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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흉내만 내도 좋을 분"..'알쓸3' 유시민이 존경심 드러낸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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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3’, 유시민이 김성환·장기려의 삶에서 감명 받은 까닭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렀던 관저나 집무실, 응접실 이런 데 보다 나는 밖에서 본 김성환 화백의 그림이 훨씬 더 강렬한...” 부산을 찾아간 tvN 예능 <알쓸신잡3>에서 유시민은 우리가 고바우 영감을 그린 화백으로 알고 있는 김성환 화백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알고 보니 김성환 화백은 19살 때 전쟁을 목격했던 걸 그림으로 남겼고, 당시 종군화가로도 활동했던 분이었다. 그가 남긴 그림에는 포연이 올라오는 전장과 공중폭격을 하는 비행기 같은 당대의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유시민은 그 중에서도 낙산에서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청량리 쪽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라며 “공포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유희열은 김성환 화백이 “대단한 화가였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알쓸신잡3>가 들여다 본 부산은 우리가 흔히 여름 인파들이 몰리는 해운대나 광안리 해수욕장, 회를 먹기 위해 가던 자갈치 시장이 아니었다. <알쓸신잡3>는 부산이 6.25 한국전쟁이 만든 도시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으로 피란민들이 들어오면서 전쟁이 끝난 후까지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던 곳이 바로 부산이었다. 우리가 영화 등에서 자주 봐왔던 40계단은 당시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이 갈 곳 없어 엉덩이라도 붙이고 앉았던 곳이었고, 그래서 피난 중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이들이 애타게 서로를 찾던 곳이었다. 

부산은 그 많은 상처 입고 갈 데 없는 피란민들을 그나마 살 수 있게 넉넉히 안아주던 곳이었다. 당장 몸 누일 곳이 급했던 시절, 심지어 아미동 일본식 묘지에는 천막치기 쉬워 피란민들의 새로운 거처가 되었다. 지금도 아미동 비석마을이라 불리는 그 곳에는 여전히 그 때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묘지였던 곳은 그 위에 집이 지어진 채 지금도 남아 있었고, 비석들은 축대 등에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연탄 아궁이에서 뼈가 나와 산에 묻어주고 제를 지내기도 했다는 아미동 사람들은 그래서 그 이름 모를 일본인들을 위한 술 한 잔을 올리곤 했다고 한다. 김진애 교수는 “죽음과 시간의 켜 위에서 인간의 생명력을 키워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며 “인간이 설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유시민이 김성환 화백의 그림이 대통령 관저보다 더 강렬하다고 얘기한 것이나, 김진애 교수가 아미동 비석마을을 보며 어떤 유명한 도시설계가가 한 것보다 더 놀라운 삶의 터전이 가능했던 게 민초들의 ‘생명력’이라고 말한 부분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사실 훗날 밝혀진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오들을 들여다보면 과연 이게 한 나라의 지도자가 맞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북한군이 내려오기도 전에 먼저 피난을 가면서 아무 문제없으니 그냥 그 곳을 지키라 녹음 방송을 내보내고, 심지어 한강다리를 무너뜨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던 일들... 하지만 그 난리통에도 위대한 민초들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바로 김성환 화백의 그림이고, 아미동 일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흔적들이었다. 

김진애 교수는 그 전시관에서 봤던 당시 교사로 재직했던 신경복 선생의 일기를 이야기했다. “그 안에도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판잣집부터 이런 거 많이 보여주잖아요. 그 중에서도 감동적인 것 하나가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이 십 년 동안 그 모든 기록을 다 쓰신 거예요. 부산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안네프랑크 일기 쓰듯이 그렇게 하신 분들이 있구나 생각을 하니까 너무 고맙더라고요.” 신경복 선생의 ‘학원일기’에는 전쟁 통에 벌어졌던 일들이 매일매일의 기록으로 빼곡하게 담겨져 있었다.

유시민이 부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 이야기도 꺼냈다. 북한에서 살다 월남해 부산에서 한 평생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돌아가신 그를 유시민은 “따라 하기만 해도 좋을 분”이라고 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분처럼 성자에 가까운 삶을 사신 분이 없다”는 유시민은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처방전으로 내렸던 장기려 박사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너무 못 먹어 생긴 병이라며 환자에게 닭을 사먹으라 돈을 주는 처방전을 내렸다는 것. 가난한 환자들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납하기도 했고, 딱한 환자들이 밤에 도망갈 수 있도록 병원 뒷문을 열어주기도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평생 병원이 없는 무의촌을 다니며 진료봉사를 했고, 처음으로 민간 의료보험조합을 만들기도 했던 분이 바로 장기려 박사였다. 훗날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도 먼저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장기려 박사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볼 것이라는 이유였다. 평생을 그렇게 봉사하며 살았던 장기려 박사가 머물던 곳은 작은 옥탑방이었다. 유시민은 장기려 박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흉내만 내도 좋을 분”이라며 극찬을 덧붙였다.

<알쓸신잡3>가 부산에서 발견한 건 6.25 한국전쟁이 남긴 흔적들이었지만, 그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고 온기를 유지하게 한 이들은 ‘위대한 민초들’이었다. 전장을 따라다니며 전쟁의 참상을 그림으로 남긴 김성환 화백이나, 매일매일 일기로 당시의 기록을 남긴 신경복 선생, 평생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신 장기려 박사나 저 아미동 일대에서 저마다 살아가기 위해 죽음의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던 이름 모를 동네 사람들. 위대한 그들이 있어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걸 <알쓸신잡3>는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사진: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