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초혼', 짧아도 묵직한 여운의 드라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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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 짧아도 묵직한 여운의 드라마

D.H.Jung 2010. 11. 1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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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 예인들에게 던지는 헌사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뛰어오르는 줄타기 어름산이의 모습은 실로 아름답다. 여기에 옛 기와집의 지붕이 살짝 걸쳐지면 금상첨화. 지금도 지방축제에 가면 백미를 장식하는 이 남사당패의 대표적인 놀이인 줄타기는 그러나 그저 아름답기 만한 그런 기예가 아니다. '줄을 탄다'는 그 기막힌 사정에는 남사당이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온 예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SBS 창사 20주년 특집 드라마 '초혼'은 그렇게 살다간 예인들에게 던지는 헌사다.

얼마나 그 삶이 지독스러웠으면 그 삶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를 버리려할까. 그 운명을 거스르려 했던 어미는 결국 아기에게 기예를 가르치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지만 인생은 유전이라, 그렇게 자라난 아기는 다시 그 어미의 길을 걸어간다. 한 발 한 발 위험천만한 그 줄 위를 걸어 나가다가 그러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것이 자신들 예인들의 운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존을 위해 기예는 물론이고 남정네들 앞에 몸뚱어리를 던져야 했던 여사당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미봉(정은별)은 어린 시절부터 같이 성장한 창수(박정철)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욕망하는 양반집 도련님 윤승재(최령)에게 몸을 버린다. 어떻게 보면 수없이 반복된 구식의 신파극 같은 스토리지만, 이 스토리를 남다르게 만드는 건 바로 남사당이 가진 특유의 예인으로서의 삶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멀리서라도 꽹과리 소리와 춤으로 연결되는 그 어울림이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으로 표현된다.

잘 하면 살판이지만 잘 못하면 죽을 판이 되어버리는 그 놀이판은 서민들에게는 말 그대로 오락이지만 그 판 위에 서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생존이다. 줄 위에 서서 천연덕스럽게 농 짙은 사설을 던지며 줄을 타는 미봉만큼 남사당의 삶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바로 이 죽음 같은 시련 앞에서 그것을 역전시켜 해학과 기예로 승화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예술의 과정을 그대로 닮았다. 죽을 수도 있는 줄 위에서 오히려 그 줄의 탄성을 이용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것. '초혼'의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으로 구름 위에 놓인 줄을 타는 미봉의 모습은 그래서 예인들의 극복된 삶을 담아낸다.

'초혼'은 물론 조선시대의 끝자락이 남아있는 일제시대가 배경이지만, 그 남사당이 이런 예인들의 삶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기 위해 자신은 더 위험한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 그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일까. "나는 최고의 어름산이가 될 거야. 그래서 전국을 떠돌아다닐 거야"하고 말하는 미봉의 말은 신인답지 않게 이 역할을 연기해낸 정은별의 다짐처럼 들린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요즘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진지함을 가진 '초혼'은 짧아도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