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가 담아내고 있는 한국인의 저력

파친코

“1910년 일본은 제국을 확장하며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한국인이 생계를 잃고 고향을 뒤로하고 외국 땅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견뎠다. 가족들은 견뎠다. 여기 몇 세대에 걸쳐 견뎌낸 한 가족이 있다.” 

 

애플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한 가족이 4대에 걸쳐 버텨내고 견뎌낸 삶을 담겠다고 한다. 자못 비장한 자막이 흘러나온 후 드라마는 선자의 어머니 양진(정인지)의 결의에 찬 얼굴을 비춰준다. ‘몇 세대에 걸쳐 견뎌낸 한 가족’을 그리는 것이지만, 그 중심에 바로 여성이 있다는 걸 드라마는 그렇게 말한다. 

 

무당을 찾아온 양진은 어머니가 박복했고 자신까지 낳아 고생하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마음이 아파 술만 먹고 다녀 자신과 동생은 거지처럼 빌어먹고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을 언챙이라 장가를 못간 하숙집 아들과 혼인시키고, 그래서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 모두 죽었다는 것. 그가 무당을 찾아온 건 어떻게든 지금 또 가진 아이를 살리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양진은 딸 선자(전유나)를 낳는다. 

 

딸이 너무나 귀한 아버지는 선자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내 뭔 짓을 해서라도 이 세상 드러운 것들이 니 건들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 아버지 그 약속 지킬기다.” 그런 아버지는 결국 병으로 돌아가신다. 그 앞에서 오열하는 어린 선자의 모습에 아버지가 남긴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옛날에는 내 팔자가 왜 이리 모진가 할 때가 있었다. 오만천지 다 행복해도 내랑은 평생 먼 얘긴지 싶었데이 그런데 니 엄마가 내게 오고 니도 생겼지. 그라고 보니께 팔자랑 상관이 없는 기라. 내가 니 부모될 자격을 얻어야 되는 거더라. 선자야. 아버지가 강해져갖고 세상 더러분 것들 싹다 쫓아버렸으니까 아인나 니도 금세 강해질 거다. 나중에는 니 얼라들도 생기겠지. 그 때 되면 니도 그럴 자격이 되야 된다. 선자 니는 할 수 있다. 나는 니를 믿는다.”  

 

<파친코> 첫 회에 담긴 선자네 가족의 이야기는 1915년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을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세상 더러운 것들이 건들지도 못하겠다 했던 아버지는 결국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그 모질고 힘든 세상 앞에 선자가 마주하게 되는 것. 그가 걸어갈 한 평생의 삶을 우리는 근현대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원폭 투하와 일본의 항복 선언 그리고 터진 한국전쟁 등등. 그 과정에서 선자는 일본으로 넘어가 파란만장한 삶을 버텨낸다. 김치를 리어커로 만들어 팔아가며 자식들을 부양해온 삶.

 

<파친코>는 선자네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파란만장한 한 세기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첫 회, 선자네 하숙집에서 술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아저씨들이 ‘뱃놀이’를 부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뭉클한 면이 있다. 어찌 보면 일제가 다 빼앗아가는 통에 더 가난하고 더 고단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이들의 노래에는 한과 더불어 흥이 가득하다. 가난하지만 나눠 먹는 상이 풍족하고, 일제의 폭력 앞에 짓밟히지만 당당하다. 

 

<파친코>가 그리는 선자네 가족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은 그래서 그 자체로 뭉클한 면이 있다. 그것은 무수한 외세의 침탈을 받아온 한국인들이 끝까지 버텨내는 끈질긴 생명력과 더불어, 가난해도 정이 있고 또 당당한 삶의 면면들이 묻어나서다. 이런 모습은 선자라는 캐릭터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선자(김민하)가 갖지 말아야할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숙집에서 양진의 보살핌으로 죽다 살아난 이삭은 딴에는 도움이 되겠다며 선자에게 입양을 하면 어떻겠냐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선자는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세상이 다 무시하는 사람의 사랑 받으면서 컸어예. 우리 아부지. 이래가 아부지 생각하는 게 뭐 염치가 없지만서도 다들 우리 아부지 평생 장가도 못가고 자식도 없을 기라캤는데 지가 요래 있잖아예. 없어야 할 아가 요 있다 아입니까. 야도 있으면 안되는 아지만 요 배 속에 잘 있심니더. 야도 사랑받으면서 클기라예. 지가 밤낮으로 일해가 손톱이 다 부러지고 허리가 뽀사지고 배를 쫄쫄 굶는 한이 있어도 내 아는 부족한 거 하나 없이 키울 겁니더. 그래 약속했십니더. 지 아부지 지한테 약속하신 것처럼예. 안돼지예. 지 아는 못 버립니더.”

 

세상 더러운 일들이 삶을 업신여기고 힘들게 만들어도 끝끝내 버텨내는 힘이 만들어내는 끈질긴 생명력. 선자는 그렇게 부모의 간절함 속에서 태어났고, 선자 역시 그렇게 자신에게 온 아이를 키우려 한다. 그리고 그 삶의 무게는 이제 노년의 선자(윤여정)의 얼굴 주름 하나하나 속에 각인되어 있다. 

 

1989년의 선자와 1915년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온 선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절묘하게 교차되면서 전해지는 <파친코>에서 노년의 선자 역할을 하는 윤여정의 연기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옛 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흘려도 거기에 만만찮은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밤낮으로 일해 손톱이 다 부러지고 허리가 부서지고 배를 쫄쫄 굶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 아이만큼은 부족한 거 하나 없이 키우겠다는 다짐. 그것이 한국인의 저력이라고 선자의 패인 주름은 말하고 있다.(사진:애플TV+)

비극을 대하는 <밀정>과 <고산자>의 다른 선택

 

600만 관객과 80만 관객. 추석을 보낸 영화 <밀정><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의 성적은 극명히 나뉜다. 이 두 영화 비교대상이 되는 건 같은 날 개봉한 우리네 영화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역사를 다뤘고, 그 역사 속 주인공들의 삶이 비극적이었으며, 그 역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진출처 : 영화 <고산자>

사실 요즘 같은 시기에 비극을 다룬다는 건 흥행에 있어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밀정>은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열단의 이야기를 담았다. 물론 주인공은 조선인 출신의 일본 경찰인 이정출(송강호)이지만 그가 의열단의 인물들을 겪으며 갖게 되는 심적 변화가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결국 해야 되는 일을 하기 위해 숭고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의열단원들의 면면들은 슬픔과 분노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픈 이야기가 지금껏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문제까지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밀정>은 호평 받았다.

 

영화적으로만 보면 <밀정>은 그 비극을 우아하고 장중한 느낌의 연출을 통해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들었다. 깊은 슬픔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영화는 장르적인 긴장감을 충분히 유발하고 특히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공감대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끝까지 영화에 빨려들 수 있었다. 일제 앞에 산화한 분들의 슬픔을 고스란히 아픈 기억으로 담아냄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긴 작품이 되었다.

 

한편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삶을 다룬 <고산자>는 개봉 전부터 식민사관논란이 벌어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원군에 대한 묘사와, 김정호와 딸의 옥살이 이야기가 1934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 실린 김정호의 옥사설을 따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 때문이다. 조선어독본에는 대원군에 의해 김정호와 딸이 옥사했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일제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원군을 매도함으로써 조선의 무능함을 드러내려 날조된 기록이라는 것.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듯이 식민사관의 내용과는 다르게 전개된다. 결국 <고산자>가 다루는 이야기는 길 위에는 신분도 없고 귀천도 없다. 다만 길을 가는 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한 마디로 압축된다. 지도 한 장이 민초들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했던 시절, 온전히 걷고 또 걸어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 민초들에게 배포하려 했던 한 위대한 평민의 이야기. 기록 자체가 A4 한 장 분량도 되지 않는 김정호의 역사적 기록을 영화는 허구를 덧대 지도에 담긴 그의 의지를 그려내려 했다. 아마도 영화 끝에 보여지는 대동여지도 목판 원본의 세세하게 새겨진 길들과 산과 강 그리고 산맥의 정교함에서 느껴지는 고산자의 마음이 역사적 기록보다 더 많은 걸 얘기해줬을 것이다.

 

식민사관논란을 겪었지만 <고산자>는 영화 속에 오히려 일본에 대한 불편한 심경들을 담아놓았다. 영화 속에서 김정호가 독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건 그래서다.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든 정확하게 지도에 담기 위해 여러 차례 배를 타고 사경을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도를 보려 했다는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이야기의 비극성으로 보면 <밀정>만큼 <고산자>도 못지않다. 김정호의 삶 자체가 비극의 연속이었다. 잘못된 지도 때문에 산길에서 횡사한 아버지와 평생을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상적인 삶은 거의 포기했던 그가 아닌가. 그래서 <고산자>는 영화적 재미를 위해 코미디를 넣었다고 한다. 차승원과 김인권이 마치 만담하듯 벌이는 코미디들은 그래서 비극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잠시 동안의 숨통을 틔워준다.

 

현실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지금의 관객들은 비극을 좀체 보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밀정><고산자>도 사실 쉬운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비극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밀정><고산자>는 사뭇 달랐다. <고산자>는 물론 후반부에 이르러 그 비극적 삶이 강조되지만 전반적으로 코미디 설정을 많이 활용했고, 반면 <밀정>은 온전히 비극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장르적인 재미와 미려한 연출을 통해 끝까지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되돌아보면 비극을 비켜가지 않고 정면 돌파한 <밀정>의 선택이 훨씬 괜찮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밀정>, 송강호가 왜 최고의 배우인가를 증명하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 송강호라는 배우가 차지하고 있는 지분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연기하는 이정출이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 즉 일제에 붙어 경무부장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는데 앞장서는 인물이면서 의열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밀정으로 투입되면서 겪게 되는 심적 변화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메시지나 재미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밀정>

이정출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잡기 위해 상하이로 보내진 밀정이면서, 동시에 의열단원의 핵심요원으로 이정출에게 접근해 경성으로 폭탄을 실어 나르는 일에 그의 도움을 얻어내려는 김우진(공유) 사이에 서 있는 경계인이다. 사실 이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많은 관점들 중에서 경계인이라는 관점은 중요하다.

 

지금의 시선으로야 분명히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명쾌히 구분해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들조차 어느 쪽이라 애매모호한 입장에 서 있는 인물들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가 모호한 상황에 처한 당대의 인물들은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조차 모호하게 느끼는 그림자같은 경계인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인 이정출이 일본군에 쫓기다 궁지에 몰린 의열단원인 김장옥(박희순)과 마주하는 장면은 이 인물이 가진 갈등을 잘 드러낸다. 이정출과 김장옥은 과거 친구였지만 이렇게 일제와 의열단원이라는 새로운 경계로 만나게 된다. 총에 맞아 잘려진 발가락을 보며 이정출은 생각보다 너무 가볍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할 안타까움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살짝 묻어난다.

 

이정출이라는 경계인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때문에 영화는 우리가 <암살> 같은 작품에서 봤던 그런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나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애초 목적이 그런 장르적 즐거움이 아니라 이정출이라는 경계인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 내면은 때론 어두웠다가 때론 밝아지고 때론 한없이 아파했다가 분노하며 폭발하기도 한다. 분명한 적와 아군의 편을 나누고 그 대결을 그렸다면 포착하기 힘든 영화적 재미가 바로 이 이정출이라는 인물로부터 나오게 된다.

 

사실 역사책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의열단같은 조직의 활동을 우리는 좀체 실감하지 못한다. 그들이 항일투쟁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밀정>은 이정출이라는 조금은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 가까운 인물을 통해 그 의열단이라는 존재의 실체에 접근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에게 요구되는 삶은 복종 아니면 죽음이라는 총독부 경무국장의 진술처럼 복종을 거부한 의열단원들은 사실상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처연하기 그지없다.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고 그럼에도 배신하지 않기 위해 혀를 물거나 아예 곡기를 끊어버리는 그들의 표정은 의연하면서도 쓸쓸하다. 다만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 막연한 강령이 그들을 그토록 끝까지 나가게 하는 힘이 되어줄 뿐이다.

 

경계에 선 이정출은 죽음을 딛고도 또 앞으로 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감정은 고스란히 지금의 관객들과 맞닿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에 카타르시스란 애초부터 기대할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복잡하게 바뀌어가는 경계인의 모습을 영화는 유려한 영상과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 속에서 포착해낸다.

 

송강호는 역시 최고의 배우답게 그 미세한 감정의 변화들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설득시킨다. 속물적인 욕망들을 지워내지 못한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면면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그의 앞에서 스러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약해지는 휴머니스트의 면모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의 섬세하게 표현되는 인물의 내면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움을 주는 영화다. 물론 그를 통해 느끼게 되는 건 결국 의열단원들의 경외로운 삶에 대해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이지만.

송혜교, CF보다는 개념을 선택하다

 

새삼스럽게 연예인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서경덕 교수가 개념 배우라 칭송한 송혜교 이야기다. 사실 연예인에게 CF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떤 경우에는 CF를 몇 개 하는가가 그 연예인의 위상을 말해주기도 한다. 드라마 한 편이 잘 되면 주인공들에게 줄줄이 따라붙는 광고들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듯 받아 들여왔지 않은가.

 


'태양의 후예(사진출처:KBS)'

하지만 송혜교 이야기에서 CF 개수와 위상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광고를 하는 것보다 때로는 광고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 배우의 개념을 드러내는 일이 되었다는 것. 일본의 전범기업인 미쓰비시가 제안한 거액의 CF 모델 제의를 단칼에 거절한 송혜교에게서는 그녀의 남다른 위상이 엿보인다.

 

송혜교의 개념 행보는 또한 CF라는 것이 얼마나 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가를 에둘러 말해준 것이기도 하다. 연예인이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CF는 그 자체로 대중들을 현혹시킬 수도 있다. 만일 미쓰비시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배우의 얼굴 뒤로 전범기업의 이미지는 숨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떴다고 이런 저런 광고에서 섭외 1순위로 오르는 걸 그저 무작정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광고를 하더라도 그 광고가 과장된 것은 없는지 또 나아가 사회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 우선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 그 자리에 있는 연예인들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예의이기도 하다.

 

만일 그 최소한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이제 대중들도 그저 넘어가지 않는다. 작년 9월 일본의 대부업체 광고 출연 계약을 해서 엄청난 비판을 받고 결국은 출연을 취소했던 고소영의 사례나, 2014년 김수현과 함께 백두산을 중국 명칭인 창바이(長白)으로 표기한 중국의 생수 광고에 출연해 비난받은 사례를 생각해보라. 대중들은 연예인들이 그런 개념 없는 선택을 하는 것에 기대한 만큼의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정반대로 송혜교 같은 개념 행보는 그 자체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미쓰비시가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라는 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미쓰비시가 강제노역한 중국인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했고, 미국과 영국 전쟁포로들에게는 사과를 했지만 우리에게는 보상은커녕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번 송혜교의 이야기를 통해 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송혜교는 과거에도 아파트 광고 재계약을 포기함으로써 개념을 드러냈던 바 있다. 아파트의 가격 거품을 만드는 것이 아파트 광고에 연예인들이 얼굴을 내미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파트 광고 출연을 자제해달라는 경제실천시민연합의 편지를 받고 그녀는 광고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광고의 개수는 그 연예인의 위상과 무관하다. 오히려 개념 있게 할 수 있는 광고가 해서는 안되는 광고를 선택하는 모습. 그것이 그 연예인의 위상을 더 말해준다. CF보다는 개념을 선택한 송혜교에게 대중들이 박수를 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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