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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리 인생캐 경신하나... ‘정년이’ 반응 심상찮다

D.H.Jung 2024. 10. 2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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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완벽 빙의된 김태리, 그 성장서사에 시청자도 빠져든다

정년이

우리 소리가 이토록 힙했던가.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는 먼저 채공선이 부르는 ‘남원산성’으로 눈과 귀를 매료시킨다. 눈 내리는 어둑한 밤, 유려한 한옥집의 풍광 위로 낭낭하게 울려 퍼지는 ‘남원산성’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이상하게 애절하게 만든다. “소리를 하면은 속이 뻥 뚫리는 거 같아 갖고 좋던디요.” 소리꾼이 되고 싶다는 공선에게 명창 임진(강지은)이 화려함 때문이냐고 묻자 공선이 하는 그 말은 소리가 가진 진짜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한 마디로 꺼내놓는다. “이 가슴에 뭐가 탁 맥힌 것맨치 답답하고 외롭고 할 때마다 소리를 하다 봉께는 그리 되었구만이라.” 

 

때는 1931년 일제강점기다. 춥디 추운 겨울 눈 내리는 한데서 달달 떨며 문 열어주길 기다리는 공선네 부녀처럼 서민들의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가슴 한 가운데 꽉 막힌 무언가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살 수밖에 없던 시절, 소리는 그 막힌 걸 뚫어주고 풀어주는 힘이 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1956년 목포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먼저 들려오는 건 “어기야 디야 어기야 어야 디야-” 하는 노동요를 부르며 뻘밭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다. 전쟁이 끝나고 피폐해진 삶에 그 때라고 가슴 한 가운데를 꽉 막아세우는 답답한 현실이 없었을까. 

 

시장 통에서 잡은 생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가는 정년이네 가족은 번번히 자릿세를 내라며 행패를 부리는 무리들 때문에 힘겨워 한다. 그렇게 현실에 짓밟혀 꿈이라는 건 가져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살아가면서 정년이의 가슴에도 무겁디 무거운 돌덩이가 생겼던 모양이다. 엄마가 그토록 반대하는 소리를 자꾸만 하고 싶고, 그래서 시장통에서 ‘남원산성’을 부른 게 그의 삶에 변곡점을 만들어줬다. 그 소리를 듣고 단박에 천재성을 타고 났다는 걸 간파한 매란국극의 스타 문옥경(정은채)이 그에게 자신이 하는 국극 ‘자명고’의 티켓을 주며 보러 오라고 한 것이다. 그 국극을 보고 난 후 정년이는 드디어 꿈을 갖게 된다. 자신도 문옥경 같은 국극의 스타가 되겠다고. ‘정년이’는 바로 이 청춘이 꿈을 향해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다. 

 

워낙 인기 웹툰으로 잘 알려진 ‘정년이’는 드라마로 리메이크된다고 했을 때 그게 가능할까 싶은 몇 가지 난점들이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 첫 번째는 웹툰의 생명력 넘치는 정년이라는 캐릭터를 과연 누가 싱크로율을 맞춰 연기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고, 두 번째는 국극이라는 소재의 특성상 소리를 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시청자들이 설득될 수 있을만큼의 수준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또한 원작이 가진 퀴어적 색깔을 좀더 보편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가능할까 싶은 면도 난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막 방영을 시작한 ‘정년이’를 보니 이런 난점들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단박에 알게 된다. 그건 마치 저 첫 장면에 등장하는 명창 임진이 공선의 소리를 듣고 그 진심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은(혹은 문옥경이 정년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세심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대본과 연출 위에서 완벽하게 정년이라는 캐릭터에 빙의된 김태리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얹어져 시청자들을 곧바로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원작이 가진 퀴어적 요소들을 드라마는 직접적인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기보다는 드라마 전체의 서사 안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방식을 선택했다. 즉 문옥경과 윤정년의 관계는 마치 새내기를 이끌어주는 선배 같은 관계로 그려지지만 어딘지 그 이상의 애정이 묻어나고, 또 정년에게 애정을 주는 문옥경을 바라보는 서혜랑(김윤혜)의 시선에는 동료 이상의 질투 같은 게 느껴진다. 남성 주인공이 없다는 사실만 봐도, 이 작품이 가진 온전한 여성서사의 색깔을 이해하게 된다. 굳이 퀴어적 요소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아도 여성들 간의 우정과 애정 혹은 애증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우리네 소리가 가진 멋과 아름다움을 유려한 연출과 극적인 대본 그리고 실감나는 연기를 통해 꺼내놨다는 점이다. 국악에 별 관심이 없던 이들도 아마 ‘정년이’를 보게 되면 판소리 심청가에 한 대목인 ‘추월만정’ 같은 곡을 다시금 찾아보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국극이나 국악이라고 하면 어딘가 고리타분하지 않을까 싶었던 분들조차 매료시키는 연출, 대본, 연기의 삼박자가 아닐 수 없다. 

 

또 매란국극에 들어가 수련을 받는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K팝 아이돌들이 거치는 연습생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오디션 과정을 거쳐 뽑히고, 그리고 나서 연구생이라는 이름으로 소리부터 춤, 연기를 배우고 무대에 서는(데뷔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담겨 있어서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정년이가 그를 시기하는 동료들과 경쟁해가며 그려낼 쌍방 성장서사는 그래서 현재의 K팝 한류의 기원이 꽤 오래 전부터 태동해왔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찬받아 마땅한 건 김태리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웹툰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김태리의 연기는 정년이 그 자체처럼 보일 정도로 동작 하나 대사 하나가 살아 있는 느낌이다. 웹툰으로 보며 저랬을 것 같다는 그 모습을 김태리는 연기를 통해 공감하게 꺼내 보여주고 있다. ‘미스터 션샤인’과 ‘스물다섯 스물하나’, ‘악귀’를 거치며 청춘의 초상 같은 그만의 아우라를 계속 그려냈던 김태리는 이번에도 ‘정년이’를 통해 인생캐릭터를 또 한 번 경신할 모양이다. 정년이라는 인물이 그려낼 꿈을 향한 성장서사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사진: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