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녀> 최지우, 그녀가 캐리어를 끄는 까닭
“근데 꼭 뭐여야만 하는 겁니까? 아무 것도 아니면 안 되는 거냐구요? 꼭 변호사, 검사, 의사 이런 게 되야 하는 거냐구요?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 안 되는 거냐구요?” MBC 월화드라마 <캐리어를 끄는 여자>에서 차금주(최지우)는 직업을 묻는 형사에게 그렇게 되묻는다. 바람 난 남편 때문에 집을 나와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그녀는 왠만하면 쿨하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으려 했다. 하지만 남편의 내연녀가 아기까지 가진데다 너무나 뻔뻔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모습에 분노해 남편의 차를 박살낸 죄로 경찰서에 오게 된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사진출처:MBC)'
조서를 꾸미는 형사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차금주의 말에 금세 목소리 톤이 바뀐다. “그럼 변호사님이셨어요?” 그러나 변호사 아니라는 말에 다시 말투가 바뀐다. 비서도 경리도 아니라는 차금주에게 계속 직업이 뭐냐고 추궁하자 그녀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누군가의 아내이자 바람 핀 남편의 아기가 곧 태어날 거란 사실에 분노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될 자격이 있다는 걸 입증할 방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 짧은 장면은 <캐리어를 끄는 여자>가 갖고 있는 현실 인식이 담겨 있다. 무언가 간판을 요구하는 사회. 그래서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 그 간판을 따내야 하는 현실. 법정드라마가 주인공인 차금주라는 인물을 변호사나 검사가 아닌 사무장으로 세운 건 그래서다. 그녀는 로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사실상 해결하는 인물이다. 찾아내지 못해 난항을 겪었던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고 거짓 증언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증인의 마음을 돌려 양심선언을 하게 만들기도 하는 인물.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실제적인 역할을 하는 차금주는 사실상 진짜 현실의 무대에서는 뒤편으로 밀려나 있다. 변호사가 있어야 사무장이라는 자신의 존재가 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에 지금껏 이복동생인 박혜주(전혜빈)를 변호사로 만들어 뒤에서 실제로 일을 해왔지만, 그녀는 박혜주로부터 사무장이라는 처지를 조롱받는 입장에 처해 있다. 이겨도 그녀의 사건이 되지 못하는 차금주의 아픈 처지를 박혜주는 가시 같은 말로 콕콕 찔러댄다.
이것은 일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헌신해왔지만 그 남편은 그녀가 감옥에 다녀온 사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 살림을 차린다. 사실상 자신이 다 꾸려온 집안이지만 그녀는 내연녀가 떡 하니 자리한 집을 나와 고시원에서 살아간다. 일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그녀는 그녀 스스로 자조하듯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녀를 경찰서에서 빼내 집까지 바래다준 함복거(주진모)에게 그녀가 “자고 갈래요?”라고 불쑥 묻는 질문에는 그녀의 절실함이 담겨있다. 자신의 존재감을 그렇게 해서라도 느끼고 싶다는 것.
그녀가 늘 뒤편으로 밀려난 까닭은 이른바 ‘시험 공포증’으로 고시에서 연거푸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호사나 검사가 아니라도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사무장이라는 일에 깊은 만족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못하다. 그녀 말대로 변호사, 검사, 의사가 아니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그녀를 세상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렇게 번드르르한 간판을 가진 직업이 아니라도 실제로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거기서 능력을 발휘하는 삶에 대한 재조명이다. 도대체 직업의 위계라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법정에서 변호를 하든 그 변호를 할 수 있게 현장에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든 그건 똑같은 일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
그녀의 간판이 아니라 능력을 봐 주는 두 인물, 함복거 대표와 마석우(이준) 변호사와의 멜로가 판타지를 주는 건 그래서 단순한 남녀 관계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녀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그 시선에서 만들어지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의 일과 사랑이 얽혀지는 그 지점에는 그래서 간판 사회에 대한 작가의 날선 비판 의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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