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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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세상? 음악이 있잖아!

D.H.Jung 2008. 12. 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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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불황 속 음악전문프로그램들의 특별한 선택

힘겨운 삶에 노래만큼 위안을 주는 게 있을까. 최근 음악전문프로그램들의 ‘선택’을 보면 경기불황에 지친 대중들에게 음악이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 지를 확인하게 된다. 보여주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들려주는 ‘이하나의 페퍼민트’로 바뀐 것이나, EBS ‘스페이스 공감’ 같은 작은 공간 속의 음악으로 대중들을 초대하거나, ‘라라라’처럼 아예 대중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것은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 선택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지향은 하나, ‘소통과 공감’이다.

윤도현이 가진 록커로서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힙합과 록밴드 같은 ‘한번 놀아 보자!’는 분위기가 러브레터에 있었다면, ‘페퍼민트’는 고스란히 ‘감상하고 느껴보자’는 분위기가 스며있는 이하나의 ‘들어주는 귀’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윤도현이 게스트들과 같은 가수의 입장에서 얘기를 했다면, 이하나는 노래를 사랑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게스트들을 만난다. 바로 이 점은 윤도현과 이하나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다. 두 음악프로그램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공연되는 음악은 같다고 하더라도 ‘들어주는 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진행자라기보다는 관객과 거의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이 ‘들어주는 귀’가 들어주는 음악은 좀 더 ‘듣는 음악’으로 대체되었다. ‘크라잉넛’이나 ‘노브레인’ 같은 가사 그 자체보다는 강렬한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던’ ‘러브레터’는 이제 ‘장기하와 얼굴들’ 같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 가사들까지 마음속에 콕콕 박히는 음악들을 ‘들려주었다.’ 대형 라이브 공연장 같은 넓이의 ‘러브레터’의 무대가 ‘페퍼민트’로 와서 소극장 같은 크기로 줄어든 것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무대가 작아질수록 관객과 소통하는 귀는 더 열려진다.

EBS의 ‘스페이스 공감’은 바로 눈앞에서 대면하는 이 라이브의 공감을 극대화한 음악프로그램이다. 이 공간 속에 들어가면 주류이던 비주류이던 비슷한 색깔을 가지게 된다. 그동안 생소하게만 들어왔던 재즈 연주자들의 음악조차 이 속에 들어가면 대중들과의 직접적인 접촉, 즉 숨소리가 들릴 듯한 거리에서 건반과 기타 줄에 닿는 손가락 하나하나가 생생한 그 특별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스페이스 공감’은 그 프로그램 이름에서 뉘앙스를 잡아낼 수 있듯이 공간이 같은 음악이라도 어떤 다른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이것은 ‘페퍼민트’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MBC에서 새롭게 시작한 ‘라라라’의 경우는 어쩌면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경우다. ‘라라라’에서는 관객이 없고 따로 만들어진 무대가 없다. 녹음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가수 혼자 서서 노래를 할 뿐이다. 대신 카메라는 좀 더 밀착돼서 가수의 노래 하나하나를 얼굴 표정과 동작에서까지 포착하려 한다. 기존 음악프로그램들이 가지고 있던 관객을 통한 우회적 공감을 벗어나 카메라를 통한 대중들과의 직접적인 공감을 시도하는 것. 라디오의 음악이 TV 쇼 프로그램의 음악보다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내 귀에 직접 대고 속삭이는 듯한’ 그 음악을 좀 더 개인적인 공감으로까지 끌어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라라라’는 가수의 밀착된 모습을 삽입함으로써 시각적인 직접소통의 효과까지 만들어낸다.

최근 음악프로그램들의 한 경향은 ‘대중들과 좀 더 가까이’로 표현될 수 있다. 집단적인 놀이로서 음악에 참여하던 시대는 점점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 대중들은 좀 더 음악을 듣고 공감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아마도 이것은 작금의 어려운 상황이 대중들로 하여금 노래에서 어떤 위안을 찾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부응하듯 음악프로그램들은 성큼 대중들 앞으로 더 다가왔고 그만큼 공감의 폭도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