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픽션', 겨털에 담긴 사회학
사진출처:'러브픽션'
여자들은 왜 겨드랑이 털을 미는 걸까. 그것이 깔끔해 보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보면 민망해서? 아니면 사회적 시선 때문에 귀찮아도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몸에 자라나는 일부일 뿐인데, 여자들의 겨드랑이 털은 언제부턴가 애초에 없는 것처럼 그 부위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그것은 단지 그 부위에서만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들의 뇌리 속에 들어있는 여자들의 이미지 속에서도 지워져 있다. 얼마나 그게 뿌리 깊으냐 하면, 우리는 심지어 '겨드랑이 털'이라는 말조차도 어딘지 민망해 '겨털'로 줄여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꼭꼭 숨겨지고 지워졌던 겨드랑이 털이 적나라하게 스크린 전면에 등장했을 때 느껴지는 그 당혹감은 아마도 그런 겨털에 내려진 저주(?) 때문일 게다. 하지만 곤혹스러워하는 하정우(구주월 역) 앞에서 '이게 뭐 어때서?'하는 포즈로 당당히 겨털을 드러내는 공효진(희진 역)을 보면서 무언가 통쾌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판타지와 금기를 넘어서 적나라한 실제 그 자체를 드러내면서도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 '러브픽션'은 하정우의 대사처럼 '겨털과 대화를 시도하는' 영화다.
겨털을 전면에 내세운 건, 그것이 우리네 사랑을 가장 적절하게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질 때 마치 말끔히 지워진 겨털처럼 만들어진 하나의 픽션을 그리지만, 차츰 사랑을 알아가면서 거기 한 올씩 자라나는 겨털 같은 실제와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한 구절처럼 로맨틱한 말들과, 닿으면 녹아내릴 듯한 달콤한 입술은 물론 그 수사처럼 하나의 픽션일 뿐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그 속으로 빠뜨린다. 하지만 단 하루를 만나는 것으로 사랑을 평생 기억하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 사랑이 픽션에만 머물 수 있을 것인가.
소설가로서 구주월은 이 픽션과 실제를 혼동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다. 그는 희진을 만난 후, 그 강렬한 첫 키스의 기억을 한 편의 소설로 그려낸다. 영화가 소설을 액자구성으로 갖고 있는 이유는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서이면서도, 픽션과 실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주월의 의식세계를 포착해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구주월은 현실에 만나는 인물들을 픽션 속으로 재배치시키는데 그 과정에 그의 욕망이 살짝 투영된다. 희진은 소설 속에서 어딘지 신비로운 인물로 그려지고, 구주월은 그 신비의 세계(?)를 탐문하는 사랑의 탐정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의 액자식 소설을 집어넣음으로써 영화는 쿨함을 유지한다. 즉 실제에서 희진의 쿨한 사랑과 정반대되는 구주월의 좀스러운 사랑은 그 감정을 액자식 소설을 통해 드러낸다. 따라서 두 사람이 실제에서 부딪치고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결코 질척이지 않는 뽀송뽀송함을 유지한다. 이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나, 상심을 표현할 때나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법이 없다. 문학의 한 구절을 원용하거나, 소설로 풀어내거나, 사진을 찍거나, 혹은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마음을 드러내는 식이다.
그런데 이 쿨한 사랑은 모든 걸 픽션처럼 숨기고 지움으로써 생겨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실제를 마구 드러내고 '그것이 뭐 어때?'하고 되묻는 쿨함이 그 안에는 들어 있다. 그래서 문학인 양 고상한 척 하던 구주월은 조금은 적나라하고 선정적인 인터넷 소설을 쓰는 자신을 인정하고, 희진은 사진에 남자들의 누드를 담아내며 그게 뭐가 잘못됐냐고 되묻는다. 우리가 꽁꽁 숨겨 두려했던, 그래서 하나의 픽션으로 만들려 했던 사랑이라는 놈의 '겨털'을 마구 드러내며 '이것 또한 사랑스럽지 않은가'하고 묻는 영화. 이것이 '러브픽션'이라는 영화를 한없이 사랑스럽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겨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유쾌해지는 영화, '러브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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