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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펜트하우스' 죽고 또 죽고.. 개연성 따윈 필요 없고 자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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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 사람은 없고 작가가 만든 사이코패스들만 넘쳐난다

 

죽고 또 죽고... 벌써 몇 명이 죽은 걸까. SBS 월화드라마 <펜트하우스>는 매회 인물이 죽어나간다. 드라마 시작부터 헤라팰리스 고층 건물에서 누군가에 의해 추락 사망하는 민설아(조수민)로 문을 열었다. 민설아가 떨어질 때 전망엘리베이터를 탄 심수련(이지아)은 그와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민설아는 이 주상복합의 상징처럼 세워진 헤라 조각상 위로 떨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 사망한다.

 

아마도 이런 시작은 <펜트하우스>가 거대한 욕망의 표상처럼 보이는 헤라팰리스가 민설아 같은 이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 장면에 그런 의미를 담기보다는 이곳에 살아가는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이 벌이는 폭력들을 병치함으로써 시청자들의 뒷목을 잡게 만든다.

 

그 폭력들은 지독할 정도로 상투적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걸 이용해 더 큰 돈을 벌고(물론 여기에도 서민들의 피가 깔려 있다), 불륜과 향락에 빠져 살아간다. 그들만의 네트워크 속에서 아이들도 실력이 아닌 핏줄과 연줄에 의해 성패가 갈라지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기회는 박탈된다. 심지어 능력으로 그 곳에 들어오려는 민설아 같은 인물은 감히 그 세계를 넘봤다는 이유로 집단 폭행을 당한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 이유라고 하면 저들이 특권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래서 특별한 이유 없이 저지르는 폭력의 연속은 그들의 악행을 태생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이코패스다. 없는 이들은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밟히는 이들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오윤희(유진)의 트로피를 빼앗고 그가 더 이상 성악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천서진(김소연)은 심수련의 남편 주단태(엄기준)와도 불륜에 빠지는 '도둑년'이다. 하지만 주단태는 더한 인물이다. 심수련의 친딸인 민설아를 다른 아기와 바꿔치기 하고, 그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아기를 심수련에게 친딸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지자 그 산소호흡기를 자신이 떼어버린다.

 

죽은 민설아의 사체를 그가 사는 동네로 옮겨 유기하고 그 집에 불까지 내 자살로 위장한 주단태는 그 지역에 재개발이 이뤄질 거라는 정보를 얻고는 그 사건으로 가격이 폭락한 그 집을 되 사려고 하는 인물이다. 그는 누군가를 제 손으로 살해하는 일이나, 사체를 유기하는 일, 나아가 자신이 하는 재개발 사업으로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

 

<펜트하우스>에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이코패스들만 넘쳐난다. 그들에 의해 불쌍한 약자들은 억울하게 죽어나간다. 그걸 보며 분노하는 시청자들은 심수련이나 오윤희 같은 인물들이 그들에게 처절하게 응징하고 복수하는 걸 보고 싶어진다. 김순옥 작가가 지금껏 해왔던 '가족 복수극'의 클리셰들이 여기서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그러니 등장인물들은 이 가족복수극의 계획된 '공분의 스토리텔링 틀 속'에서 다소 허망하게 죽어버린다. 조상헌(변우민)은 허무하게 자기 집 2층에서 추락사하고, 그와 몸싸움을 벌인 윤태주(이철민) 역시 육교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매회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살인, 사체유기 등)하다 보니 시청자들로서는 이 드라마의 이런 자극적 설정들이 하나의 게임처럼 둔감해진다. 처음에는 놀랍지만 차츰 누가 죽어도 그리 놀랍지 않은 느낌이 되어버린다. 드라마가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더 많은 죽음들이 필요하다. 앞으로도 이 죽음의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

 

<펜트하우스>에서 인물들은 그래서 작가가 고안해 놓은 자극의 틀을 위해 소비되는 소모품 같은 느낌을 준다. 개연성은 자극에 가려지고 갈수록 현실감을 잃어간다. 사실 이렇게 계속 어이없는 죽음들이 이어진다는 것 자체가 개연성과 현실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그래서 개연성도 없고 인물들도 소모될 뿐,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 <펜트하우스>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거기에는 가난에 대한 지독함 혐오와 죽음에 대한 경시 같은 그림자들이 부지불식간에 들어 앉아 있다.

 

물론 작가가 의도하는 건 자극적인 스토리와 이를 통해 얻어지는 시청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극과 시청률이 교환되는 과정에서 인간이나 생명에 대한 가치들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그저 스토리이고 드라마일 뿐이라고? 아니다. 스토리는 가상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갈 것인가를 에둘러 알려주는 공공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게 별거 아니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시청률의 뒤편에서 어른거리는 건 돈 냄새다. 돈이 되면 뭐든 용서된다는 것. 그건 <펜트하우스> 속 헤라팰리스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다. 드라마는 그게 잘못됐다는 걸 복수극의 형태로 그려내려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 전개 과정은 마치 헤라팰리스 사람들의 생각처럼 돈이 되면(시청률이 되면) 다 용서된다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사진: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