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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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호프만의 중년멜로, 그 특별함

D.H.Jung 2010. 11. 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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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의 마지막 로맨스',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란?

중년의 나이에 '마지막 기회'라고 한다면 무엇이 떠오를까. 혹자는 회사생활을 떠올릴 것이다. 사오정에 오륙도인 세상 아닌가.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에서 본래 피아노 작곡가였지만 광고음악으로 살아가고 있는 하비(더스틴 호프만)가 그렇다. 그는 달라지고 있는 작곡 환경과 치고 올라오는 젊은이들에게 밀려 회사생활의 거의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이것은 회사생활만이 아니다. 이혼한 아내는 꽤 능력 있는 남편과 재혼했고, 자신의 친딸은 새 아빠의 손을 잡고 결혼식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과 소원해졌다. 딸의 결혼식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는 하비에게 사장은 이번 프로젝트가 그에게 '마지막 기회'라고 통보한다.

본인은 열심히 살아왔지만 일에서도 가족에게도 점차 밀려나 있는 하비는 점점 절망의 끝에 몰리게 된다. 자신의 딸의 결혼식이면서도 철저히 이방인 취급을 받는 하비는 결국 회사로부터 해고통보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그 끝자락에서 하비는 '새로운 기회'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바로 하비 앞에 나타난 여인 케이트(엠마 톰슨)이다. 누군가에게는 설렘의 공간이 될 공항에서 설문조사원으로 일하며 노처녀로 나이 들어버린 그녀는 철저히 들러리의 삶을 살아온다. 뭐 하나 기대할 것 없고, 또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아픔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그 평범한 삶의 껍질을 깨고 나가지 못한다.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비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하비와 케이트의 우연한 만남과 사랑을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그려낸다. 초반부 하비와 케이트의 삶이 병치되며 엇갈려 나가다가, 공항의 한 바에서 절망의 한 자락씩을 쥐고 마주앉게 되고, 또 나란히 걸어가다가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위로해주고 결국 사랑하게 되는 이 과정은 단 며칠 간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중년 멜로가 청춘들의 그것처럼 불꽃이 튀고 격정적일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의 대사 하나하나 인물들의 행동과 연기 하나하나는 지독히도 공감이 갈 정도로 섬세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더스틴 호프만과 엠마 톰슨이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내면 연기가 그저 얼굴만 쳐다봐도 느껴질 정도로 그 심리상태를 제대로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딸에게 결혼식장에 새 아빠와 들어가겠다고 통보를 받는 더스틴 호프만의 무심한 듯한 얼굴 속에는 깊은 고통을 견뎌내는 인고와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는 케이트에게 하비가 처음 말을 걸 때, 그 농담 속에 누군가와 지독히도 대화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느끼게 할 정도로 깊어졌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잡은 작은 희망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그 안간힘은 중년들이라면 절절히 공감할만한 대목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와서 '마지막 기회'는 그래서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일에 있어서의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마지막 기회', 즉 케이트와의 사랑을 의미하게 되는 것. 'Last Chance Harvey'라는 이 작품의 원제는 바로 이 중년에 맞닥뜨린 두 가지 종류의 기회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주인공이 되어본 적 없고 들러리로서만 살아온 케이트가 저 멀리 도망칠 때, 붙잡기 보다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기다리는 하비의 모습은 그 어떤 격정적인 청춘멜로의 클라이맥스 이상의 감동을 준다. 중년들이라면 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사랑의 의미를 아마도 깊이 공감할 것이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이 가을 중년들의 스산해진 몸와 마음을 한껏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