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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우리가 '검프' 앓이를 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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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프린세스'가 종영했다. 그저 가볍게만 여겨졌던 드라마는 그러나 차츰 진지해지면서 결국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흔히들 이 드라마를 통해 '서변앓이'를 경험했다고들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마혜리(김소연) 옆에 나타나 가벼운 농담처럼 다가왔던 서인우(박시후). 그런 그가 갑자기 사라져버리자 '서변앓이'를 시작했던 마혜리처럼, 그걸 바라보면서 똑같이 '서변앓이'를 했던 시청자들처럼, 이제 '검사 프린세스'의 갑작스럽게만 느껴지는 종영 앞에 뒤늦은 '검프' 앓이를 하는 이유는 왜일까.

'검사 프린세스'의 시작은 경쾌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였다. 미니스커트 차림에 "야근을 왜 하냐"며 6시면 땡하고 회사를 나서서는 명품 가방이나 챙겨드는 무개념 검사 마혜리(김소연)는 그 어이없는 행동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하는 것조차 무개념이던 그녀는 그저 멋져 보이는 윤세준 검사(한정수)를 제멋대로 좋아하고, 그 옆에 늘 공기처럼 서서 자기 방식대로 사랑해온 진정선 검사(최송현)의 마음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챙겨주는 서인우라는 남자를 아무 생각 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른 채.

하지만 이 경쾌하기 그지없는 로맨틱 코미디는 중반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마혜리는 조금씩 사회를 보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검사로서의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사람들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 그걸 알게되자 마혜리는 차츰 주변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죽은 아내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윤세준 검사와, 그를 그저 해바라기하며 마음 속으로만 사랑하는 진정선 검사의 진심이 보이고, 무엇보다 언젠가 갑자기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이제는 없으면 못 견디게 된 서인우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검사 프린세스'가 이 즈음에서 멈췄다면 보통의 성장드라마를 내재한 멜로드라마로 기억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현재가 어떤 과거를 통해 세워졌으며 또 앞으로 미래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제시한다. 마혜리의 그 사회에 대한 무개념과 기득권을 갖게 된 현재에, 아버지 마상태(최정우)의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과거가 자신이 사랑하는 서인우의 불행한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마혜리를 과거와 마주보게 만든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 했던 마혜리의 아버지와 그로 인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서인우의 아버지라는 과거의 망령들은 현재의 마혜리와 서인우를 갈라놓는다.

이 지점은 멜로드라마가 사회적인 의미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마혜리와 서인우의 개인사는 이 과거와 만나면서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뛰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죄의식과 아픔으로 그 의미가 넓혀진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기보다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며 과거를 덮자고 하는 서인우와,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도 과거의 진상은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고 말하는 마혜리는 모두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게 된다. 마혜리는 검사로서 15년 전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서인우의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내려 하고, 서인우는 거꾸로 마혜리의 아버지의 사건이 과실치사였음을 밝혀내려 한다.

'검사 프린세스'의 멜로는 이렇게 해서 세대 통합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남녀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처럼 선명한 주제의식을 갖고 엮어지는 것은 '검사 프린세스'가 거둔 최고의 성취라고 할 것이다. 멜로에서 사회극으로 확장되면서, '검사 프린세스'는 현재의 우리가 과거에 빚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 과거의 빚을 지금 현재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갚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한때 가난이 싫어 성공을 향해 무슨 짓이든 했던 그 시대의 아픔은, 이제 성공을 넘어 행복을 꿈꾸는 시대를 맞아 자꾸만 과거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마혜리 검사 말대로 그 아픔은 "덮는다고 덮어지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검프' 앓이를 했던 이유는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는 우리의 현재가 사실 꽤 많은 과거의 질곡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주장이 아니라 마혜리의 변화를 통해 그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현재를 대변하는 듯한 마혜리가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서인우를 바라보면서 '서변앓이'를 하듯,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계층과 세대를 넘어서 아무 상관없다 치부하며 살아왔던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상태는 서인우에게 잘못을 빌고, 마혜리는 서인우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서인우와 마혜리는 결국 서로를 껴안는다. 마치 현재가 과거에게 잘못을 빌고, 현재와 과거가 서로를 껴안듯이. '검사 프린세스'는 끝나지만 '검프' 앓이는 한동안 계속될 것만 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