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5센티미터

벚꽃이 피면 들려오는 노래가 '벚꽃엔딩'이라면

이 즈음 늘 떠오르는 영화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창기 애니메이션 '초속 5센터미터'다. 

초속 5센티미터. 실제로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그런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저 하늘하늘 날리며 떨어지는 벚꽃의 시간을

그렇게 구체적인 수치로 적어 보면

그 순간이 너무나 짧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 짧은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초속 5센티미터'라는 표현을 했던 것일 게다. 

 

함께 벚꽃이 날리는 도쿄의 거리를 달리며 좋아했던 타카키와 아카리.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다. 

어딘가 나서는 성향이 아닌 그들은 또래 아이들의 왕따를 당하기도 했지만

둘이여서 그걸 이겨낼 수 있었다. 

초속 5센티미터

하지만 청춘의 첫사랑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지키기 어려운 그들은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먼 거리로 떨어지게 된다. 

아카리가  도쿄에서 북쪽에 있는 도치키현의 이와후네로 이사하게 되면서다. 

3부작으로 된 '초속 5센티미터'의 1부는

어느 폭설이 내린 날, 이와후네에 있는 아카리를 찾아가는

타카키의 지난한 여정을 담았다. 

초속 5센티미터

'고토쿠지-신주쿠-오미야-오야마-이와후네'

도쿄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사실 타카키의 여정이

그리 멀지는 않다는 걸 알 것이다. 

하지만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날 만나기를 기대했던 두 사람의 바람은

벚꽃 대신 폭설이 내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열차로 인해 예상밖으로 빗나간다. 

가다 서다 종국에 눈이 쌓인 들판 한 가운데 멈춰서 버린 기차 안에서

타카키는 조바심과 걱정과 불안과 분노, 체념 등등

수많은 감정들을 겪는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 감정들을 특유의 사물 표현(열차가 마치 타카키 같이 느껴진다)으로 담아낸다. 

 

체념의 끝에 결국 도착한 타카키와 아카리는 

차가 끊기고 갈 곳도 없지만

아카리가 싸온 도시락을 나눠먹고 눈내린 거리를 함께 걷고

벚꽃 대신 눈이 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키스하며

밭옆에 있는 작은 헛간에서 날을 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그들은 헤어진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멈춰서 버린 듯한 순간을 타카키도 아카리도 잊지 못할 것이었다.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벚꽃의 아름다운 추락의 순간처럼. 

초속 5센티미터

두번째 에피소드는 가고시마로 이사를 간 타카키와

그를 짝사랑하지만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카나에의 이야기다. 

아카리와 헤어져 늘 저 편 먼 곳을 바라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타카키와

그런 그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면서도

마음을 건네지 못하는 카나에의 이야기는

또 다른 엇갈린 청춘의 첫사랑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는 아직은 스스로 서지 못하는 자신들과

어디로 향할 지 알 수 없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들어있다. 

그들은 언젠가 저 하늘로 쏘아질 수 있지만

아직은 그 발사대까지 '시속 5킬로미터'의 느린 속도로 이동되는 로켓 같다.

그래서 카나에는 끝내 타카키에게 고백하지 못한다.

그저 눈물 흘리고 "나한테 다정하게 대하지 말아줘"라고 말한다. 

그 순간 날아가는 로켓을 보고는 카나에는 알게 된다.

타카키가 늘 이 곳이 아닌 저 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초속 5센티미터

세번째 에피소드는 다시 도쿄다.

하지만 타카키와 아카리는 이제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어느 날 우연히 기차 건널목에서 마주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지나친다. 

어쩌면 그들은 한때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져 버렸지만

결코 잊히지 않았던 첫사랑과 첫 입맞춤의 순간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그들을 각자의 삶으로 걸어가게 한다.

초속 5센티미터

신카이 마코토는 말했다. 

"'초속 5센티미터'는 20년 지나서 객관적으로 보면 꼭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고 지금의 제 눈엔 상처가 아주 많은 작품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몹시나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눈부시기도 합니다. 저도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지금의 저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작품을 만들 생각도 별로 들지 않고요. 현재의 제가 잃어버린 무언가로 만들어진 작품 같아요. 돌이길 수 없다는 점, 또 그 때가 눈부시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청춘과 닮은 것 같기도 해요."

 

초속 5센티미터의 순식간에 지나가는 청춘의 시간이란

어딘가 불완전하지만 그래서 더 눈부신 것이다. 

2026.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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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내려서 자신이 달려온 쪽을 바라본대요. 

그건 자기가 쉬려는 것도 아니고 말을 쉬려 하려는 것도 아니고

혹시라도 걸음이 느린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기다려주는 배려였대요.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대요."

파반느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싶다는 경록(문상민)의 고민에

미정(고아성)은 의외의 인디언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서 말한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말고 나의 속도로 살아가면 좋을 거 같아요."

파반느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반느>는 바로 이 속도에 대한 영화다. 

세상의 속도와 나의 속도. 

세상이 맞다고 주장하는 삶과 나의 삶.

모든 이들이 가는 길과 내가 가고 싶은 길.

세상의 잣대와 나의 가치관...

이런 것들을 이 영화는 대결시킨다. 

파반느

경록과 미정 그리고 이들 사이에 큐피트처럼 들어온 요한(변요한)은

그 세상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처럼 보인다. 

경록은 배우가 된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린 어린 시절의 상처를 겪으며

세상의 잣대를 혐오하고 경멸하게 된 청춘이다. 

미정은 못생겼다는 이유로(그것도 저들의 잣대이지만) 백화점 동료들의 멸시를 받는 청춘이다. 

요한 역시 데이비드 보위를 추종하며 저들 똑같이 살아가는 이들을 냉소하는 청춘이다. 

 

세상의 속도와 다른 나의 속도는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내 속도가 맞고 세상의 속도가 틀리다 여기며

나만이 진짜고 저들은 다 가짜라 생각하지만

모두가 그 세상의 속도로 달려가게 되면서

나만이 가짜이고 저들이 진짜는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파반느

경록이 그렇게 흔들릴 때

미정이 해주는 인디언 이야기는 그래서

그를 진짜이게 해준다. 

그의 속도가 맞다고 얘기 해준다. 

파반느

사랑이 나를 진짜이게 해주는 어떤 것이라면

경록과 미정은 그런 사랑을 시작한다. 

세상의 속도에서 비껴나 가짜라 손가락질 받던 청춘들은

그래서 서로의 속도를 바라봐주며 

서로가 진짜라는 걸 알게 해주는 사랑을 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사랑을 한다. 

파반느

인디언의 말 달리는 이야기에서 등장하듯

이 영화에서 '달린다'는 이미지는 중요한 의미로 반복된다.

서로가 서로를 부르고 원했을 때  

그들은 상대를 향해 달려간다. 

그렇게 숨가쁘게 달려온 서로에게 그들은

"왜 달려왔어요? 걸어와도 괜찮은데."라고 말한다.

걸어와도 되는데 달리게 되는 그 초조한 마음에서

청춘의 서투름과 그래서 더 비극이 될 수도 있지만

절절히 빛나는 마음들이 눈송이처럼 따뜻하게 피어난다.  

파반느

청춘의 사랑을 그린 청춘멜로지만

삶의 속도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여러 번 복기하면 할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너무도 아련한.

(사진: 영화 '파반느')

202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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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영과 최우식의 ‘멜로무비’, 영화 같은 사랑에 담은 사람이야기

멜로무비

아홉 살에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보겠다고 마음 먹는 아이는 영화가 그리도 좋았던 걸까. 아니면 홀로 어두운 밤을 보내야 하는 시간들이 그만큼 힘겨웠던 걸까. 넷플릭스 드라마 <멜로무비>는 부모를 일찍 잃고 형과 함께 비디오가게에서 살며 밤새 비디오를 보는 고겸(최우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두운 방안을 빛으로 채워주는 영화에 빠져드는 아이 고겸으로부터. 

 

영화를 좋아해서일까. 스물 여섯 살이 된 고겸은 배우로서의 꿈을 키우며 영화판에 들어왔다가 김무비(박보영)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연출 스태프에게 빠져든다. 무비라는 이름이 고겸을 잡아끌었지만, 정작 무비는 자신의 이름이 싫다. 영화 판에서 일하다 과로로 일찍 사망한 아버지에 대한 애증 때문이다. 가족까지 등지고 열심히 영화를 향한 꿈을 펼쳤지만 이렇다할 영화 한 편 제대로 내지 못했던 아버지. 그렇게 일찍 떠난 아버지에게 무비는 그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겠다며 영화판에 뛰어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화 촬영현장에서 만난다. 한 사람은 영 연기에는 재능이 없어보이지만 사람이 좋아 누구나 좋아하는 너스레 가득한 청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텝으로 일하고 있지만 한 발 물러나 섬처럼 그들과는 섞이지 않는 조용한 청춘이다. 고겸은 마치 주인 따라 다니는 댕댕이처럼 김무비를 졸졸 따라다니고 그런 고겸에게 어느 눈오는 날 김무비는 첫 키스를 한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키스를.

 

하지만 삶이 어찌 영화 같은 순간들로 채워지랴. 그 키스를 한 날 이후 갑자기 고겸은 사라져버리고 김무비는 기다리다 지쳐 마음을 접는다. 아버지가 갑자기 떠났을 때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알았던 무비였다. 그래서 누구와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겨우 고겸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다시금 찾아온 건 그 고통이었다. 

 

고겸 또한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형은 회복하기 어려워보였지만, 고겸의 정성스런 간병으로 다시 살 수 있게 됐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렀고, 고겸은 간병하며 할 수 있는 글을 쓰다 영화 평론가가 된다. 무비는 고겸을 마음 속에 지워내며 영화 감독의 길을 걸어간다. 

 

한편 고겸의 어린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시준(이준영)과 주아(전소니)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지만 어느 날 주아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겠다며 떠나버린다. 음악의 꿈을 갖고 있고 재능도 있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시준은 자신의 뮤즈인 주아를 잃은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나타난 주아가 시준에게 자신이 만들 영화의 음악감독이 되어달라 요구하면서 이들의 손에 닿지 않는 아픈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멜로무비>는 미래의 꿈 앞에서 불안해하고 때론 예기치 않은 일들 때문에 흔들리면서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청춘남녀들의 멜로를 그리는 작품이다. 평론가와 영화감독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와 음악감독이라는 네 인물의 직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연인과 친구로 얽혀 그려내는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해 우리는>을 쓴 이나은 작가의 색깔 그대로 <멜로무비>는 풋풋하고 경쾌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생각보다 쓰디 쓴 삶의 서사가 담겨져 있다. 그 고통스런 삶의 모습이 밝게 그려지는 건 다름 아닌 어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그 밝음을 잃지 않는 고겸이라는 인물 덕분이다. 그는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홀로 비디오가게에서 살아가며 일하러 간 형을 기다리며 살아야 했지만, 그 시간을 영화를 보는 즐거움으로 채웠던 아이였다. 

 

이 지점은 <멜로무비>가 가진 웃음과 행복감 가득한 사랑이야기에 삶의 무게감이 얹어지는 대목이다. 알고 보면 모두가 저마다 무거운 삶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걸 <멜로무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들을 담담히 보여주면서 조금씩 꺼내 놓는다. 갑자기 사망한 부모 대신 이제 겨우 이십대에 덜컥 동생을 부양해야 했던 형, 그 형이 사고를 당하자 모든 일을 접고 형을 간병해 살려낸 동생, 영화의 꿈을 꿨지만 현실의 무게에 무참히 꺾여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와의 시간이 간절했지만 먼저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 딸, 남자친구의 뮤즈가 되어 응원했지만 점점 자신이 사라지는 걸 알고는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자와 그 여자가 떠난 후 그 시간대에 머물러 살게 된 남자...

 

발랄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멜로무비>에는 고통스런 삶들이 군데군데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런 삶들을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건 반짝반짝 빛나는 일상의 순간들이고 어쩌면 한 발 물러나 그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선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는 듯 하다. 그건 마치 영화를 닮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오히려 빛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 잠시 아픈 현실을 잊게 해줌으로서 또 그 어둠 바깥으로 나오게 해주는, 영화를. 

 

고겸과 무비가 어느 어두운 밤 한적한 곳에서 오픈카에 앉아 달달한 사랑이야기를 나눌 때 저 편에 보이는 달은 그래서 <멜로무비>가 하려는 이야기를 그림 한 폭에 담아 놓는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어둠 가득한 삶 속에서 저 달처럼 빛나는 달달한 멜로영화 한 편이 주는 위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힘이라는 것. 그렇게 사랑이야기가 사람이야기가 되고 달달함이 묵직한 감동으로 이어지는 작품, 바로 <멜로무비>다.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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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로 또다시 청춘의 아이콘으로 돌아온 김태리

정년이

“참말로 고맙구만이어라. 하지만 받지 않겄습니다. 그 길은 제 길이 아니어라.”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윤정년(김태리)은 자명고 대본을 내주며 오디션을 볼 수 있게 해주려는 매란국극단 스타 문옥경(정은채)의 호의를 거절하며 그렇게 말한다. 문옥경은 장터에서 윤정년이 소리를 하는 걸 듣고는 단박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를 매란국극단에 들어올 수 있게 도운 인물이다. 그런 문옥경의 호의가 고맙지만 이를 거절하는 정년에게서는 보다 당당하게 제 힘으로 서고 싶은 청춘의 기세가 엿보인다. “안 그래도 다들 지가 지 실력으로 이 국극단 들어온 거 아니라고 떠들어 싼디, 여기서 또 쉬운 길을 선택해 불믄, 그 사람들 말이 맞다고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된께요.”

 

첫 회 4.8%(닐슨 코리아) 시청률로 시작해 단 4회만에 12.7%까지 급상승한 ‘정년이’의 저력은 바로 이 윤정년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에서 나온다. 목포 시장 바닥에서 아무런 미래에 대한 꿈도 없이 살아가던 이 청춘은 어느 날 별천지에서 온 대스타 문옥경을 만나고 국극의 꿈을 꾸게 된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집을 떠나 매란국극에 들어온 윤정년은 거기서도 그를 시기하는 이들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갖은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청춘은 물러서거나 좌절하는 법이 없다. 돌덩이 같은 단단한 역경을 피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기세. 이 청춘의 기세에 시청자들은 빠져든다. ‘정년이’가 파죽지세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이유다. 

 

서이레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정년이’는 드라마 리메이크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우려의 목소리들이 적지 않았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원작 캐릭터의 싱크로율을 감당할 배우가 과연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 활달한 성격에 소리까지 연기해야 하니 만만찮은 역할이다. 하지만 김태리가 정년이 역할로 분한 첫 회가 등장하면서 이런 우려들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원작 웹툰에서 막 튀어나온 듯 싶을 정도로 발랄한 청춘의 캐릭터를 제 옷 입은 듯 소화해냈고, 소리를 하거나 국극의 무대에 설 때는 너무나 진지한 모습 또한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을 납득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김태리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유독 ‘청춘의 초상’으로서의 역할들을 주로 해왔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2016년 영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김태리라는 배우가 가진 밝고 쾌활한 면모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담긴 이 작품에서 김태리는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의 제안으로 귀족 아가씨(김민희)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되는 인물이다. 하녀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이 인물이 백작이 아닌 아가씨와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김태리는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소화해낸 바 있다. 그 후 2017년 ‘1987’에서는 1987년 독재정권과 맞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회의적이었지만 차츰 그 대열에 참여하게 되는 이연희라는 청춘의 고뇌와 성장을 연기했다. ‘1987’에서 그랬던 것처럼 김태리는 하는 작품마다 당대의 청춘들이 겪는 아픔들을 공유하면서도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저마다 성공하고픈 꿈을 꾸지만 그것이 청춘을 마모시키고 좌절하게 만드는 현실을 담은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그랬다. 김태리는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와 거기 나는 식재료들로 음식을 챙겨먹으며 자신을 회복해가는 청춘 송혜원을 통해 당대의 청춘들을 위로했다. 

 

“나도 꽃이요. 다만 나는 불꽃이요.”라는 명대사를 남긴 ‘미스터 션샤인’은 또 어떤가. 구한말 사대부가의 영애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힘겨운 의병활동의 길을 선택한 고애신 역할을 김태리는 특유의 발랄한 에너지로 소화해냈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분위기를 뚫고 나오는 드라마의 발랄함은 김태리라는 배우와 만나 기분좋은 시너지를 만들었다. IMF를 배경으로 그 힘겨운 시절 어른들로 인해 청춘들이 겪게 된 아픔과 성장을 담은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도 김태리는 나희도라는 인물을 통해 큰 위로를 줬다. 이러한 김태리가 써온 청춘의 초상을 담은 필모그래피는 심지어 오컬트 장르인 ‘악귀’에서도 이어졌다. 각박한 현실 앞에 좌절한 청춘들이 그 엇나간 욕망이 탄생시키는 악귀를 그린 이 작품에서, 김태리는 구산영이라는 공시생 역할로 악귀가 자신을 잠식하려는 위기와 맞서는 청춘을 연기했다. 

 

그래서 김태리가 나왔던 작품들을 들여다 보면 지금의 청춘들이 마주한 현실이 엿보인다. 수저 색깔로 미래가 결정되는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도, 어떻게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번번히 좌절되는 현실 앞에 갑갑해 하는 청춘들의 초상이다. 그래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이른바 N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포기’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건 청춘들이 원해서가 아닐 게다. 그들이 진짜 바라는 건 그래서 김태리가 해온 작품들 속 인물들이 보여주듯이 그 현실을 뚫고 나가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김태리가 가진 청춘의 에너지가 빛나는 ‘정년이’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1956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고단한 삶을 살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정년이’가 그리고 있는 건 그런 좌절과 포기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국극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 정년이의 성장드라마다. 그 고단했던 시절에도 그 힘겨움을 위로해줬던 건 다름 아닌 국극 같은 당대의 문화들이었다. 그 문화의 현장 속에서 민초들도 잠시 현실을 잊고 웃고 울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 예인의 길을 그려낸 ‘정년이’가 주는 위로가 남다른 건 그래서다.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처럼 여겨지던 시절, 역경을 뚫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정년이의 모습은 큰 위로와 더불어 용기를 준다. 제 아무리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꿈꿀 수 있는 용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남다른 청춘의 기세를 보여주는 정년이와 그 역할을 맡은 김태리는 말해주고 있다.(글:국방일보,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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