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가게’, 어떻게 공포가 감동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환자는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의지가 생기죠?” 흔히들 의식불명에 빠진 중환자의 가족들에게 의사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의식이 없던 중환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사경을 헤매다 살아돌아온 건 어떤 의지 때문이었을까. 강풀 원작의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가 그리고 있는 독특하고 기발한 세계관은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했을 게다. 그들의 의지는 어쩌면 환자만의 의지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의지가 더해진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력으로부터.
퇴근 길 버스정류장에 매일 같이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여자, 그 여자가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걸어다니는 어두운 동네, 불빛이 하나도 없어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부르며 그 무서운 골목길을 매일 지나가는 학생, 싼 맛에 이사를 왔지만 누군가와 함께 사는 듯한 소름끼치는 집에 갇혀버린 여자... ‘조명가게’가 4회에 걸쳐 펼쳐놓은 세계는 독특한 공포의 공간이다. 어째서 이런 오싹한 일들이 이 동네에서 벌어지고,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이 등장하는지 드라마는 좀체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오싹하고 음사한 동네에 유일하게 따뜻하고 밝은 공간이 존재하는데, 그 곳이 바로 조명가게다. 물론 이 가게 역시 일상적이지는 않다. 야간에 문을 열어 손님이 올 때까지 영업을 하고, 주인 원영(주지훈)은 조명에 눈을 버렸다는 이유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그 가게에는 한밤중이지만 찾는 이들이 많다. 매일 엄마가 사오라고 시켰다며 백열전구를 사가는 고등학생 현주(신은수)에게 원영은 말한다. 그런 낯선 이들을 만나면 모른 척 하라고. 그리고 도망치라고.
공포물의 색깔이 선명히 묻어나지만 여기 등장하는 낯선 사람들은 어딘가 오싹하긴 해도 연민의 감정 같은 것들을 불러 일으킨다. 누군가를 해코지할 것 같지가 않다. 다만 어떤 비극적 상황 속에 놓여진 이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오싹함에는 어떤 애틋함 같은 따뜻한 감정이 뒤섞인다. 어둠 속을 헤매는 그들 앞에 환하게 불을 켜놓고 찾는 이들을 기다리는 조명가게가 주는 따뜻함이 더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다.
오싹한 어둠과 따뜻한 빛의 극단적인 대비. ‘조명가게’의 세계관은 이처럼 이질적인 양극단을 한 작품 안에 펼쳐놓는다. 인간과 낯선 존재들, 빛과 어둠, 삶과 죽음 같들이 겹쳐지면서 공포는 도무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감동으로도 이어진다. 파편적으로 보이던 사건들이 하나로 묶여지는 건 영지(박보영)가 일하는 병원 중환자실을 통해서다. 대형 사고로 인해 의식을 잃은 환자들로 가득한 그 곳. ‘조명가게’가 그리고 있는 게 바로 그들의 의식 속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삶과 죽음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그들은 의식불명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변환경이나 주변사람들에 영향을 받는다. 같은 중환자실에서 섬망 증세를 보이며 괴성을 지르는 알코올 중독 환자의 목소리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영지 같은 간호사가 해주는 따뜻한 말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 듣는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큰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을 겪다 깨어난 경험이 있는 영지 또한 의식이 없는 중환자가 어떻게 의지를 갖고 깨어날 수 있는 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하게 됐다. 매일매일 자신을 위해 기도했던 엄마가 불어넣어준 그 의지가 어쩌면 자신을 살게 해주지 않았을까 하고. “저희 엄마는 그저 매일매일 기도했대요. 저한테 의지를 불어넣고 싶으셨대요. 그래서 생각해요. 어쩌면 나 혼자만의 의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그 어두운 동네에 밤새도록 불을 환하게 밝히고 찾아오는 손님을 끝까지 기다리는 원영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건 사경을 헤매는 이들에게 끝까지 누군가 보내는 삶에 대한 의지이자 응원인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조명가게’의 서사는 이 오싹한 공포의 세계를 통과해 뭉클한 휴먼드라마의 감동으로 변모한다. 영지 같은 환자를 위해 진심으로 간호하고 기도하는 어떤 존재들이 꺼져가는 불빛을 계속 지켜내려 애쓰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마 문법으로 보면 이 파편적이고 모호한 사건들의 연속을 거의 4회 분량으로 앞 부분에 배치한다는 건 모험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다. 4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중도 이탈하는 시청자도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풀의 뚝심이 엿보이는 이 4회 분량의 전반부는 바로 그 파편적인 사건들을 펼쳐놓음으로써 4회 마지막 부분에서의 반전에 더 큰 감동과 임팩트를 선사한다. 첫 공개에 4부까지 모두 공개한 뜻이 여기에 있다. 일단 4회까지 챙겨본다면 ‘조명가게’라는 독특하고 신박하며 오싹하지만 가슴 뭉클한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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