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2’와 유홍준·윤선도·정약용·하멜의 평행이론
그들이 이 땅의 끄트머리 해남과 강진에서 발견한 건 뭐였을까. tvN <알쓸신잡2>가 해남과 강진에서 벌인 지식 수다의 향연은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했다. 그것은 이 곳에 특히 유명한 분들의 삶의 족적이 남아 있어서다. 가까이는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첫 장을 연 곳이고, 조선으로 가면 윤선도, 정약용이 유배를 갔던 곳이다. 심지어 조선에 표류되어 들어온 네델란드인 하멜이 유배되어 지낸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유명한 이름들이 모두 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 얼마나 이야깃거리도 많을 것인가.
그런데 이게 우연이 아니다. 해남과 강진에 이렇게 유명인사들의 족적이 남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곳이 이 땅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이 곳에서 시작한 이유로 ‘서울 중심’, ‘도시 중심’의 사고방식을 벗어나기 위해 변방을 선택했다고 했다. 물론 그 변방 중에서도 해남과 강진을 택한 건 그 곳에 윤선도, 정약용, 김정희 같은 분들의 삶의 흔적이 문화로 남아있어서다. 윤선도나 정약용 그리고 하멜의 흔적이 남은 것도 그 곳이 땅의 끄트머리로서 유배지를 상징하는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즉 이처럼 해남과 강진은 어찌 보면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그 절망을 안고 내려오게 된 소외의 지역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윤선도도 정약용도 저마다 삶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황교익은 직접 들어가 본 보길도를 통해 윤선도가 당대의 ‘욜로’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오히려 유배된 그 곳에서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을 만들며 유유자적했던 것.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는 어부사시사 같은 절창은 이러한 땅끝의 유배지가 오히려 제공하는 변방의 자유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정조의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던 조선의 다빈치 정약용은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이 곳으로 유배되지만 그 역시 다산초당에서 제자들과 함께 500여권에 달하는 저작을 남겼다. 만일 그가 중앙에서 정치 관료로서 승승장구의 길을 걸어갔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런 빛나는 지식의 보고들을 쏟아낼 수 있었을까.
이것은 나가사키를 가려다 표류되어 조선에 들어와 13년 간을 머물다 간 하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주도에 표류해 들어왔지만, 억류되어 지낸 곳은 바로 강진이었다. 그 곳에서 동네주민들과 교류했던 그 경험들은 고스란히 훗날 하멜표류기 속에 녹아들었다. 그들에게는 이 끄트머리 동네에서 가졌던 절망적인 삶의 순간들이 훗날 빛나는 저작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
<알쓸신잡2>에 기꺼이 전화통화를 통해 해남과 강진에 대한 남다른 소회를 얘기한 유홍준 교수 역시 이 곳이 가진 땅끝이라는 상징성이 오히려 그의 발길을 잡아 끈 것이었고, 그것은 <알쓸신잡2>가 그 곳을 찾아 느낀 것과 다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해남 땅끝마을에 서 있는 봉수대에서 저 아래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저마다 다른 시각의 생각들을 가졌을 것이다.
봉수대를 다녀온 유현준 교수는 우리네 삶의 마디를 떠올리며 대나무의 마디 구조가 어째서 튼튼하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인가를 설명한다. 우리네 삶이 사실은 끊김 없이 이어져 있지만 매해 새로움을 다지는 마디를 설정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대나무의 건축구조학을 통해 설명한 것.
그러자 장동선 박사는 봉수대를 보며 자신이 떠올린 또 다른 ‘마디’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인간의 신경세포가 가진 마디 구조와 똑같다는 것. 그러한 마디 구조가 가장 빨리 신호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유현준 교수는 봉수대가 최초의 텔레커뮤니케이션 체계라고 했다. 이러한 소통체계가 문명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며 로마의 수로체계와 파리의 상하수도체계 그리고 뉴욕의 전화체계가 생명체 진화와 같다고 말한다. 로마가 동맥 네트워크라면 파리는 정맥네트워크 그리고 뉴욕은 신경세포 네트워크라는 것.
땅끝마을에서 봉수대를 통해 소통체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대목은 이 끄트머리 마을에서 느껴졌을 절망감을 희망으로 바꿔준다. 결국 변방과 중심을 나누는 그런 기준들은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무화될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멀리 있어도 빠른 소통체계가 있다면 공간의 의미는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알쓸신잡2>가 해남과 강진에서 나눈 일련의 이야기들이 신비롭게 다가온 건, 그 지역이 가진 이러한 특징과 그래서 그 곳에 가게 된 사람들이 남긴 위대한 삶의 행적들, 그리고 그것들이 그렇게 멀리 와 있다는 자신들의 고립감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들이라는 게 모든 이야기, 여행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졌기 때문이다. 마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그 오지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을 다시 오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번 해남과 강진에서의 <알쓸신잡2>는 이 프로그램이 어떤 지역과 그 곳으로부터 끄집어내지는 지식의 수다가 어떻게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가’하는 걸 가장 잘 보여줬다. 지역은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고, 그 사람들의 삶이 지역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지만 지역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은 공간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수다가 가능해진다. 이 땅끝마을에서 <알쓸신잡2>와 유홍준, 윤선도, 정약용, 하멜의 평행이론 같은 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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