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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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갑질 세상, '욱씨남정기' 이요원 판타지

D.H.Jung 2016. 3. 2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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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씨>, 무엇이 이요원 같은 사이다 을을 탄생 시켰나

 

세상에 이렇게 속 시원한 을의 판타지가 있을까. 만일 을의 입장에 처한 분들이라면 JTBC 금토드라마 <욱씨남정기>의 옥다정(이요원)이라는 캐릭터가 말 그대로 사이다로 여겨질 만하다. 비록 결코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드라마의 한 순간 판타지라고 하더라도 이 사이다 캐릭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간 을로 살아오며 쌓인 울분을 톡톡 터트려주고 있으니.

 


'욱씨남정기(사진출처:JTBC)'

황금화학 팀장으로 있다가 러블리 코스메틱 본부장으로 간 옥다정이 탐탁찮은 황금화학 김환규 상무(손종학)는 구매팀장을 시켜 하청업체인 러블리 코스메틱을 괴롭힌다. 주문을 했다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반품시키고 심지어 생산을 중단하겠다는 으름장을 놓는다. 그런 상황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옥다정에게 러블리 코스메틱의 한영미 과장(김선영)은 이렇게 말한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시는 건지. 전형적인 하청업체 길들이기잖아요. ‘옥다정 너 까불지 마라.’ 그런 뜻 아닐까요?”

 

이것은 아마도 전형적인 갑을관계에서 이른바 관행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갑질일 것이다. 한 과장에게 이런 상황은 너무나 익숙하다. 자존심을 꺾지 않고 맞서는 옥다정에게 그녀는 을의 생존법을 얘기한다. “러블리에 왔으면 러블리의 방식을 따르셔야죠. 갑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을은 늘 손해를 감수한다. 갑의 만족이 곧 을의 만족이다. 이게 바로 갑질에 대처하는 을의 생존법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옥다정은 이에 승복하지 않으려 한다. 직접 황금화학 구매팀장을 찾아간 그녀는 일방적인 반품처리와 단산 운운하는 것이 갑의 횡포라고 맞선다. 그런 그녀에게 구매팀장은 대놓고 을이면 알아서 을답게 굴라고 말한다. “이봐요 옥본! 사태파악이 그렇게 안돼서 어떡하나. 이젠 황금화학 팀장이 아니라 러블리 코스메틱 본부장이잖아요! ?! 하청은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원칙 따지다 러블리는 이 바닥에서 일 못한다는 걸 알아야지.”

 

아마도 현실이었다면 그 정도에서 무릎을 꿇었을 일이다. 심지어 러블리 코스메틱의 남정기 과장(윤상현)은 그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싶은 걸 지키는 게 진짜 자존심이라고 말한다. “직원들은 자존심 보단 밥그릇 지켜주는 상사를 바란다는 남 과장의 이야기가 보통의 을들이 가진 정서이니 말이다.

 

하지만 옥다정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는다. 사우나에서 다른 하청업체 사장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김상무를 찾아가 러블리와의 하청계약을 모두 끊어 달라고 도발한다. 무릎 꿇으러 온 거 아니었냐며 황당해 하는 김상무에게 옥다정은 꿇으러 온 게 아니라 끊으러 온 겁니다라고 대꾸하고, “너 지금 나랑 진짜 해보자는 거야?”라는 위협에도 이렇게 속 시원한 한 방을 날린다. “해보자는 게 아니라 안하겠다는 겁니다. 앞으로 황금에서 내는 주문은 그게 뭐가 됐든 단 한 건도 받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건 판타지다. 세상에 이런 을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다정이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을의 입장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필이면 남자들만 득시글대는 사우나라는 공간에 여자의 몸으로 들어가 모든 계약의 해지를 통보하는 옥다정의 모습을 이 드라마가 그려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우나란 공간이 어떤 곳인가. 맨몸으로 들어가지만 관계라는 미명하에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갑질이 종종 벌어지는 곳이 아닌가.

 

세상이 오죽 갑질 하는 이들로 넘쳐나면 이처럼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속 시원한 을의 판타지를 원하게 된 걸까.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저 잠깐 동안의 판타지라고 해도 이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밥그릇 때문에 자존심을 꺾기보다는 자존심을 지켜 밥그릇도 지켜내는 옥다정이 몹시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