는다. 입으면 사내아이처럼 보이는 옷. 영신이 앞으로 더 많은 행운이 필요할 것 같다며 준 행운의 목걸이를 챙기고, 필요한 만큼의 돈을 꺼낸 후 수진(이보영)이 소중한 보물처럼 여러 열쇠를 연달아 열어야 겨우 찾아질 정도로 꼭꼭 숨겨줬던 깃털을 들여다본다. 아이는 수진과 바닷가에서 어딘가로 떠나가는 철새를 바라보며 그렇게 한없이 깃털을 흔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자신도 자유롭게 날고 싶었을까. 

tvN 수목드라마 <마더>에서 결국 혜나(허율)가 수진의 친딸이 아니고 학대받는 걸 참지 못하고 수진이 유괴한 아이라는 걸 알게 된 영신(이혜영)은 가장 아픈 선택을 한다. 수진이 혜나를 데리고 온 그 충격적인 선택에는 어쩌면 수진 스스로 겪었던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려졌던 그 기억이 자리했을 거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 입장이 너무나 이해되기 때문에 영신은 수진이 가족이 위험에 처해도 혜나를 떠나보내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그는 수진을 떠나보내려 한다. 파양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아이가 듣는다. 아이는 친모인 자영(고성희)을 통해 버림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 아픔이 너무나 크다는 걸. 자영이 아이를 찾아와 함께 돌아가자고 했을 때 아이가 엄마에게 자신은 더 이상 혜나가 아니라고 혜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하게 된 건 이미 버려졌던 자신이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어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수진이 엄마로부터 버려지는 걸 막기 위해 스스로 버려지기로 한다. 수진의 품에서 떠나기로 한다. 수진이 버려지는 아픔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혜나를 버린 자영은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어른이지만,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진이나 영신 수진의 친모인 홍희(남기애) 그리고 심지어 혜나까지 다른 이유로 누군가를 버린다. 홍희는 수진의 어린 시절 자신은 물론이고 아이 또한 겪게 될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탈출하려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아이와 함께 바다 속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차마 하지 못한 홍희는 대신 아이를 보육원에 맡겨두고 살인을 저지른다. 그렇게 홍희는 아이를 위해 아이를 버린다. 

그런 일이 이제 수진과 영신, 혜나에게도 반복된다. 수진과 영신은 혜나를 위해 서로를 버리려 하고, 그런 상황을 알게 된 혜나는 수진과 영신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난다. 도대체 이토록 아프고 가슴 시린 이별이 있을까. 떠나고 헤어지고 버려지지만 그 사이에 깃들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때론 섬뜩하게 때론 먹먹하게 다가와 가슴을 둔중하게 만든다. <마더>는 한 학대받던 아이의 유괴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한 아이라는 거울을 세워두고 저마다 어른들의 마음을 비춰낸다.

혜나는 어른들을 비추는 거울이다. 윤복을 학대해온 친모 자영은 아이에게서 섬뜩함을 느낀다. 그건 자신이 아이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그 죄책감이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자신 또한 엄마에게 버려진 기억을 갖고 있는 수진은 아이에게서 바로 자신을 본다. 아이를 그토록 지키려는 마음은 그래서 바로 자신을 지켜내려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젊었던 시절 수진을 입양했던 영신은 아이에게서 수진을 본다. 그 때 자신에게 다가와 마음의 평안을 주었던 아이. 수진이 그랬던 것처럼 혜나가 한없는 기쁨으로 다가온다. 

드라마의 이런 치밀한 구조 때문일까. 혜나를 바라보는 시청자들 역시 이 아이가 어른들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게 되는 건 그 아이가 비추는 거울이 너무나 우리의 마음을 움켜쥐기 때문이다. 제발 저런 비정한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저절로 생겨나는 건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게다. 상자 속 꼭꼭 숨겨지고 가둬져 있던 깃털이 날개가 되어 날 수 있기를.(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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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의 질문, 대체 누가 진정한 엄마인가

이토록 아픈 웃음이 있을까. 혜나(허율)는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저 멀리 날아가는 철새들을 보며 자신도 같이 가자고 외친다. 아이가 걱정되는 한 어부가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에 너처럼 작은 아이는 바람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며 방파제에 위태롭게 서 있는 혜나를 걱정할 때, 아이는 웃고 있었다. 마치 바람에 날아가면 이 아픈 현실 속에서 벗어나 저리 날아가는 철새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처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자유를 꿈꾸는 아이의 이 웃음은 얼마나 슬픈가.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는 혜나의 비정한 엄마 자영(고성희)은 동거남 설악(손석구)이 아이를 학대하는 걸 방관했다. 비닐봉지에 아이를 넣어 싸매놓고 영화를 보러가는 엄마는 스스로 모성애를 쓰레기통에 버린 셈이다. 대신 혜나의 그 상처들을 남달리 깊게 들여다본 수진(이보영)은 그 학대로부터 아이를 구해내려 한다. 물론 그건 법적인 틀에서 바라보면 유괴라는 범죄가 되는 것이지만.

수진이 이토록 혜나의 상처를 외면하지 못하게 된 건, 자신 또한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 정애원의 문짝에 자전거 자물쇠로 꼭꼭 묶여진 어린 수진을 발견한 글라라 선생님(예수정)은 자물쇠를 풀어줘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수진 옆에서 묵묵히 아이를 기다려주었다. 아마 그 자물쇠는 수진에게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와 이어진 유일한 탯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염없이 그 자리에서 수진은 엄마를 기다렸지만 결국 오지 않는 기다림이라는 걸 알고는 포기해버린다. 

이런 경험을 한 수진이었기 때문에 혜나의 아픔이 남다르게 다가왔을 터다. 정애원을 찾은 수진은 하지만 자신이 과연 혜나의 엄마가 될 수 있을까를 성모 마리아 앞에서 묻는다. 자신은 엄마를 경험하지 못했고 또 엄마가 되기도 싫었고 또 엄마였던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진의 엄마나 다름없던 글라라 선생님은 그가 엄마로서 다시 돌아온 것을 반기고 있었다. 

“저에겐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수진이 성모 마리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던지는 이 질문은 그래서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마라고 다 엄마가 아니며, 엄마가 아니라도 기꺼이 아이의 아픔을 보듬어낼 수 있는 이가 진정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건 글라라 선생님이 사실상 엄마로부터 버림받거나 엄마를 떠나보내 이 정애원으로 왔던 아이들의 진정한 엄마였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마더>에서 성모마리아 앞에서 수진이 기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가진 또 하나의 상징을 담아낸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가슴에 품듯, 수진이 혜나라는 아이를 가슴에 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혜나는 마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우리가 짓고 있는 죄를 현시하기 위해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 존재처럼 보인다. 폭풍우가 치는 바닷가에서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슬픈 웃음을 짓는 그 모습이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마더>가 가진 연출의 영상미는 이처럼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뉘앙스까지를 담아내며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아동학대와 유괴 같은 범죄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가 그런 범죄물의 틀을 훌쩍 넘어 인간 본연의 본성이나 죄에 대한 함의까지를 담아낼 수 있는 건 이러한 남다른 이야기전개와 그를 시적으로 담아내는 연출력 덕분이다. 

도대체 누가 진정한 엄마인가. 이 질문은 그래서 보다 확장될 수 있다. 무엇이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고, 본성이어야 하는가. 혜나의 슬픈 웃음을 보며 먹먹함을 느꼈다면, 또 수진의 눈물어린 간절한 기도에서 뭉클함을 느꼈다면, 그건 아마도 <마더>가 전하려는 진정한 메시지를 공감했다는 이야기일 게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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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불편하지만 들여다봐야 하는 아이들의 현실

새로 시작한 tvN 수목드라마 <마더>는 차라리 공포영화에 가깝다. 학대당하는 대상이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아이 혜나(허율)이기 때문이다. 혜나를 둘러싼 환경은 비정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학교에서 더럽다는 이유로 집단 괴롭힘을 당한 혜나는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온몸에 난 상처와 고막 파열, 영양실조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의 모친 자영(고성희)의 동거남 설악(손석구)은 혜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그가 가장 아끼는 햄스터를 잔인하게 죽였으며 심지어 그에게 성추행을 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모친은 혜나를 보호하기 보다는 설악의 폭력을 방치하고 있었다. 동거남과 영화를 보러 나가며 혜나를 검은 쓰레기봉투에 넣어 집 앞에 내놓기까지 했다. 

<마더>의 혜나가 겪는 이 일련의 폭력들을 들여다보는 건 끔찍한 일이다. 이제 겨우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던져지는 폭력들의 양태도 그렇지만, 부모가 그런 일들을 방치한다는 사실이 더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시청자들은 불편한 감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혜나가 당할 일들이 마치 공포영화의 엄습하는 두려움처럼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마더>가 첫 방송에 혜나의 이 끔찍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신문지상이나 뉴스의 한 꼭지로 가끔 보도되곤 하는 아동학대의 이야기를 우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실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들여다 본 적은 별로 없다.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 불편해 오히려 회피하고픈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이 이 마을에 잠시 교사로 들어와 혜나의 상황을 목격하게 된 수진(이보영)이다. 그는 혜나의 상황들이 모두 아동학대의 정황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회피하다가 결국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쓰레기봉투에 버려진 혜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수진 자신도 겪은 일인 것처럼 보인다. 또래 아이들에게 더럽다는 이유로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혜나에게 수진은 말한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돌보라”고.

그런 조언은 선생님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체로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선생님은 아이의 부모를 찾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래서 수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자신이 겪은 어떤 일들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엄마가 날 쓰레기봉투에 버렸어”라고 말하는 혜나에게 수진이 “이번에는 네가 엄마를 버리는 거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도 그의 개인적인 과거 경험이 덧씌워진 결과일 것이다. 

<마더>는 아동학대의 문제를 더 이상 회피하거나, 내 문제는 아니라고 치부하는 걸 용인하지 않는다. 그것이 버젓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고, 비정한 모정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이후에 이 드라마가 펼쳐나갈 극화된 사건들은 비정한 모정이 버린 상처받은 영혼들이 그 세계로부터 탈주하며 서로 새로운 관계를 이어가는 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마더>는 분명 보기에 불편한 드라마다. 하지만 그렇다고 회피할 수는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상처받은 두 사람(어찌 보면 비정한 모정이 만들어낸 피해자들)이 새로운 유사모녀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그들만의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시청자들은 바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쩌면 가정폭력으로 인해 길거리로 나오게 된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지도 모르니.(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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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도 학생도 막장인 <여왕의 교실>, 실제일까

 

이게 진짜 요즘 초등학생들의 현실일까. 아니면 일본드라마의 리메이크 과정에서 제대로 우리화하지 못한 드라마의 문제일까. <여왕의 교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로 나뉜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현실은 더 심하다는 쪽이 그 하나이고, 정반대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며 마여진(고현정) 선생 같은 인물이 과연 가능할 수 있느냐는 쪽이 다른 하나다.

 

'여왕의 교실(사진출처:MBC)'

이 드라마가 문제작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아이들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운 잔인한 행동들 때문이다. 친구를 지켜주려 한 심하나(김향기)는 매번 그 아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왕따를 당하고 있는 은보미(서신애)를 위해 마여진 선생이 제안한 축제 행사를 보이콧 하자고 주장하지만 은보미는 당일 거꾸로 마여진 선생에게 포섭되어 심하나를 배신하고 감시하는 조장이 된다.

 

또 지갑을 훔친 친구 고나리(이영유)와의 약속을 지켜주기 위해 그 비밀을 숨겨주다 본인이 도둑으로 몰린 심하나(김향기)지만, 고나리는 오히려 그런 심하나에게 이게 다 들킨 너의 잘못이라며 왕따를 시킨다. 심지어 고나리는 심하나가 지갑 주인인 수진(변승미)과 친해지게 되자 불안함을 느껴 둘을 이간질시키기도 한다. 로커에 가둬버리고 심하나가 도와 달라 애원하는 걸 장난스레 따라하는 아이들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이게 아이들이 맞나?

 

하지만 이것은 이기적이고 되바라진 아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마여진 선생 같은 괴물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이다. 가정형편이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동구(천보근)의 불행한 가족사를 아이들 앞에 공공연히 폭로하고 “너는 친구가 없다”고 단언한다. 친구를 끝까지 믿는 하나에게 그녀는 “우정을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몰라주는 진실? 멍청하기는. 사람들이 몰라주는 진실 따윈 아무 의미 없어. 친구니 우정이니 그럴 듯한 말들이긴 하지만 결국 네 선택은 틀렸어. 진짜 진실은 말야. 다른 아이들 눈에 보이는 네 모습이야. 선생님한테 반항하면서 잘난 척 했지만 뒤에서는 친구 지갑이나 훔치는 질 나쁜 애. 그러면서 끝까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 넌 이제 그런 아이야 알겠니?”

 

제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거의 아동 학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 한 것이 정신적인 폭력이니까. 진실 따위는 필요 없다는 사고방식도 문제지만, 상처받은 아이를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거기에 대고 거짓말쟁이에 이중인격자라 몰아 부치는 건 너무 심한 일이 아닌가. 이 마여진 선생의 대사는 그 부분만 떼어내서 들어보면 도저히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라고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무표정한 얼굴에 인간미라곤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또 어떻고.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렇게 막장인 아이들과 선생 사이에서 오로지 아이다운 아이는 심하나 하나뿐이라고 여긴다. 아니 여기고 싶어진다. 친구가 없다는 선생님의 단언에 “오동구는 제가 좋아하는 친구예요”라고 말하는 아이, 진실이나 우정 따윈 필요 없다는 말에 “우정은 소중한 거고 언젠간 진실이 꼭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 심하나만이 현실적인 아이처럼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왕의 교실>이라는 드라마는 심하나를 빼고는 현실성이 없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혹 원작이 만들어진 일본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다른 데서 생기는 편차가 아닐까. 그런 면이 있다. 마여진 선생 같은 인물은 실제 현실에서 그다지 보편적인 캐릭터라고 말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학교 당국이나 학부모들이 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제 아무리 성적 지상주의라고는 하나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그대로 볼 우리네 학부모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단 1%의 가능성도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치부하기도 어렵다. 우리의 입시제도라는 것에 일본식 교육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입시교육의 시작점이 초등학교로까지 침범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약육강식의 현실을 던져놓은 어른들이 그 아이들에게 아이들다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환상이 아니겠는가.

 

결국 <여왕의 교실>은 드라마지만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마여진 선생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싶지만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또 그 선생의 논리가 틀렸으면 싶지만 잘못된 현실 속에서는 그 논리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 현실이 아닌가. 그 속에서 비뚤어지고 파괴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게다.

 

<여왕의 교실>의 시청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보기 싫은 것들을 자꾸만 우리 눈앞에 펼쳐놓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길 원치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고 위로받기를 원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여왕의 교실>은 문제작이라 할만하다. 우정이 배신되고 오히려 왕따를 당하는 이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래서 드라마들 사이에서 왕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가진 심하나 같은.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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