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서숙향 작가라 다르다... KBS주말극에 쏠린 관심
“누가 지갑 잃어버렸다고 신고가 들어오면 그 지갑 찾았다고 금방 파출소로 가져고 들어오는 동네가 이 동네야.” KBS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다리미 패밀리’는 순찰을 돌며 이 동네의 청렴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찰들의 목소리로 문을 연다. 동네 이름이 청렴이고, 이제 이 주말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다림(금새록)이네 가족이 운영하는 세탁소 이름도 ‘청렴세탁소’다. 좀도둑 한 번 안들었다는 동네. 그 세탁소를 해온 다림의 할머니, 할아버지인 안길례(김영옥), 이만득(박인환)은 실제로 건조기에서 돈이 나오자 챙기기보다는 챙겨주려 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청렴은 계속 될 수 있을까. 다림이네 가족은 다림의 아버지가 1차 사시 패스를 수석으로 한 후 연거푸 떨어지면서 가세가 기울어진다. 무려 10차 재수를 하며 희망고문을 하던 다림의 아버지는 결국 병이 들어 사망하고, 다림의 엄마 고봉희(박지영)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에 노시부모들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불행은 그게 끝이 아니다. 다림은 퇴행성 희귀 망막염에 걸려 어릴 때 2.0이던 시력이 0.02가 됐고 점점 주변 시야가 좁아지다 실명할 위기에 처했다.
그렇지만 다림이 살아오면서 느낀 가장 큰 고통은 ‘희망고문’이었다. 아버지의 희망고문이 만들었던 가족들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 심지어 실명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겠습니다”라며 “엄마한테는 말씀하지 말아달라”고 의사선생님에게 말하는 인물이다. 그는 심지어 대학시절 좋아해 하룻밤을 보낸 서강주(김정현)에게조차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면 그에게 기대하게 되고 기다리게 될 거라며.
하지만 그렇게 포기가 더 쉽다고 해도, 실명을 벗어날 수 있는 효과 있는 주사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희망을 갖지 않을 수가 있을까. 주사를 맞은 이들이 모두 시력을 되찾았다는 의사의 말에 반색하지만 그 주사비용이 한쪽에 4억씩 무려 8억이라는 말에 다림은 또다시 희망고문에 빠진다. 안 하던 로또를 사서 긁고 또 긁으며 실낱 같은 희망을 걸어보지만 그게 될 턱이 없다. 포기했다 생각했던 희망이 만든 고문 속에 또 다시 빠져든 것이다.
‘다리미 패밀리’에서 다림이네 가족의 짧은 서사는 의미심장하다. 그건 우리가 살아온 삶의 변화를 대변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좀도둑 한 번 안들 정도로 청렴하고 지킬 건 지키던 동네는 세월이 흘러 변해간다. 다림이네 가족이 그러한 것처럼, 아들의 성공에 희망을 걸기도 하며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아왔던 우리네 서민들의 삶은 어찌 된 일인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런데도 청렴하게만 살 수 있어? 드라마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물론 ‘다리미 패밀리’는 이러한 불행의 연속을 무겁게 그리지는 않는다. 발랄하고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코미디로 담아낸다. 그간 ‘파스타’부터 ‘질투의 화신’ 같은 로맨스와 코미디를 그려온 서숙향 작가의 공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문제의식을 잊지 않는 작품의 전개가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이게 KBS 주말드라마일까 싶은 첫 회의 색다른 풍경이다.
사실 그간 방영됐던 KBS 주말드라마들의 첫 시작을 생각해보라. 거의 문법에 가깝게 극적 사건들이 빵빵 터지고 출생의 비밀의 밑거름을 깔아 놓는 식의 클리셰들도 꽉꽉 채워져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번엔 좀 다르겠지’ 하다가도 ‘또 시작됐군’ 하면서 기대감을 서서히 접게 되는 ‘희망고문’을 반복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면서 KBS 주말드라마는 시청률조차 뚝 떨어지는 추락을 겪었다.
‘다리미 패밀리’는 바로 그런 상황에 절치부심한 KBS가 내놓은 새로운 결과물이다. 먼저 서숙향 작가가 주말극에 처음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관심을 쏠리게 만든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코미디적 상황 그리고 달달하고 시크한 멜로까지 줄줄이 풀어내는 작가가 아니던가. 그가 시도하는 주말극이니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첫 회가 슬슬 풀어낸 작품의 문제의식은 역시 서숙향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가장 좋은 건 과도하게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강박이 별로 없고, 하려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빌드업하려는 작가의 뚝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완성도를 위해서 주로 50부작으로 기획되던 주말극이 이번에 36부작을 내세웠다는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괜스레 고무줄처럼 질질 끌려 늘리기보다는 그만큼 밀도있게 작품을 풀어나갈 수 있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완성도가 아니면 이제 시선도 주지 않는 현 시청자들의 달라진 눈높이에 조응하는 선택이다.
희망고문은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리미 패밀리’의 다림이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이 던지는 질문이고, 열심히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우리네 서민들이 다시금 던져보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또한 그간 난맥상이었던 KBS 주말드라마를 그래도 관심있게 봐온 시청자들의 질문이 될 것이다. 과연 ‘다리미 패밀리’는 그동안 구겨져온 KBS 주말드라마의 주름과 무너진 자존심을 깨끗하게 다려줄 수 있을까. 모쪼록 그 질문의 답이 희망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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