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믿을 친구, 납뜩이 조정석
<건축학개론>에서 조정석이 맡은 역에는 이름이 없다. 대신 그 역할은 '납뜩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대사 중에 "납득이 안된다"는 말을 습관처럼 쓰기 때문이다. "에? 납득이 안 되네. 납득이. 아니 대학생이 연예를 하라고 대학생활 하는 거지 대학생이." 재수생인 그는 친구 승민(이제훈)이 대학까지 가서 연예도 제대로 못하는 걸 '납득이 안 간다'고 말한다.
'더킹 투하츠'(사진출처:MBC)
여자친구에게 속내를 고백하지 못하는 승민에게 납뜩이는 제 딴에 방법이라고 술 마시고 무조건 대시하라고 알려준다. "근데 너한테 술 냄새가 팍! 나잖아. 어떨 거 같냐. 어떨 거 같애. 일단은 쫀다고. 납득이 안가잖아. 납득이. 갑자기 찾아 와서 술 냄새? 어 이건 뭐지? 낯선대?" 여기서도 그는 '납득이 안간다'는 습관적인 말을 사용한다.
물론 그가 납뜩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 습관적인 말투 때문은 아니다. 그는 어딘지 사회에 잔뜩 불만을 갖고 있다. 그는 아마도 납득 안가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툭툭 던지는 것만 같다. 영화는 특별히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지만, 그가 말하는 방식, 그가 친구 승민과 얘기하는 장소, 그의 대사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생활 등이 그 이유를 에둘러 알려준다. 그는 재수생이고 독서실에 다니며 그다지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싱숭이와 생숭이라 이름붙인 여자애들(중학생인 듯하다)이 독서실에 같이 다니고 입으로는 연애박사지만 실제로는 영 아닐 것 같은 인상이다.
한마디로 납뜩이는 어딘지 한참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처럼 보인다. 대학도 가지 못했고 당연히 제대로 된 연애도 별로 못해봤다. 강북이라는 공간에 딱 어울리는 그런 캐릭터. 그런데 그 납뜩이가 순수한 친구 승민이에게 어두침침한 골목길에서 조언이랍시고 던지는 말들 속에는 거칠지만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건축학개론>에서 강남과 기득권을 표상하는 재욱(유연석)이란 인물이 있었다면 납뜩이는 정확히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가진 것이 없어 초라해지는 이 승민이라는 어설픈 청춘에게 납뜩이는 뭐든 도움이 되기 위해 조언을 해준다. 그 조언이 엉터리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거기에 '납득되는' 이유는 그 마음을 읽기 때문이다. 납뜩이는 승민의 진정한 친구라는 것. 결국 기득권자들이 가져가버리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투덜대고 불평을 쏟아내면서도 친구라는 것만으로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그런 존재. 재욱이라는 기득권자에게 결국 빼앗기고 만 사랑으로 오열하는 승민에게 납뜩이가 던지는 한 마디는 그래서 가슴 저릿하게 다가온다. "힘내..새꺄.."
아마도 이렇게 짧은 순간에, 주연도 아니고 조연으로, 게다가 대사도 그리 많지 않은 배역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정석을 보면서 '넘버3'의 송강호를 떠올리게 됐던 건 그 미친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심에 서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 주변인이라는 점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더 흔드는 인물로서 '납뜩이'라는 캐릭터가 조정석이라는 배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정석은 짧은 대사지만, 특유의 맛깔 나는 발성으로 납뜩이라는 존재를 순식간에 우리 뇌리 속에 새겨 넣었다. 아마도 뮤지컬 배우 출신이라는 점이 그 특유의 리드미컬하고 정확하게 여겨지는 발성을 만들지 않았을까. 부리부리한 눈에 앙다문 입은 제 아무리 껄렁대도 그 안의 단단한 내면을 읽게 만든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는 그렇게 조정석이라는 연기자를 우리에게 납득시켰다. 어딘지 믿음이 가는, 나를 이해해줄 것 같은 친구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더킹 투하츠>에서 왕 재하(이승기)를 지키는 타협이란 없는 고집스런 인물 은시경(조정석)으로도 이어진다. 물론 재하와 은시경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주종 관계지만, 여기서도 은시경은 그 표면적 관계를 넘어선다. 즉 그 누구하나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재하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모두가 재하를 비난하고 심지어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자책할 때 은시경은 이렇게 말한다.
"남들 말에 휘둘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를 믿으세요. 전하는 이미 강하십니다. 제가 본 전하는 많이 예민하십니다. 또 진지한 것도 싫어하시고요. 하지만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다 상처도 많아 확 나가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지레 허허실실 가면을 쓰고 계세요. 이제는 그걸 벗어달라는 겁니다. 콤플렉스도 많고 얕보는 사람도 많지만 전하는 이미 저에겐 세상에서 가장 힘센 왕이십니다. 부디 더 당당해지세요. 전하."
이것은 '납뜩이'의 연장선으로서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하반신 불구가 된 공주 이재신(이윤지)과의 로맨스에서 그의 직책으로서의 딱딱함과 고집스러움이 묻어난 무표정한 얼굴이 사적인 감정으로 살짝 움직일 때 우리는 그의 마음에 납득되고 만다. 철저하게 캐릭터가 잘 분석된 연기와 단단한 발성, 그리고 연달아 잘 맞아 떨어진 배역은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앞으로도 납뜩이로서 우리에게 자리할 지도 모르겠다. 어떤 배역이든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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