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경’, 지춘성 배우가 온몸으로 그려낸 연극 같은 우리네 삶

삼매경

연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들이 무대 위로 등장한다. 한 가운데 가부좌를 튼 동자승이 바위처럼 앉아있고, 다른 배우들은 기이한 소리를 내거나 동작을 반복하면서 무대 위를 오고 간다. 처음에는 저게 무언가 싶다. 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그것이 바람과 나무와 새들 같은 자연을 표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저 텅 빈 무대이거나, 어딘가 천정이 새는 지하실 음습한 연습실 같아 보이던 무대가 순간 거대한 숲속으로 보이는 순간, 관객은 말 그대로 ‘삼매경’에 빠진다. 연극 <삼매경>으로 들어가기 위한 몸풀기라고나 할까. 

 

연극이 시작되면 거기 배우 지춘성이 서 있다. 그는 진짜 배우 지춘성이지만, 이 연극에서는 지춘성을 연기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지춘성이 지춘성을 연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묘하지만, 그가 34년 전 함세덕 원작의 <동승>에서 동자승 도념 역할을 연기했던 배우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상황은 더더욱 기묘해진다. 지춘성은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고 싶어.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짜 그 아이가 되어보고 싶어.” 

 

<삼매경>은 연극배우 지춘성이 34년 전 <동승>이란 작품에서 도념 역할을 맡아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그 연기가 스스로는 실패라 여겨 다시 그 연기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나서는 이야기다. 지춘성은 그러니까 지춘성을 연기하면서, 지춘성이 연기했던 동자승 역할을 다시 연기해 보겠다고 하는 셈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때의 도념 연기를 곱씹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그 과거의 분신이 그를 칼로 찌른다. 그건 아마도 34년간이나 자신을 괴롭히던 완벽하지 못했던 연기에 대한 회한이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찌른 것일 게다. 그 순간 그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연극과 현실이 뒤섞이는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삼매경

과거의 지춘성은 모든 것이 연기에 맞춰져 있었다. 심지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조차 슬퍼하는 일보다 찾아온 조문객의 특이한 말투를 기억해 연기에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하지만 완벽한 연기의 길은 결코 쉽지 않고, 어쩌면 이뤄지지 않는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자신이 완벽하게 타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나친 자의식에 대해 비판받으며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무의 상태가 되어 캐릭터에 자신을 일치하라는 이야기는 그럴 듯 하지만 실상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는 결국 ‘사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으로 들어가 <동승>을 재창작하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인물들이 저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면서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삼매경>은 끝없이 완벽한 연기를 열망하는 지춘성이 이를 위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끝없이 연기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은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자연물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다시 자연물이 되는 과감한 연출로 표현되고, 불가의 득도를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의 무거움이 느껴지는 언어들과 속세의 껄렁한 단어들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웃음으로 이어지다가, 끝끝내 지춘성 배우의 절절한 진심이 묻어나는 대사로 먹먹한 감동을 안긴다. 

 

그런데 도대체 <삼매경>은 왜 지춘성 배우의 이 끝내 실패로 끝나는 끝없는 완벽한 연기의 도전을 두 시간 동안 무대 위에 펼쳐 놓은 걸까. 그건 이 작품의 극 중 극인 <동승>과 맞닿아 있다. 함세덕의 희곡 <동승>은 어린 시절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재회할 날만을 기다리는 도념이라는 동자승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마침 죽은 아들의 재를 지내기 위해 절을 찾은 미망인이 도념에게 정을 느껴 입양하려 하고, 도념 역시 미망인에게 모성을 느껴 따라가려 하지만 주지는 업보를 쌓는 일이라며 이를 반대한다. 결국 도념의 열망은 미망인의 목도리를 만들기 위해 토끼를 잡는 살생까지 저지르게 되고, 주지가 이 일을 알게 되면서 입양은 좌절된다. 하지만 도념은 끝내 눈 내리는 날 어머니를 찾아 절을 떠난다. 

 

<동승>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건 불가의 해탈이라는 궁극의 경지와 배치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속세에 대한 욕망과 그 실패에 대한 이야기다. 도념이 새 어머니를 갈구하는 모습은, 인간이 열반하지 못하고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탄생하기를 원하는 환생의 욕망을 그려낸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어머니를 갖고 그 품에 안겨 살기를 원하지만 그 삶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욕망과 열망에 사로잡힌 삶이니 말이다. 

삼매경

<동승>을 다시 완벽하게 연기하고픈 지춘성 배우의 열망은 바로 그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배우는 마치 환생하듯 끝없이 무대에 오르고 같은 역할을 반복하지만 완벽한 그 인물이 되는 데는 늘 실패한다.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헛된 미완성의 갈망을 멈추는 것이 저 주지가 동자승에게 말하듯 현명한 방법일 수 있지만,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지춘성 배우는 그래서 연기의 열반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끝까지 연극무대로 환생의 삶을 반복해 왔던 그 아름다운 미완성을 받아들이려 한다. 

 

마지막 지춘성 배우가 관객들에게 건네는 말은 그래서 똑같이 저마다의 무대 위에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끝없이 미완성인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위로를 담았다. “한겨울, 다람쥐가 먹으려고 등걸 구멍에다 모아 둔 잣 마냥, 한 줌 밖에 안되는 저의 인생을 여러분들은 목격하셨습니다. 그저 연극밖에 몰랐던 아둔한 작은 배우가 이 극장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어. 언젠가 긴긴밤 잠이 안 오실 때 오늘 보신 장면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깨무십시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드디어 동자승 도념과 지춘성 배우가 하나가 된 듯한 목소리로 외친다. “안녕,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 그 장면은 지춘성 배우가 무대를 떠나는 것이지만, 저 어린 동자승이 절을 떠나는 장면처럼 오버랩된다. 미완성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이랄까. 그 순간 깊은 <삼매경>에서 막 깨어난 듯 무대에서 관객들은 깨어난다. 이제 그들은 극장을 벗어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무대로 들어갈 것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진:국립극단)

- 내려놓는 삶에 대하여

 

중학생 시절 만화가게에서 이현세 화백의 '까치의 제5계절'을 보고는 그의 팬이 됐다. '국경의 갈가마귀', '날아라 까치야', '떠돌이 까치', '까치의 유리턱' 등등 그의 만화가 나올 때마다 만화가게로 달려가 섭렵했는데, 특히 그가 그리는 스포츠 만화에 나는 매료됐다. 그때 그 레전드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등장했다. 무리한 경기로 어깨를 다쳐 선수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던 까치 오혜성이 지옥훈련을 한 후 돌아와 프로야구 시즌 전 게임 우승을 실제로 이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난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 대사로 기억되듯 엄지와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들어있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이 밑바닥에 깔고 있는 건 성공에 대한 욕망이다. 이제 막 프로야구가 국내에서도 시작됐던 시기, 연봉 몇 억을 받는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공공연하던 시절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 역시 그 만화를 보며 막연한 성공에 대한 욕망을 품었던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라면 냄새에 담배 연기 가득한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도 까치처럼...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훈련은 아니지만, 나름의 지옥 같은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의 입시 경쟁을 통과하고 대학에 들어갔고 잠깐 동안의 치열하면서도 찬란했던 청춘시절이 꿈 같이 지나간 후 겨우겨우 회사에 들어갔지만, 그 회사는 1년 만에 화의신청을 했고 거의 모든 직원들이 해고되는 사태를 겪었다. 나도 해고되어 몇몇 회사를 전전하다 결국 홀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게 됐다. 노력하면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다던 믿음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훗날 지나고 보니 IMF가 그간 한껏 부풀었던 욕망과 성공의 버블을 터트린 거였다. 회사가 직원을 평생 책임져준다는 평생직장 개념은 사라졌고, 정직원 대신 계약직이 갈수록 늘어났다.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노력해 봤자 나만 갉아먹을 뿐인 것이 현실인 세상이 되어갔다. 하다못해 지옥훈련을 해도 이제 성공은 보장되기 어려웠다. 어떤 수저를 갖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심지어 그 사람의 미래까지 결정되는 사회에서 성공은 세습되는 것일 뿐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성장의 사다리가 끊긴 사회에서 이제 노력은 '노오력'이 됐다. 중학생 시절 내 마음에 불을 질렀던 까치는 점점 과거의 유물로 사라져 갔다.

 

2017년 방영된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이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줬다. 주인공 제혁(박해수)은 이제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촉망받는 프로야구선수였지만 뜻하지 않은 추락을 맞이한다. 여동생 제희(임화영)의 집에 들어온 괴한을 뒤쫓아 가서 한 대 때린 것이 그를 사망케 하는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그는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어깨를 다쳐 야구선수로서의 생명도 끝장날 위기에 처한다. 밖에서는 팬들이 '노력의 아이콘'인 제혁이 이번에도 불굴의 의지로 이를 극복하고 마운드로 돌아올 것이라며 응원하는데, 이 인물은 놀랍게도 포기하고 싶다는 뜻을 드러낸다. "준호야. 나 이제 그만 노력할래. 노력하는 거 지겹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지겨워. 노력과 끈기의 상징. 힘들어서 이제 못하겠다. 나 진짜 야구만 안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1983년에 나왔던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뢰가 사라진 현실에서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제목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감방생활 같아. 노력한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거나 하기 어렵지. 그러니까 무조건 노력하기보다는 '슬기롭게' 대처해야 해. 너무 힘든 노력이 자신을 괴롭히거나 질식시키려 한다면 차라리 피하는 게 나아.

슬기로운 감빵생활

실제로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방영된 후 신원호 감독과 함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토크콘서트에 진행을 맡았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그거였다. 대학생들에게 인생의 조언 같은 걸 한 마디 해달라는 나의 우문에 그는 이런 현답을 내놨다. "여러분들이 꿈을 갖는 건 좋습니다. 꿈은 좋은 거니까요. 하지만 그 미래의 꿈 때문에 현재의 당신의 삶이 질식될 것 같다면 그 꿈은 버리는 게 슬기로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행복이 미래의 성공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의 행복한 삶들이 모여 여러분의 인생이 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신원호 감독은 그 후에도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통해 또다시 '슬기로운 삶'에 대한 화두를 꺼내놓았다.

 

7,80년대의 한국사회는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성공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당장의 행복을 위해 돈을 쓰기보다는 미래의 성공을 위해 저금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유예하는 것이 당연한 한국인들의 삶이었다. 특히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희생되더라도 자식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고 그래서 저마다의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당대의 연인이나 가족 간의 사랑이야기에서 나를 희생하는 서사들이 자주 등장해 뭉클한 감동을 줬던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까치처럼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의 사랑은 과연 현재에도 통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건 집착이거나 혹은 부담이 될 테니 말이다. 이건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생겨난 변화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타인에 대한 희생은 결코 사랑이 아닌 집착과 부담이 되는 시대를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

나이 들면서 점점 알게 되는 건, 욕망과 집착이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나아가 성공 그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당히 힘이 빠지고 그래서 과하게 들끓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으면 비로소 진짜 사랑과 행복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국사회는 그렇게 까치의 시대를 지나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제혁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스스로 가둔 감방생활에서 벗어나는 보다 유연하고 슬기로운 선택들이 필요해졌다. 까치를 좋아했던 젊은 시절 내 머리도 오혜성처럼 빳빳하고 고집 셌던 까치머리였다. 바람이 불어도 요동조차 않을 정도의 강모였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절로 힘이 빠지자 부드러워진 머리카락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이리저리 흩트러진다. 물론 빠지는 머리가 고민이긴 하지만, 머리카락을 바람에 맡기고 그 흐름을 느끼는 기분이 영 나쁘지만은 않다.

‘환혼’이 훌쩍 뛰어넘은 무협, 멜로 그 이상의 성취

환혼

“넘치는 힘이란 건 네가 기쁜 만큼만 쓰고 말 수는 없어. 비를 바라면 홍수를 피할 수 없고 바람을 원하면 태풍을 맞아야 하듯이 감당해봐.” tvN 토일드라마 <환혼>에서 무덕이(정소민)는 얼음돌 한 가운데서 환각처럼 어린 시절의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그 말은 지금까지 술력을 쌓아 더 강한 자가 되고픈 이 드라마가 그려내던 그 욕망들을 무화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무덕이는 “이 힘을 두고도 내 맘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어린 시절의 무덕이가 말한다. “당신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긴 합니다. 쓰지 않는 겁니다. 그 힘을 쓰지 않는 선택은 당신 뜻대로 할 수 있어요.”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얼음돌이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간이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그 힘을 쓰지 않는 선택뿐이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여기서 <환혼>의 이야기는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이야기를 그려낸다. 인간이 수련을 통해 수기를 모으고 그것으로 술력을 키워 자기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건 사실은 수기라는 자연의 힘(하늘의 기운)을 활용하는 것일 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연의 힘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소유해 그 힘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욕망이 만들어내는 파국. <환혼>이 그리려한 세계가 그저 술력 키우는 무협에 적당히 달달한 멜로를 섞어 낸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얼음돌은 그래서 이러한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어리석은 인간들이 드러내는 욕망을 끄집어내는 일종의 리트머스지 같은 장치다. 얼음돌을 통해 환혼술을 소환해 제 몸을 장강(주상욱)과 바꿔 그의 아내를 탐한 선왕의 욕망이 그렇고, 뱃속에서 13개월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은 아이를 구해내려 금기를 어겨가며 얼음돌을 꺼내와 장강을 통해 아이를 살려낸 진요원의 원장 진호경(박은혜)이 그렇다. 얼음돌의 힘을 통해 권력을 쥐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천부관 부관주 진무(조재윤)도, 그 얼음돌로 환혼해 왕비 행세를 하는 당골네도 모두 그 비뚤어진 욕망 앞에 무너진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들이다. 

 

만장회에 모인 모든 이들이 얼음돌의 힘을 궁금해하고 그래서 그 욕망에 눈 멀어 무덕이를 죽이고 되살리는 시연을 하는 걸 막지 않는 것도 그런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다. 결국 그 선택은 이들 앞에 거대한 자연의 환란으로 돌아온다. 정진각 주변을 거대해진 얼음돌의 힘이 결계를 만드는 것. 그래서 그 안에 갇힌 장욱, 무덕이는 물론이고 서율(황민현), 고원(신승호) 같은 청춘들이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그 바깥에서 아이들의 운명은 깜빡 잊은 채 얼음돌의 힘에만 눈이 멀었던 만장회 어른들의 모습은 극명히 대비된다. 

 

이건 마치 자연의 힘(하늘의 기운)을 제 것으로 가지려는 어른들의 욕망이 후대를 살아가야 할 아이들(청춘들)에게 어떤 비극으로 돌아오는가를 그려내는 은유 같다. 과학의 힘을 과신해 환경을 훼손해가며 마구 에너지를 끌어온 그 대가가 현재 후대들 앞에 어떤 암울한 미래를 펼쳐놓고 있는가를 떠올려 보라. <환혼>이 무협의 세계를 통해 그려놓은 얼음돌이라는 하늘의 기운을 가진 힘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상징과 은유로 다가오는가 새삼 느껴질 게다. 

 

“인간의 기운인 수기도 내 몸 속에서 돌리지 못하면 내 것이 되지 못하는데 하늘의 기운을 돌려서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있겠어?” 하지만 장욱의 이 말처럼 <환혼>은 저 어른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청춘들을 통해 희망을 담는다. 장욱은 그 하늘의 기운을 가질 수 없다면 다 내어주면 어떻겠냐고 되묻는다. “내 기운을 다 하늘의 기운에 내어준다면 내 기운이 다 하늘의 기운이 되는 거잖아.” 

 

술력을 쓰면 기력을 모두 빨아들이는 얼음돌의 결계 속에서 장욱은 탄수법을 써서 그 결계를 깨기 위해 자신의 기력을 다 내어주고 대신 물 한 방울을 만들려 한다. 그 물 한 방울이 결계를 깨고 수 천 수 만 개의 빗방울이 될 거라 믿는다. 그간 벼랑 끝에 제자를 세워 술력을 키우게 해온 사부 무덕은 장욱의 그런 선택을 반대한다. 하지만 결계를 깨지 않으면 다친 서율이 죽을 수도 있다며 던진 장욱의 한 마디는 무덕을 수긍하게 만든다. “무덕아 네가 포기한 건 지키기 위해서지? 나도 지키려는 거야. 그리고 유리도 그동안 널 지켜왔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갖기 보다는 다 내어주는 것. 이 청춘들은 술력을 갖기 보다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다. 이 부분에서 <환혼>의 멜로는 달달한 청춘들의 사랑 그 이상의 함의로 확장된다. 스승 무덕은 장욱 앞에서 힘을 되찾을 기회를 버리고, 제자 장욱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간 어렵게 쌓아온 기력을 버린다. 그렇게 대호국에 나타난 거대한 환란은 이들의 희생에 의해 사라진다. 

 

“스승님, 제자 오늘로 파문하겠습니다. 그간 못난 제자를 벼랑 끝에 세워두고 떠밀며 여기까지 이끌어주셔 감사했습니다. 비록 스승께선 힘을 찾을 기회를 버리시고 제자 또한 그동안 쌓아온 기력을 버렸지만 그로인해 평생 곁에 둘 소중한 이를 얻었습니다. 쓰이고 버려지지 않고 지키고 간직하고자 하니 파문을 허락해주십시오.” 장욱이 무덕에게 파문을 요구하고 그러자 무덕은 이를 허락한다. 사제지간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대신 장욱과 무덕의 연인 관계가 남는다. “아 그럼 이제 도련님한테 시집와라. 무덕아.” 술력 대신 사랑의 선택. 그건 사적 욕망 대신 공존을 선택한 것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깊어진다. 이 쿨내 진동하는 장욱과 무덕이 그려낸 <환혼>의 서사가 그저 가벼운 무협과 멜로 그 이상의 성취를 갖게 된 이유다. (사진:tvN)

‘지리산’, 주지훈은 왜 생령이 되어 산을 떠돌게 됐을까

지리산

tvN 토일드라마 <지리산>에 드리워져 있던 안개가 조금씩 걷혀가고 있다. 2018년 지리산 국립공원 최고의 레인저였던 서이강(전지현)과 신입 강현조(주지훈)가 파트너가 되어 함께 활동했던 시절부터 2019년 12월까지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지리산>은 2020년 현재 그 때 벌어졌던 사건 때문에 떠났던 서이강이 휠체어를 타고 지리산 국립공원 해동분소로 돌아오고, 강현조 역시 코마 상태가 되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과거 그들까지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건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니었다. 서이강이 다시 이 분소로 돌아온 건 그 사건을 해결하려 함이다. 그런데 서이강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데는 조난자 사고 사진들 속에서 일련의 빨치산 표식을 발견하게 되면서다. 그 표식은 서이강과 강현조만이 아는 것이었다. 서이강은 왜 돌아왔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누군가 저 산 위에서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 그래서 돌아왔어요.”

 

서이강의 부탁으로 망바위 뒤쪽 오래된 주목나무 밑둥에 빨치산 표식(해동분소를 가리키는)을 놓으러 간 병아리 레인저 이다원(고민시) 앞에 으스스한 형상을 한 채 나타난 의문의 인물은 바로 강현조였다. 코마 상태로 누워있는 강현조가 어떻게 산에 등장했는가 하는 의문은 그가 바로 생령이었다는 사실로 풀렸다. 생령, 즉 살아있는 영혼은 오컬트 장르에 종종 등장하는 존재로 유체이탈을 하거나 식물인간 상태에서 영혼이 몸 밖으로 나온 존재를 뜻한다. 강렬한 원한이나 어떤 절실함이 만들어낸 생령은 그래서 영혼 상태로 떠돌지만 육신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강현조가 생령이 되어 지리산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은, 서이강에게 계속 신호를 보내온 존재가 바로 그라는 걸 말해준다. 그런데 강현조는 왜 코마 상태가 되어서까지 생령이 되어 지리산을 떠돌고 서이강을 불렀던 것일까. 그 이유는 3회에서 밝혀진다. 강현조는 과거 육군 대위로 지리산 행군 훈련을 하면서 부하를 잃은 후, 조난자들이 보이는 환영을 보는 능력(?)을 갖게 됐는데, 그것 때문에 레인저가 되어 지리산 해동분소로 자원한다.

 

그리고 2018년 어느 날의 사건으로 강현조는 과거 부하를 잃은 것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저지른 살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출입이 금지된 백토골에 들어간 할머니를 서이강과 함께 찾아 나섰다가 환영 속에서 봤던 빈 요구르트 병을 발견한 것. 검은 장갑을 낀 누군가가 놓고 간 그 요구르트를 마신 할머니는 환각을 보고 결국 사망한 채 발견된다. 

 

마침 그 곳에서 훈련 중이던 군인들 중 한 명이 실종되고, 그 역시 요구르트를 마신 후 환각 속에서 헤매다 절벽 끝에서 구조되면서 강현조는 깨닫게 된다. 자신이 본 환영이 현재가 아닌 과거 1년 전 부하가 사망했던 때를 본 것이고 그곳에도 빈 요구르트 병이 있었다는 것. 결국 그는 깨닫는다. ‘누군가 내 동료를 죽였다. 그 사람은 아직도 이 산에 있다. 이 산에서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있다.’

 

이로써 <지리산>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가 분명해졌다. 지리산 안에 무슨 이유인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살인자가 있고(마치 조난인 것처럼 꾸며), 서이강과 강현조는 이를 막으려다 한 명은 다리를 잃고 다른 한 명은 코마 상태가 되는 일을 겪은 것. 하지만 이들은 이 상황에서도 또 다른 희생자를 막기 위해 다시 산으로 돌아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인자와 대적하려 하고 있다. 

 

<지리산>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흔한 산악 구조 스토리가 아니라 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살인사건과 이를 막기 위한 레인저들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고, 서이강과 강현조가 모두 산을 탈 수 없는 육체적 조건(하반신을 못 쓰거나 코마 상태인)으로 빨치산 표식을 통해 서로 연락하며 다른 레인저들과의 공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리산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절실하고 강렬한 갈망을 부여해 다소 비현실적일 수 있는 설정과 상황들을 설득해내는 점은 <지리산>의 탁월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살인자가 왜 하필 산 속에서 연쇄살인을 벌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나, 결국 사망한 할머니가 본 환각이 다름 아닌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당했던 양민학살의 끔찍한 광경이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생령이 되어서까지 조난자를 구하고 살인자를 막으려는 강현조의 이야기는 그들 각자가 가진 절실한 욕망으로 인해 그 비현실성 또한 공감하게 만든다. 

 

즉 강현조는 자신 때문에 부하가 죽었다 생각했지만 살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더 이상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그 욕망이 코마가 되어서도 생령이 되어 지리산을 떠돌게 만든 이유가 된다. 할머니가 죽기 직전까지 보게 된 양민학살의 비극은 여전히 남아있는 역사의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있고, 현재까지 끔찍한 살인을 벌이고 있는 살인자 역시 분명 이러한 역사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서이강과 강현조의 특별한 공조로 산 속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범과의 사투는 그래서 단지 범죄스릴러에서 끝나지 않고 지리산이라는 공간에 담겨진 역사적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골로 간다. 골로 보내버린다. 그런 말 많이 들어봤죠? 골짜기로 갔다. 이 백토골로 들어오면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한다는 말에서 유래된 거예요. 이 곳은 지리산 중에서도 유독 음기가 센 곳이에요. 동학혁명, 일제 강점기, 6.25 빨치산 전투까지 오랫동안 여기서 사람들이 죽었거든요. 아직도 땅을 파면 인골이 나와요. 그리고 백토골 곳곳에 십자가가 놓여있거나 돌탑이 쌓인 곳들이 많아요. 무덤도 남기지 못하고 여기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거죠. 만약에 진짜 귀신이 있다면 다른 어느 곳보다 어울리는 곳이에요.” 지리산국립공원 자원보전과 직원인 김솔(이가섭)의 대사를 통해 읽을 수 있듯이, <지리산>은 이 비극의 공간에서 무덤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이들을 위한 헌사를 김은희 작가 특유의 미스테리 스릴러를 통해 담아내려 하고 있다.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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