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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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눈물' 다큐에 열광하게 하나

D.H.Jung 2012. 1. 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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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눈물'은 또 어떤 감동을 전할까

'남극의 눈물'(사진출처:MBC)

'남극의 눈물'이 돌아왔다. 북극에서 시작해 아마존을 거쳐 아프리카를 넘어서 남극까지. 지구를 한 바퀴 종단했다. 이로써 '눈물' 다큐는 '지구의 눈물'을 온전히 보여준 셈이다. 프롤로그를 통해 보여준 '남극의 눈물'의 영상들은 역시 '눈물' 다큐다운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황제펭귄이다. 심지어 기품이 느껴지는 이 신비한 존재의 생태를 가까이서 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남극의 눈물'이 가진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북극의 눈물'의 실제 주인공이 북극곰이었다면, '남극의 눈물'의 주인공은 황제펭귄이 될 듯 싶다.

물론 '눈물' 다큐들이 그랬듯이 '남극의 눈물' 역시 자연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따라서 황제펭귄의 생태를 그저 기록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눈물' 다큐가 지금껏 보여준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오래도록 바라 본다'는 것에 있다. 그럼으로써 자연다큐들이 그저 찍어냈던 것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해낸다. 황제펭귄을 보면서 그 부성애에 가슴 한 편이 찡해진다면 그 오래도록 바라봄으로써 그려진 이야기를 우리가 읽게 됐다는 의미다. 물론 자연다큐가 휴먼다큐일수는 없지만 '눈물' 다큐들에서 휴머니즘을 느끼게 되는 건 이 이야기들 덕분이다.

인간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극한의 오지를 안방까지 고스란히 전해주는 그 특별한 영상은 '눈물' 다큐들이 가진 최고의 힘이다. 무려 300일이나 문명에서 고립되어 남극에 머물면서, 그것도 혹한의 환경 속에서 겨우 시선을 허락한 펭귄들과 해표와 혹등고래 등을 담아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영상의 진정성을 믿게 된다. 고행에 가까운 촬영을 해온 제작진의 면면을 보면서 그 진심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실 '아마존의 눈물'에 대한 압도적인 찬사는 그 아마존이 처한 환경문제를 담아낸 영상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찍기 위해 온갖 벌레들에 물어뜯긴 제작진들의 몸이 보여주는 진심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굳이 다큐멘터리에서 제작진의 면면을 보여주는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 혹독한 자연을 실감하게 해주려는 의도다. 아마존을 찍으면서 조에족 같은 원주민만을 보여주거나, 남극을 찍으면서 황제펭귄 같은 극지의 동물들을 보여준다면 도대체 그 곳의 자연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일반인으로서의 제작진이 동상에 걸린 장면이나 블리자드 속을 뚫고 걸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건 그래서다.

자연이 주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거꾸로 그것이 파괴되고 있는 상황과 병치되면서 실로 안타까운 '눈물'을 만들어낸다. 북극곰은 점점 녹고 있는 얼음 위에서 터전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아마존의 원주민들은 문명의 바람을 쐬고는 그 삶이 파괴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의 동물들은 물기 없는 땅에서 타들어가고 있었다. 남극은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된 지역이라고 하지만, 이곳도 역시 '눈물'의 흔적은 남아있다. 그 위대한 부성애를 보여주는 황제펭귄들은 또 어떤 고난에 처할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소비하는 도시의 삶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이 오지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로 환원된다.

이 진심어린 영상들이 전하는 극한의 아름다움과 그만큼의 슬픔은 '눈물' 다큐들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그 자연과 동물과 인간을 휘둘러 바라보게 하는 감성적인 영상은 그래서 다 보고나면 이성적인 각성에 도달하게 하는 힘이 있다. '남극의 눈물'의 황제펭귄들은 또 얼마나 우리 가슴에 선연한 흔적을 남길까. 기대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