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의 가장 강력한 판타지, 쌍문동 골목
우리에게 골목이란 어떤 공간인가. 골목이 존재하려면 일단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집과 집들이 이어져 다닥다닥 붙어있어야 하고, 그렇게 이어진 집들이 두 줄 이상 있어서 그 사이에 공유공간을 두고 있어야 한다. 바로 그 공유공간이 다름 아닌 골목이다. 골목은 그래서 집과 집 사이를 수평적으로 연결해주는 기능을 한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아마도 8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방과 후 집에다 가방을 던져놓고 그 골목으로 뛰쳐나온 동네 아이들이 함께 다방구 같은 놀이를 했던 걸 기억할 게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골목에서 함께 놀던 아이들은 나이 들어 학교가 달라져도 여전히 그 골목을 매개로 친구이자 이웃처럼 지내기도 했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저녁 준비 하다 양념이 미처 떨어진 걸 깜박했다 치면 아이들 시켜 이웃집에서 빌려오는 건 일쑤고, 때때로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마치 제 자식 문제나 되는 듯 이웃들이 함께 걱정해주기도 했다. 공간은 사람이 점유하기 마련이지만 그 공간은 거기 점유한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80년대 이후 아파트들이 도처에 들어서고 부동산 과열로 인해 그것이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사야하는 공간으로 바뀌어나가면서 골목이라는 공간은 점점 사라져갔다. 수평적 공간을 이어주던 골목 대신, 어느 곳에 있는 어느 아파트 몇 평이 그 사람의 지위를 표징하는 수직적 지표가 되는 사회의 도래.
<응답하라1988>이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큰 판타지는 이렇게 사라져가는 골목이 아닐까. 이 드라마가 특이한 건 대단히 큰 사건을 다루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산타클로스를 믿는 한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온 이웃들이 반상회를 거듭하고 함께 얼음으로 된 눈사람을 만드는 그런 것이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물론 인물들의 끈끈함이 있지만 친구들이 함께 모여 마니또를 하고 어른들은 비오는 날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그런 장면들이 대단한 사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신 이 드라마는 그들의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일들을 툭툭 던져 놓는다. 이를테면 선우(고경표)가 팔목이 안 좋다는 엄마 대신 병뚜껑을 따주는 장면을 옆에서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라미란의 시선 같은 것이나, 엄마 없이 자라온 택이(박보검)에게 한없는 미안함을 소주 한 잔으로 토로하는 택이 아빠(최무성)의 이야기를 앞에 들어주며 “세상에 택이 아빠 같은 사람이 어딨냐”고 얘기해주는 선우 엄마(김선영)의 뭉클한 시선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선하고 착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함께 모여 한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웃들이 있는 곳. <응답하라1988>의 골목은 그래서 한참을 보다보면 그런 곳에서 살고픈 마음이 새록새록 들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저런 이웃이 있고 저런 친구들이 있고 저런 언니와 누나와 동생과 형들이 있는 곳이라면 얼마나 사는 맛이 날 것인가.
이 판타지를 <응답하라1988>은 쌍문동 골목이라는 공간 안에 채워 넣는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라 현실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복고라는 것은 결국 기억의 왜곡을 통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그러니 이미 싹 다 밀어져 빌딩과 아파트가 세워진 곳에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골목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우리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골목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그것이 <응답하라1988>의 가장 강력한 판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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