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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적도>, 엄태웅은 결국 오이디푸스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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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오이디푸스와 근현대사가 만날 때

 

<적도>는 남자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에 대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는 그 흔한 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들은 넘쳐난다. 주요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는 선우(엄태웅)와 장일(이준혁)은 둘 다 여러 의미의 아버지들을 갖고 있다.

 

 

'적도의 남자'(사진출처:KBS)

선우는 진짜 아버지(그게 누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키워준 아버지 김경필(이대연), 그리고 그를 절망의 늪에서 구원해준 아버지 같은 존재 문태주(정호빈)가 있다. 한편 장일은 진짜 아버지지만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용배(이원종)가 있고, 그가 검사가 될 때까지 후원을 해준 마치 대부 같은 진노식 회장이 있다.

 

선우와 장일은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로서 그 본질은 선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아버지들에 의해 선과 악으로 갈라지게 된다. 진노식 회장과의 거래로 이용배는 김경필을 죽이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장일은 그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걸 밝히려던 친구 선우의 뒤통수를 치게 된다.

 

선우와 장일의 대결은 결국 선우를 키우고 성장시킨 선한 아버지들(김경필, 문태주)과 장일을 키운 악한 아버지들(이용배, 진노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고통 받는다. 그리고 그 고통의 근원은 자신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아버지대의 잘못이 유전된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남자로 표상되는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가 가진 문제와 그로 인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부조리의 고리를 보여주겠다는 의도.

 

선우에 의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잘못을(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캐묻는 이 드라마는 시대의 욕망과 권력에 의해 은폐되었던 정의와 진실을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리려 한다. <적도의 남자>가 그토록 시각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은 이 감추어진 진실을 다시 끄집어내 제대로 보여주려는 이 드라마의 욕망을 잘 말해준다.

 

선우가 시각장애를 갖게 되는 설정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진실을 보려는 자와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자 사이에 생겨난 갈등에서 비롯된다. 또 최수미(임정은)와 그 아버지인 최광춘(이재용)이 모두 '진실을 본 자'라는 점도 흥미롭다. 박수무당인 최광춘은 선우의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자이고, 그 딸인 최수미는 선우의 뒤통수를 장우가 내려치고 바닷물에 집어 던지는 장면을 목격한 자이다.

 

화가로 돌아온 최수미가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린다는 설정도 그래서 이해가 된다. 사진 같은 증거는 없지만, 최수미의 기억 속에 남겨진 사건의 기록은 그대로 있는 셈이다. 그녀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낸다. 거의 사진 같은 사실적인 그림으로. 이처럼 드라마는 진실을 억압하려는 자들에게 자꾸만 과거의 그 불편한 진실을 들이댄다. 보지 못하던 선우가 문태주를 만나 눈을 뜨게 되고, 장일에게 버려진 수미가 화가가 되어 과거를 시각적으로 재현해내는 과정은, 그래서 묻는다고 묻힐 수 없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적도의 남자>는 진실의 법정에 아버지들을 세우는 드라마다. 그들의 욕망으로 인해 만들어진 부조리한 현실을 짊어진 아들들이 서로 피 흘리며 싸우면서 그 아버지 대의 잘못을 폭로하는 이야기. 아버지에 대항한 아들의 이야기와 그 불편한 진실을 파헤쳐 들어가는 스토리 구조는 고전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제 아버지를 제 손에 죽게 했다는 사실을 안 오이디푸스가 제 눈을 스스로 찌르는 것은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면하기 힘겨운 불편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선우의 친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추정할 수 있는 건 그 아버지가 바로 선우가 그토록 복수하려 했던 진노식 회장이 될 거라는 예감이다. 심한 충격이 선우의 시력을 다시 잃게 만들 수도 있다는 복선은 <적도의 남자>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정확히 겹쳐지는 부분이다. <적도의 남자>가 최근 보기 드문 수작인 이유는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대단히 근원적인 스토리를 보여주면서도(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동시에 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근현대사를 압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