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에서 몸이 의미하는 것
'추노'의 몸은 남자가 봐도 멋지다. 초콜릿 복근이란 표현이 선정적이라고 해도 딱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멋진 몸. 그 멋진 몸이 때론 공중으로 붕 떠오르고, 때론 뛰어내리며, 때론 바람을 가르듯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리고 이 예민한 짐승의 눈을 가진 레드 원 카메라와 강렬한 배경 음악은 이 몸의 동작들을 우아하고 리드미컬하게 만든다. 이건 액션이 아니라 무용에 가깝다. 그 속에서 몸은 멋지다 못해 아름답다.
한바탕 도망친 노비를 잡고 여각으로 돌아온 추노꾼, 최장군(한정수)이 땀에 젖은 몸을 씻는 그 모습을 훔쳐보며 설레는 마음은 큰 주모(조미령)뿐만은 아닐 것이다. 장군의 몸이 되고 싶었으나 한낱 노비 사냥꾼의 몸이 되어버린 그 몸은 장군의 갑옷은 입지 못했어도 갑옷 못지않은 멋진 몸을 갖게 됐다. 최장군의 몸은 냉철한 판단력에 맏형으로서 대길(장혁)과 왕손이(김지석)를 생각하는 그 따뜻한 캐릭터처럼 군더더기 없이 멋지다.
독종 중의 독종으로 불리는 대길의 몸은 슬프다. 한때는 양반집 자제로 백면서생의 뽀얀 살결을 가졌을 그 몸은 이제 여기저기 난 칼자국을 훈장처럼 달고 있다. 그는 애꿎은 자신의 몸에 벌을 주고 있는 중이다. 그가 좋아했던 노비 언년이(이다해)의 오빠에 의해 멸문지화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찾아다닌다는 그 사실이 그를 인간 말종 추노꾼의 삶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몸은 상대방을 잔혹할 정도로 무표정하게 가격해대지만, 뒤에서는 자신이 잡아온 노비를 몰래 빼내 풀어줄 정도로 가슴 한 구석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한다. 그의 몸에는 분노와 자포자기와 연민이 뒤엉켜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가 되어버린 이 혼돈의 애증 속에서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언년이를 찾는다. 그것이 복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 채.
왕손이의 몸은 한 순간의 쾌락을 좇는다. 몸은 그저 늙어가는 것. 그러니 살아있을 때 즐기기 위해 그 몸은 쉴 새 없이 여자를 찾는다. 아직 젊기 때문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 순간을 살아온 몸에 마치 상이라도 주듯. 젊은 치기로 번득이는 이 몸은 그래서 웃긴다. 그 몸이 추구하는 방탕한 삶이란 한낱 한 때의 좌충우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청춘이 주는 시행착오 속의 몸은 그래도 유쾌하다.
'추노'의 멋진 몸, 슬픈 몸, 웃기는 몸은 이 시대 민초의 삶을 설명하지 않고도 보여준다. 늘 머리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몸의 운명. 그 몸이 생채기를 입어도 허허 웃으면서 다시 아물고 더 팽팽해지면서 멋진 몸이 되는 것은 몸의 항변인 셈이다. 세상에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하나 뿐인 민초들의 삶을 보여주는 그 몸은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힘겨운 노동의 상처를 오히려 힘으로 아름다움으로 전화시키는 몸은 그래서 이 땅의 민초들을 그대로 닮았다. 그들의 살갗이 칼날에 찢기고, 그 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그 상처가 아물어 더 단단한 피부가 되는 그 과정을 담은 몸은 그래서 왜 그 몸이 그렇게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를 떠올리게 한다. '추노'는 그래서 정치를 얘기하지 않아도 정치적이고, 전쟁을 보여주지 않아도 더 참혹한 이야기를 몸의 언어를 통해 전한다. 레드 원 카메라의 저속 고속 촬영은 단지 식스 팩의 몸을 전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몸이 전하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아주 미세한 떨림까지 전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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