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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아이언맨', 이동욱의 분노 왜 소소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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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의 끝없는 추락, 동화에 머문 멜로의 한계

 

도대체 이건 무슨 얘기일까. KBS <아이언맨>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이 드라마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우화나 동화처럼 상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하면 등에 칼이 돋는 캐릭터. 주인공 주홍빈(이동욱)은 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차라리 분노를 상징화한 캐릭터다.

 

'아이언맨(사진출처:KBS)'

이러한 상징의 캐릭터화는 과장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이언맨>의 초반부는 주홍빈이라는 캐릭터의 분노를 심지어 보는 이들마저 불편할 정도로 시종일관 보여주었다. 그는 까칠함과 까탈스러움과 신경질적임이 무엇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아무런 설명 없이 까칠함의 대명사처럼 남자 주인공을 세운다는 건 모험일 수 있다. 어쨌든 멜로의 관계를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이처럼 시종일관 신경질적인 모습만을 드러내고, 때로는 동물처럼 코를 킁킁대며 여자의 냄새를 맡는 모습은 과장됐다 하더라도 보는 이들에게 불편함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쨌든 하나의 장치다. 이미 이 남자의 등줄기에서 칼이 돋는다는 캐릭터 설정은 좀체 이 남자가 여성에게 마음을 열기도 또 여성이 이 남자에게 쉽게 다가가기도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다. 마치 <미녀와 야수>처럼, 혹은 <헐크>처럼 그는 내재한 분노 때문에 주변사람들에게, 또 그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에게도 일정부분 불편함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과장된 또 한 명의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그녀가 바로 손세동(신세경)이다. 그녀는 시골 마을버스를 타고 가며 창밖의 풍경에 깜짝 놀라 야아-”하며 과장된 목소리를 내 버스에 탄 할머니들을 모두 웃게 만드는 소유자고, 할머니 한 명 한 명 내릴 때마다 짐을 내려주는 친절의 소유자다.

 

주홍빈이 찾은 옛 사랑의 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다 정신을 놓아버린 노모가 그녀에게 왜 이제 왔냐고 말하며 딸로 착각할 때,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딸처럼 울어줄 줄 아는 그녀다. 그녀는 분명 주홍빈처럼 과장되어 있다. 주홍빈이 분노를 표징하는 인물이라면 그녀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표징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면 이 <아이언맨>이라는 등에 칼이 돋는 캐릭터까지 등장해서 하려는 이야기가 분명해진다. ‘분노공감’. 즉 관념적으로 얘기하면 분노가 어떻게 공감을 통해 풀어져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주홍빈의 칼이 돋는 등을 안아주거나 그 등을 토닥여주는 손세동의 모습은 그래서 이 관념적이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형상화해주는 장면처럼 보인다.

 

<아이언맨>의 동화적인 상징은 그 자체로는 흥미롭다. 마치 이야기의 원형을 그려내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언맨>은 동화가 아니라 드라마다. 드라마는 좀 더 현실적인 장르다. ‘분노공감으로 바꾸는 이야기를 캐릭터화해서 보여준다면, 드라마는 여기에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배경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즉 지금의 시청자들이 왜 분노공감을 표징하는 캐릭터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봐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드라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분노의 이유가 너무 단순하고 사적이다. 사랑하던 옛 연인이 죽었고, 그 죽음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막연한 상황이 그 분노의 이유다. 만일 동화라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드라마라면 너무 소소해진다.

 

물론 분노라는 감정은 지금 시대의 정서임에는 분명하다. 경제적인 불평등, 몰염치한 사회, 툭하면 터지는 사건사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제 살길만 찾는 특권층들... 이 현실적인 분노들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떠다닌다. 그러니 이러한 사회적인 분노의 시대에 지극히 사적인 홍빈의 분노가 대중들의 눈에 들어올 까닭이 없다. 또한 이런 분노는 <아이언맨>이 세동을 통해 동화적으로 보여주는 밝음공감으로 끌어안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아이언맨>이 괜찮은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그저 소소한 이야기가 된 것은 그 이야기의 내적 완결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가 지금 현재 어떤 울림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서다. 그 분노에 조금은 사회적인 의미를 담아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