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흘러가는 곳, 천변을 걸으며

 

다리 밑에 서니 다리 위가 보였다. 그 위에서 사람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간다. 출근 시간이라 대부분이 정장차림이다. 다리 밑에도 사람들이 천변을 따라 걸어간다. 그들은 다리 밑을 가로질러 천을 따라 오르거나 혹은 내려간다. 다리 위를 지나면 전철역이 나온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거기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출근한다. 다리 밑을 지나 천을 따라 오르면 저 앞에 북한산이 보인다. 사람들은 그 천변을 따라 구불구불 나 있는 산책로를 뛰거나 걷는다.

 

딱 구분되는 건 아니지만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보다 다리 밑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들의 나이가 많은 편이다. 아마 그들도 조금 젊어서는 그 다리 위를 매일 같이 지나갔을 게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어느 날 '어 몸이 좀 예전 같지 않네' 하며 다리 밑으로 운동을 하러 나왔을 게다. 내가 그렇다. 출퇴근하는 일이 아니라 저들처럼 자주 다리 위를 지나다니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다리 밑을 매일 같이 걷고 뛰는 사람들의 대열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다리 위를 지나갈 때 내려다보며 '참 한가롭다'라고 여기곤 했으니까. 

창릉천

하지만 다리 밑을 걷게 되면서 그곳으로 오게 된 사람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매일 같이 천변에 마련된 운동기구에 올라 열심히 손발을 놀려보는 어르신 부부가 있었고, 그 부부가 운동할 때면 어김없이 혼자 나타나 반갑게 손을 흔드는 할머니가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아저씨는 매일 같이 반바지 차림으로 천변 산책로를 달렸고, 함께 거의 걷는 속도로 나란히 달려가곤 하는 부부들도 있었다. 걷기보다는 수다에 여념이 없는 할머니들이 있었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애써 걷는 어르신도 있었다. 간간이 그 길을 이용해 아빠 손 잡고 어린이집에 가는 아이들이나, 아마도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등교시키고 이제는 댕댕이 산책시키러 나온 엄마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어떻게든 운동을 하려는 나이 든 분들이었다. 

 

그곳에서 하는 운동은 공짜다. 헬스클럽을 찾아가면 매달 적잖은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 천변의 운동기구들은 누구든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물론 뛰거나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간혹 저녁에 걷다 보면 2,30대의 젊은 친구들이 저마다 뽐내듯 예쁘고 멋진 운동복을 차려입고 모여 단체로 뛰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요즘은 그렇게 온라인으로 모여 운동을 하는 게 하나의 유행이 된 모양이었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만 일단 몸이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걸을 뿐이다. 하여간 아파트 옆으로 창릉천이 흐르고 그 천변을 따라 운동을 할 수 있는 나는 행운아다. 북한산뷰의 운동시설을 공짜로 이용하는 셈이니 말이다. 

창릉천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며 글로 먹고 살아온 삶을 이야기했지만, 그런 고상한 표현에 이를 만큼 좋은 글들을 써오지 못한 내게는 '밥벌이'보다 '돈벌이'가 더 어울린다. 밥벌이란 '먹고 산다'는 그 생활과 행위에 더 맞닿은 표현이고, 김훈처럼 자기 세계의 일가를 이룬 소설가라면 밥벌이 이외의 예술이 그의 본업이라 말할 수 있을 게다. 지나치게 겸손해 그 예술적인 경지의 작품들도 밥벌이라 표현하는지 몰라도, 그다지 예술적이지 못한 일을 해온 내가 보기에는 어쩔 수 없이 밥벌이를 위해 쓰는 글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예술을 위한 글도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래서 난 얄팍한 재주로 돈벌이를 해온 느낌이다. 

 

어쩌다 글을 쓰는 일로 25년 가까이 먹고살다 보니 몸이 많이 망가졌다. 서른 살에 첫 직장으로 진로 홍보팀에서 일할 때도 주로 글을 썼다. 사보를 만들고 때론 회장의 연설문을 손보곤 했다. 그때 중년의 팀장님은 내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글로 벌어먹고 사는 건 빌어먹고 사는 거야. 글은 글러먹었어." 나 보도 꽤 오래도록 글을 써서 돈벌이를 해온 팀장의 그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들어간 지 1년 만에 회사가 화의신청에 들어가고 IMF가 터져 어려운 경제상황에 공공근로를 따내서 했던 일도 영화 시나리오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 후로 잡지사 편집장을 몇 년 했고, 프리랜서가 되어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다가 '평론가'라는 얼토당토않은 명함을 갖게 됐다. 아이들이 커가고, 들어갈 돈도 점점 커지면서,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 드라마, 영화, 방송, 음악, 게임, 연극 등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글을 썼고 포털은 물론이고 갖가지 사보, 잡지, 신문에도 정기적으로 글을 썼다. 글값이 워낙 싸서 그건 마치 몸 쓰는 노동자에 가까웠다. 일당 벌듯이 하루에도 적게는 3편, 많게는 5편씩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손끝에서 팔꿈치를 타고 어깨와 목이 찌릿찌릿해지더니 돌덩이처럼 딱딱해졌다. 매일 하루 종일 앉아서 글을 쓰다 보니 엉덩이도 아파오기 시작했고 다리 힘은 점점 빠졌다. 아 이러다 큰일 나겠네. 나는 다리 밑 천변을 걷기 시작했다. 

창릉천

다리 밑에 서니 다리 위가 보였고, 또 다리 밑도 다시 보였다. 다리 위를 매일 같이 지나가던 이들도 언젠가는 다리 밑으로 올 것이고, 어느 날 다리 밑을 걷다가 문득 다리 위가 보일 것이다. 돈벌이 혹은 밥벌이는 누구에게나 숭고한 일이다. 그래서 그걸 위해 제 몸 하나 망가지는 걸 마다하지 않고 다리 위를 무단히 지나가는 이들이 어느 순간 다리 밑을 다니게 되는 건 어딘지 뭉클한 느낌을 준다. 

 

나는 이제 다리 밑을 걷는다. 돈 들이지 않고 마음껏 운동하며 망가진 몸을 추스를 수 있다는 사실을 행운이라 생각하며.

2024. 11.6

프롤로그 : 바보상자에서 똑똑한 TV까지

상자 속의 바보상자, 그저 물건의 하나였던 TV

엉뚱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TV에 대한 가장 강렬한 첫 기억으로 무엇이 떠오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물쇠'라고 말할 것이다. 70년대 내가 아이였을 때, 큰맘 먹고 아버지가 모셔온(?) TV는 방 한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도무지 접근 불가의 물건이었다.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가구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TV라니! 지금으로서는 아마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당시 그 TV는 가구와 일체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TV를 보려면 먼저 가구에 달린 커다란 자물쇠를 풀고 문을 양옆으로 연 후에야 비로소 그 속에 놓인 TV를 볼 수 있었다. 이른바 'TV는 바보상자'라는 말이 공공연했던 시절, 교육열이 유난히도 뜨거웠던 당시 어른들은 아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바보상자에 상자를 또 하나 덧씌웠던 것이다. 지금은 우스워 보이는 이 풍경은 그러나 당시엔 당연해 보이는 어떤 것이었다.

 

흑백 TV의 화질은 마치 심한 스크래치를 입은 것처럼 조악했고, 그것마저도 TV 안테나의 상태에 좌우되었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거나, 비라도 올라치면 화면은 끊임없이 눈꺼풀을 깜박거렸고, 때론 일그러진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옥상 지붕에 올라가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이제 잘 나오니!"하고 묻는 모습이 연출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도 결국은 아버지가 그 자물쇠를 풀어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내밀한 공간 속에 들어있어서였을까. TV는 어린 내게 어떤 신비한 물건으로 보였던 것 같다. 마치 보물창고 속에 숨겨진 만화경 같은.

 

이때의 TV는 아직까지는 우리의 생활과는 유리된 어떤 물건이었다. 그것은 늘 저편에 있었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늘 우리의 손길이 일일이 닿아야 하는 구체적인 물건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드드득 소리를 내는 다이얼을 손으로 잡고 돌려야 화면이 바뀌었고, 채널 중간을 차지하는 모래알 같은 지직대는 영상은 TV 저편 세계의 이물감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계였다. "거 신기하네. 요 조그만 상자에 난쟁이들이 저렇게 많이 있다니." 할머니의 말은 아직 TV가 인간의 시각의 확장이라는(텔레비전 Tele-vision은 멀리 있는 것을 가까운 곳으로 끌어들여 본다는 '원격현전'의 의미가 담긴 용어였다) 인식이 생겨나기 전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그러니까 어른들은 당시 TV가 지금처럼 스마트폰 속으로 쏙 들어와 우리 생활의 일부, 아니 몸의 일부(감각을 확장시켰다는 의미에서)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때 TV는 그저 우리 몸의 감각과는 유리된 재미난 바보상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려면 서랍장 속에 숨겨야 할 어떤 존재일 뿐이었다.

흑백TV 시청하는 가족(출처:국가기록원)

새로운 감각에 눈뜨다, TV가 해방시킨 감각

하지만 못 보게 한다고 안 볼 우리들(나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 전부가 그랬으니)이 아니었다. 저녁 시간마다 TV를 볼 수 있는 친구 집으로 달려간 우리들은 탁 소리와 함께 브라운관의 작은 점이 한참이 지나야 영상으로 바뀌는 그 시간을 못 기다려 발을 종종 대곤 했다. 그렇게 켜진 TV 화면 속에 등장한 '황금박쥐'나 '요괴인간', '달려라 번개호' 같은 일본에서 들어온 만화들은 지금과 비교해 보면 꽤 조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TV 앞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집 서랍장 속에 고이 모셔둔 TV 때문에 밖을 전전하는 내게 백기를 든 아버지는 저녁 한 시간 동안 감금된 TV를 해방시켜 주셨다.

 

그 순간,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저 바깥세상과 유리된 채 살아가던 우리들의 눈과 귀도 해방되었다. 그것은 바보상자이기는커녕 온갖 진기한 세상 일들을 바로 눈앞에 가져다주는 놀라운 알라딘의 마술램프였다. 프로레슬러 김 일 선수가 일본선수에게 연실 박치기를 해댈 때마다 온 마을이 들썩거렸고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메달을 땄을 때는 집집마다 동시에 터져 나온 그 환호성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바보 영구를 흉내 내던 우리들을 조용하라고 하시며 슬그머니 눈가를 훔치게 만들었던 드라마 '여로', 그리고 '짜자자잔짜잔 -'하는 특유의 시그널송이 울리면 당연히 그 앞에 앉아 봐야만 했던 '수사반장'에 대한 국민적인 열광은 이 작은 TV의 위력을 어린 나이에도 실감하게 만들었다.

 

서랍장 속에서 TV가 밖으로 나오고, 그 TV를 자주 접하면서 우리 몸은 TV가 전해주는 매개된 감각에 점점 익숙해졌다. TV가 제공하는 시각과 청각에의 몰입은 여러 다른 감각들을 매개하기 시작했고, 때론 현실적인 감각을 지워버리기도 했다. 어떤 사건에 공분하고 어떤 국가적인 쾌거(주로 스포츠에 이런 표현들이 많았다)는 TV를 통해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집단적인 도취감을 맛보게 했다. 개발시대의 한복판, 애국, 민족, 국가라는 단어는 TV가 애용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단지 머릿속에만 빙빙 도는 그런 단어가 아니라 TV를 통해 우리네 감각과 인식까지도 바꿔놓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반공이 국시가 되면서 TV는 여전히 흑백이었지만 '배달의 기수'에 등장하는 이른바 빨갱이라 이름 붙여진 자들을 빨간색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감각은 TV에 상당 부분 포섭되어 있었다.

컬러 TV와 리모컨, 안방극장 시대

80년대 서울로 전학 왔을 때, 나는 그 서울이 주는 속도감을 좀체 적응할 수가 없었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던 나는 늘 비닐봉지를 준비해 갖고 다녔고, 차들이 쌩쌩 달리고 인파가 물결처럼 파도치는 거리를 다닐 때면, 땅바닥만 쳐다보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 속도감의 어지러움은 아마도 처음 내가 TV를 보았을 때 느꼈던 피로감과 비슷한 어떤 것이었다. 여러 개의 프레임들에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영상의 속도감은, 도시에서는 이미 생활이었다. 그것도 총천연색의 생활.

 

80년대 컬러 TV시대가 열리자 그때까지 TV 속으로 무채색으로만 존재하던 세상은 색을 입기 시작했다. TV를 처음 대했을 때부터 줄곧 가지고 있던 그 신비감이 깨져버린 것은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명암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흑백 TV만의 독특한 아우라는 컬러영상 속에서 적나라한 속살을 드러냄으로써 조금씩 휘발되었다. 컬러시대와 함께 광고들은 더 현란해졌고, 영상은 점점 대중화되었다. 우리의 눈은 점점 피곤해졌지만, 그것은 또한 속도의 시대로 진입하는 우리의 몸을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더 이상 멀미로 울렁증을 앓는 시골소년이 더 이상 아니었다.

 

때마침 등장한 리모컨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광고들로부터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 프로그램 전에 방영되던 수십 개에 달하는 광고를 피하기 위해 더 이상 TV 앞으로 가서 드륵드륵 채널을 돌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리모컨의 등장과 함께 TV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그만큼 줄어들었고, 그것은 TV라는 물건에 대한 인식보다는 그 물건 속의 영상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TV는 꺼져있을 때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거기 존재하지 않는 물건처럼 있다가, 비로소 켜짐으로써 존재하는 (물건이 아닌) 그런 영상이 되어갔다. 컬러 영상은 TV의 영상으로서의 존재감을 더 생생하게 만들어주었다.

6백만불의 사나이

그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채널을 바꿔주는 리모컨은 멀찌감치 놓인 소파와 한 세트를 이루면서, TV 시청을 새로운 여가문화의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육백만 불의 사나이'나 '소머즈'에서부터 '게리슨 유격대', '맥가이버'에 이르는 미국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것은 그 한참 후에 벌어졌던 미드 열풍처럼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고, 영화는 꼭 영화관에 가거나 비디오를 빌려야 볼 수 있었던 당대에 '주말의 명화'는 안방극장이란 말을 탄생케 했다.가족들은 이제 대부분의 여가생활을 집에서 TV를 통해 하기 시작했다. 리모컨을 누가 쥐는가는 그 가족의 헤게모니를 누가 잡고 있느냐를 대변했고, 그것에 따라 가족들은 멜로드라마를 보며 울거나, 스포츠를 보며 열광하거나, 오락프로그램을 보며 웃곤 했다. 오랜 시간 가족의 중심에 서있던 TV는 이제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고, 심지어 핵가족화되고 개인화된 공간으로 사라진 가족을 대리해 주는 존재가 되었다. 이른바 '또 하나의 가족'이 된 것이다.

 

디지털과의 결합, 똑똑하고 움직이는 TV의 시대

80년대 후반부터 점점 보급되면서 거의 1년 주기로 업그레이드된 컴퓨터는 디지털 시대를 예고하면서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컴퓨터 모니터는 점점 TV를 향해 진화했고 결국 이 두 지점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IPTV가 등장했다. TV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 즉 TV 하면 입을 반쯤 벌리고 머리는 텅 비운 채 수동적으로 앉아서 거기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영상을 보고 있는 바보를 떠올리는, 그런 생각은 수정되어야 했다. 이제 자신이 보고 싶은 영상을 스스로 선택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본적으로 몰입하게 하기 위해 투명한 창처럼 구성되던 화면은 이제 선택해야 할 아이콘들이 둥둥 떠다니는 마치 모니터 창과 같은 불투명한 창으로 바뀌었다. 이 '정신분산'의 메커니즘이 그래픽으로 구현된 창에서는 TV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뉴스를 확인할 수 있었고, 보다가 무언가 해야 할 다른 일이 생기면 화면을 멈춰놓을 수도 있었다. 물론 지나간 장면을 되돌려보면서 좀 더 분석적으로 TV를 바라볼 수도 있었다. 이 시대에 TV 방송이 드디어 비평의 대상이 된 데는 그 막강한 영향력에 대한 어떤 균형이 요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디지털과의 결합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 분석적인 시선들은 또다시 인터넷을 통해 나누어지고 그 힘이 여론으로 모아져 TV가 독주하는 것을 견제했다. 디지털 시대의 TV란 이제 늘 대상으로서 시청자를 세워놓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시청자의 참여를 통해 집중되는 존재로 변모했다. 이른바 똑똑한 TV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태블릿PC로 OTT 즐기기

그리고 드디어 로컬과 글로벌의 경계를 지워버린 OTT라는 TV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전 세계가 동시에 콘텐츠를 바라보는 지구촌 개념이 실현되는 이 공간은 우리에게 '글로벌 감각'을 훈련시킨다. 북미와 남미, 유럽,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콘텐츠들이 이 공간에는 한 자리에 위계 없이 채워져 있다. 물론 그 화면에도 우선순위는 존재하지만 그건 국가나 언어, 민족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구분에 따른 순위가 아니라, 그 콘텐츠를 소비하는 수용자의 취향에 따른 순위다. 언제든 국적 불문 내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내 앞으로 끌어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지난 20세기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21세기 개인적 취향의 시대를 감각적으로 벼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문화의 공유지대는 아직은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전 세계의 정세들을 바꿔놓을 만큼의 물리적 힘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이 문화 공유의 경험들이 축적되면 언젠가 저 바깥세상의 풍경들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을까.

 

동네에 한 대 있는 TV를 보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그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면 지금은 실로 수없이 많은 TV들(화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벽걸이 TV와 작업을 하다가도 TV로 변신하는(?) 모니터, 언제 어디든 들고 다니며 간편하게 TV가 되는 태블릿 PC,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언제든 꺼내 TV를 볼 수 있는 스마트폰까지, 이제 생활한다는 것은 바로 이 영상과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 똑똑한 TV의 시대에 이제 바보상자는 저 과거의 서랍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상을 선택하고 읽어내고 의미를 분석하는 일은 앞으로 생활이 될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TV의 진화는 좀 더 그것을 효과적으로 해줄 것이 분명하다. 그 진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TV의 눈을 우리의 눈으로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채워진 자물쇠를 풀어 갇혀있던 TV와 눈을 해방시켰던 그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TV를 좀 더 스마트하게 보고 그 의미를 읽어내고 그 안에 담긴 모종의 의도들을 찾아내는 눈이 필요해졌다.

2024.10.29.

'새글들 > 죽고 싶지만 TV는 보고 싶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타와 배우 그리고 연기  (0) 2025.01.22

중년기의 한국사회

 

“이 건물 밑이 원래 하천이야. 야 봐봐. 물길 따라 지어가지고 이렇게 휘었잖아. 복개천 위에 지어가지고 재건축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있다가 수명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아. 나도 터를 잘못 잡았어. 지구에 태어나는 게 아닌데...”- '나의 아저씨' 중에서

나의 아저씨

'나의 아저씨'가 방영될 때 내 나이도 오십을 막 넘기고 있었다. 87학번인 나의 대학시절만 해도 최영미 시인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할 정도로 서른만 넘으면 인생이 꺾어지는 줄 알았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로 시작하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도 그렇다. 지금은 달라졌다. 서른에 결혼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고 마흔이 넘어야 이제 중년에 들어선다고 여긴다. 중년과 노년의 나이 개념이 달라져서 오십을 넘겼는데도 여전히 중년이란다. 몸은 여기저기 고장나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한국인들의 중년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으려는 현 세태와 맞물려 점점 뒤로 늦춰지는 것처럼 보인다. '영피프티'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그건 피프티도 영했으면 하는 오십대 당사자들의 마음과, 중년에도 일을 더 해야 사회가 돌아가게 된 현 한국의 인구구성의 절박함이 만나 생겨난 말이 아닐까 싶다. 실로 오십대 중반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얼굴에 주름이 생겨나고 허리는 구부러지기 시작하고 기력도 예전같지 않아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해지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도 독립하려 하지 않으려는 청춘들의 모습이 점점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가는 현 한국사회에서 오십대 가장이 쉰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거북목에 오십견을 달고 살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4회)'에는 박동훈 부장(이선균)이 회사 동료들과 퇴근 후 한 잔 걸친 후 대폿집을 나서 나란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 보여지고 언급되는 곳이 바로 서소문 아파트다. 서대문구 미근동에 지금도 현존하는 아파트. 1972년에 지어진 이 낡고 오래된 아파트는 앞뒤로 세워진 현대식 건물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서 있는데, 마치과거의 한 부분이 담긴 이물질처럼 보여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후배가 "우리 부장님 이 건물 진짜 좋아해"라며 "이 낡은 데를 왜 이렇게 좋아하세요?"라고 묻자 박동훈은 이렇게 말한다. "나랑 같애." 그리고 박동훈은 그 아파트가 바나나처럼 살짝 휘어져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천 위에 지어져 그 흐르는 물길을 따라 짓다 보니 그렇게 됐다든 것. 그래서 재건축도 할 수 없단다. 실제로 이 아파트는 그간 노후되어 끊임없이 재건축 이야기가 나왔지만 무산된 곳이다(현행법 상 하천 위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박동훈 말대로 수명 다하면 없어질 처지다.

서소문 아파트

기억이 가물가물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1980년 즈음 나는 그 서소문 아파트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덕수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후 두번째 거처다. 고향인 경기도 안성을 떠나 처음 서울살이를 시작한 곳은 광화문 신문로2가 뒷골목에 있던 단칸방이었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빌딩이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집을 나서면 오밀조밀 모여있던 집들과 절벽처럼 높은 담벼락 사이에 놓여 있던 길다란 골목길이 학교가는 길이었다. 매일 그 길을 오갔고, 가끔은 친구들과 그 골목길에서 놀았다. 차도처럼 똑바로 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구부러진 길. 그래서 공놀이를 하다 놓치기라도 하면 공이 자꾸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 구부러진 길은 당시 쉽지만은 않았을 시골 소년의 서울살이에도 아늑함과 편안함을 줬다.약 2년 후 우리는서소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학교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그 아파트에도 구부러진 골목길이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아파트 앞쪽의 골목길에는 돼지머리가 놓여져있던 대폿집들이 죽 늘어서서 하루의 고단함을 소주 한 잔으로 풀어내는 아저씨들을 반기곤 했는데, 늘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폿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술 한 잔을 할 때면 그래서 그 냄새를 따라 그 때의 그 구부러진 골목길이 기억 속으로 떠오르곤 한다. 나는 당시 7동 7층에 살았는데, 지금도 7동과 8동 사이에 있는 비밀통로(?)를 통과해 있는 서서갈비집에서 가끔 누군가를 만나곤 한다. 고기 한 점에 소주를 기울이다 보면 그 때의 기억이 아련하다."나랑같애"라는 박동훈의 말이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굳이 서소문 아파트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말하는 대목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이 드라마는 이제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박동훈의 이야기를 그의 직업에 빗대 은유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박동훈은 구조기술사로 건물의 안전을 진단하는 일을 한다. 그는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며바람, 하중, 진동 같은외력들을 계산하고 그 힘에 건물이 버텨낼 수 있는 내력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게 그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일에서 인생을 은유한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그래서 자신이 맞이한 중년의 위기들도 애써 버텨보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인지가 헷갈린다. 중년의 위기를 건물에 빗대서 꺼내놓은 이 대목은 그래서 한국사회가 헌재 맞이하게 된 중년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아저씨

70년대 개발시대를 거칠 때만 해도 한국사회는 팔팔했던 청년의 시간을 구가하고 있었다. 서소문 아파트도 지금은 낡고 오래되어 초라해 보이지만 1972년 처음 지어질 때만 해도 연예인과 부자들이 좋아하던 아파트였다. 1층에 상가가 있는 주상복합아파트로 편의성이 좋았고, 무엇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서다. 하지만 그렇게 세간의 주목을 받던 당대의 잘 나가던 건물들도 낡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개발시대의 관성이 남은 한국사회에서 낡는다는 건 재개발되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낡은 건 사라지고 새로운 건 계속 세워졌다. 먹고 살려는 욕망이 펄펄 끓던 청년의 시절을 그렇게 지나왔고 이제는 중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그 욕망은 꺼지지 않는다. 개발시대를 거치며 한국이 이른바 '빈티지'의 멋을 잃어버린 건 안타까운 사실이다. 낡은 건 버려야 하는 것이고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그 시대의 휩쓸림 속에서 탄생했다.지금도 매일 세워지고 있는 아파트들은바로 그 여전한 개발시대의 관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물들이다. 그건 마치 외력에 의해 조금씩 낡아지고, 흔들리고, 결국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자연법칙을 애써 거스르려는 욕망처럼 보인다.

 

그 욕망이 헛된 일이라는 건 나이 오십을 넘어보면 다 알게 된다. 몸이 예전같지가 않다. 처음에는 그걸 어떻게든 이겨내보려 애쓰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 젊어서는 아무 일도 아니었던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일들이 나이가 들어가면 하나하나 쉽지만은 않은 일들이 된다. 많이 먹어서 괴롭고 적게 먹어서 괴로우며, 잠을 잘 수수 없어서 괴롭고 너무 쉽게 피로해져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괴롭다. 또 먹으면 나오는 게 당연한 그 일조차 갈수록 쉽지가 않다. 그걸 욕망으로 버티다가는 더 괴로워진다. 그럴 때는 그러려니 해야 편안해진다. 이처럼 나이 들면 쾌락의 욕망보다 더 커지는 게 편안함에 이르는 일이 된다.

나의 아저씨

한국사회는 이제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에 접어들고 있는 중이다. 인구구성도 그렇고 사회의 성장 곡선도 그렇다. 중년의 나이에 청년을 고집하는 일은 헛된 일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은"아무 것도 갖지 않은 인간이 되어 보겠다"며 스님이 되어버린 그 친구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든 버텨내려 고생고생하고 아등바등하며 사는 자신의 삶이 과연 맞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그냥, 다 아닌 것 같다고..." 그 지글지글한 중년의 버텨내기 위한 안간힘을 통과해, 박동훈은 더이상 버텨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편안해지기를 선택한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재개발 이야기가 솔솔 피어났다 사라지곤 하는 서소문 아파트도 좀 편안해졌으면 한다. 조만간 서서갈비에서 옛친구들과 만나 소주라도 기울여야겠다. 낡고 오래됐지만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그 친구들과.

2024.10.28

정글은 왜 점점 슬퍼지는가

 

30년 전 한 사내가 뉴기니의 해변을 걷다가 얄리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이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백인들은 짐이 많은데 우리 뉴기니인들은 짐이 적은 걸까요?” 뉴기니에서 짐이라는 단어는 재산이라는 뜻이다. 이 뉴기니인 얄리의 질문은 지극히 단순해 보였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사실 같은 지구에 살면서도 왜 누구는 부자로 살게 됐고 또 누구는 가난하게 살게 됐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는 그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그 해답은 <총,균,쇠>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쓰여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그는 이 책으로 1998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사진출처:KBS)

얄리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총, 균, 쇠이다. 즉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삶의 분균형이 생길 수 있었던 원인이 그들이 발명한 총과 그들이 보유한 균(그들에게는 내성이 생겼지만 원시부족에겐 치명적인 이를테면 천연두 같은),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벼려진 칼을 생산하게 해준 강철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생겨난 현재의 빈부가 거기 사는 부족들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유럽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미리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유럽인은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그렇다면 거꾸로 이들이 ‘운이 좋아’ 갖게 된 총, 균, 쇠에 무참히 쓰러져간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요구된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다시 읽히고 다시 주목되는 건 바로 이런 자각 때문일 게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 오면서 서구인들의 사실상의 정복 전쟁을 마치 신대륙 발견 같은 문명의 전파로 보는 그들 중심적인 시각에 대한 반성은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계속 되고 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다수와 소수의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의 논리로서 경쟁보다는 공존의 의미를 찾는 건 결국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이 초래한 전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우리가 이미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최근 들어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남극의 눈물> 같은 눈물 시리즈 다큐멘터리가 오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적인 새로운 시각으로 이 공간을 다시 바라보기 위함이다. 아마존에 들어간 이들은 도시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오지일 수밖에 없는 그 곳에서 벌거벗고 살아가는 원시 부족들의 삶이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 삶일 수 있다고 증언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도시의 침탈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그들의 삶을 아프게 포착해낸다. 그들의 눈물이 우리들의 풍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다시 자각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 프로그램 또한 이 슬픈 정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고 있다. 최근 이 프로그램은 일부 장면들이 과장되게 연출되고 때로는 섭외된 원주민들을 출연시켜 조작방송을 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으로 홍역을 겪기도 했다. 물론 <정글의 법칙>은 그 기획의도가 서구의 대표적인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어 그릴스의 프로그램이 제목처럼 인간과 자연을 여전히 대결구도로 그리고 있다면, <정글의 법칙>은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 다시 찾아내는 가족개념이라든가 원주민들이나 자연과 도시인이 어우러지는 공존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껴지는 비애감은 이러한 좋은 의도로 찾아간 카메라조차 거기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일 게다. 이미 도시의 바람을 쐰 원주민들은 과거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공간에 머물지 못하고 도시로 떠나기 일쑤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에 가서 목격한 것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살아왔던 공간에서 벗어나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과거에는 백인 침략자들을 위협하곤 했던 말라리아가 이제는 도시에 모여든(전염이 강해졌다)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현실이다. 아마도 수많은 방송사들이 이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재조명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어도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을 도시로 끌고 와 결국은 파괴하는 행위가 된 것은 아니었을지. 그들의 삶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혹여나 방송 프로그램으로서 도시인들의 시각과 욕망을 더 투영한 것은 아니었을지.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정글의 법칙>이 정글 속에서 발견한 미덕은 뭐든 문명의 이기를 덕지덕지 붙인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그것들을 떼어내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진짜 삶의 의미일 게다. 그들은 문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자연 뿐인 그 깊은 정글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네온사인 불빛대신 별을 보기 시작했고 자동차 소리 대신 새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이 소비되는 통에 그 가치를 알 수 없었던 한 끼 식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고, 따뜻한 집에 안락한 침대에 널브러져 진짜 안락의 의미를 모르던 우리들에게 그저 비 피하고 등 펼 수 있는 곳에서의 하룻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정글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시선으로 정글을 바라본 것일 지도 모른다. 진짜 정글은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그 자체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존의 눈물>에 이어 <남극의 눈물>을 찍고 돌아온 김진만 PD는 이 ‘조심스러움’에 대해 필자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희가 황제 펭귄을 찍을 때도 짝짓기부터 산란과 부화 과정을 쭉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으로부터 애정이 우러나더라고요. 어제 아팠던 펭귄들이 오늘 가보면 얼어 죽어가고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정말 마음이 아프죠. 규정 때문에 펭귄들이 알을 품을 때는 70m 안쪽으로는 접근 자체를 못해요. 그러니 만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죠. 만약 규정을 어겼다가는 바로 쫓겨납니다. 촬영하는 동안 호주기지 대원들이 내내 감시를 하고 있어요. 새끼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면 옷 안으로 넣어주고 싶고 대피소로 데려가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먹이고 싶었어요. 그러면 바로 원기를 찾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가슴이 미어져도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이 얘기는 지금 현재 원주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방적인 시선과 그 조심스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글의 법칙>의 논란 속에서 불쑥 불거져 나온 몇몇 이야기들은 또 다른 비극이 정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만든다. 실제로 원주민들은 이제 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위협적인 동작을 연출하고,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사냥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조금 심한 농담 속에는 감독이 “액션!”을 외치면 옷을 하나 둘 벗고는 원주민 차림(사실은 거의 벌거벗은)으로 카메라 앞에 나선다는 얘기까지 돌고 돈다. 물론 이것이 모두 사실일 리는 없을 테지만 어쨌든 카메라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원주민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 정복의 시대에 원주민들을 정글에서 몰아낸 것이 총, 균, 쇠였다면 이제 정보의 시대에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가 아닐까. 카메라는 심지어 그 카메라의 목적이 그들의 삶을 지켜내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그들의 삶 속에 도시의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도시에 그들의 삶조차 상품화하고 대상화시켜버린다. 따라서 카메라의 세례(?)를 받은 원주민들은 더 이상 과거의 원주민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진다. 카메라는 그래서 자본주의의 첨병인지도 모른다. 정글이나 오지마저도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 어느 것이든 상품화해버리는 자본의 속성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암울한 징후처럼 보인다. 이제 카메라는 어디든 들어가고 그래서 그 내밀한 정글을 파헤쳐 그들의 삶을 하룻밤의 오지 체험으로 바꾸고 있다. 또 그렇게 카메라를 따라 들어간 자본은 그 원주민들의 삶 또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많은 원주민들이 카메라가 영혼을 뺏어간다고 믿었던 것은 그만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 아닌가. (이 글은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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