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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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와 손수건, 당신이 좋아하는 드라마는?

D.H.Jung 2007. 4. 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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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여자’ vs ‘고맙습니다’

주중 드라마의 향배가 정해져가고 있다. 월화는 김수현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승부하는 ‘내 남자의 여자’, 수목은 이경희 작가가 전하는 훈훈한 진심으로 승부하는 ‘고맙습니다’이다. 한쪽은 말많은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수다를 자극하고, 다른 한쪽은 말없이 울게 하는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달군다. 미드 열풍을 타고 온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지만 그 기대치에 맞는 드라마가 부재한 상황, 이 두 드라마는 전혀 다른 상반된 코드를 가지고 주중의 밤을 뜨겁게 만들고 있다. ‘수다와 손수건’, 당신이 좋아하는 드라마는 무엇인가.

분노 vs 눈물
‘내 남자의 여자’는 여성들 속에 잠재되어 있던 분노를 끄집어내 폭발시키는 드라마다. 이것은 모든 불륜드라마가 갖는 기본전략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불륜드라마가 그 분노를 자해하듯 여성 속에 가두고 속으로 터뜨렸다면, ‘내 남자의 여자’는 거침없이 끄집어내 밖으로 터뜨린다는 데 있다. 죽이고 싶을 정도의 분노가 가진 두 얼굴은, 안으로 터질 때 자학 혹은 자살이 되며, 밖으로 터뜨릴 때 가해 혹은 살인이 된다. 그러니 불륜드라마가 가진 자극성은 바로 극중 은수(하유미)가 입만 열면 버릇처럼 쏟아져 나오는 욕설, “찢어 죽일” 정도의 강도를 숨기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폭력물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무언가 내 안에 잠재된 불만과 분노를 애꿎은 기물을 파손하고 폭파시키는 장면을 통해 풀어내는 것. 그러나 폭력물에 바로 내 옆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공감을 끌어내는 설정이 들어가면 그 강도는 더 강해진다. ‘내 남자의 여자’는 바로 그런 설정을 불륜을 통해 만들어놓고 분노와 카타르시스를 반복하는 심리적인 폭력물이다. 여기에는 그간 남자라는 속물들에 의해 쌓여온 분노를 ‘무시’라는 형태로 복수하고는, 곧바로 ‘가정 있는 여자’와 ‘그 가정을 파괴하려는 여자’라는 구도를 만들어 대결구도에 들어간다. 주먹이 오가고 프라이팬이 날아드는 걸  보고 속시원하다고 느낀 시청자라면 이 대결구도에서 오는 해소감을 맛본 것이다.

반면, ‘고맙습니다’는 분노보다는 눈물을 무기로 끄집어낸다. 그런데 이 눈물은 그저 강한 설정에 의해 억지로 짜내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대결의식과 그 해결방법을 보면 드러난다. 드라마는 에이즈에 감염된 딸 봄(서신애)과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신구)를 모시고 살아가는 영신(공효진)과 세상의 편견과의 대결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중요한 것은 특정 캐릭터가 그 세상의 편견을 대변하는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석현(신성록)과 민기서(장혁)의 관계는 영신과 푸른도의 개발을 두고 묘한 대결구도를 가지면서도 서로 형제 같은 느낌을 준다. 박씨(김하균)와 석현모(강부자) 같은 모자란 듯한 섬사람들은 그 부족함이 때론 편견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모르기 때문일 뿐, 악함은 아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세상의 편견들 앞에서 영신이 하는 방식은 저 ‘내 남자의 여자’가 보여주는 ‘분노의 폭발’이 아니다. 그녀는 고작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끊임없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에이즈라는 사실이 밝혀져 자신의 딸을 피하는 푸른도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푸른도 사람들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며, 그래도 딸 봄이와 할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려 노력하면서 이런 작은 행복감에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들을 목격하는 시청자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작가가 이 가족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도처에 그 가족을 도우려는 인물들, 예를 들면 보건소 사람들이나 민기서, 석현, 서은희(김성은), 두섭모(전원주) 같은 인물들의 시선으로 처리된다.

직설화법 vs 간접화법
분노를 터뜨리는 방식으로서 ‘내 남자의 여자’는 직설화법을 선택한다. 욕은 차라리 순한 편이다. 대화내용은 너무나 직접적이어서 충격적이란 느낌마저 든다. 화영(김희애)을 찾아온 지수(배종옥)가 “왜 그랬니? 넌 내 친구였잖아.”라고 하는 항변에 화영의 답변은 이런 식이다. “불가항력이었어. 죽어도 좋았어. 너 따윈 아무 상관없었어.” 이것은 언어라는 형태를 띄었을 뿐, 거의 칼로 상대방의 마음을 찌르는 정도의 수위를 담고 있다. 여기에 가만있을 지수가 아니다. “너희 짐승이니?” 그러자 화영은 비웃듯 웃으며 말한다. “행복한 짐승.” 칼이 날아가고 피가 튀는 사극이나 조폭영화보다 더 강한 직설화법의 액션이다.

하지만 이런 자극적인 말의 대결 너머에서도 캐릭터를 잡아내는 게 김수현 작가의 힘이다. “내가 널 얼마나 잘 해줬는데..” 이런 지수의 한탄에 화영이 하는 말. “니가 해놓고 왜 빚준 것처럼 그래? 솔직해라.” 이것은 지수의 성격이 조금은 과잉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주변의 것들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자신은 늘 착한 천사표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착한 여자 콤플렉스’ 같은 것을 약점으로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수의 일방적인 공세 속의 약점을 파고드는 화영의 한 자락 칼침이 더 강한 대결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인이 된다. 평소에 시청자들이 속으로 품고 있었던 말들은 그녀들의 입을 통해 뿜어져 나오고 그 순간 시청자들은 캐릭터에 빙의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반면, ‘고맙습니다’는 극도로 우회하는 간접화법으로 시청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고맙습니다’에 유독 많이 나오는 장면은 바로 ‘목격되는 장면’이다. 영신이 잠을 자다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민기서에게 목격되고, 술에 취해 민기서를 아버지로 대하는 그녀의 행동 역시 민기서에게 목격된다. 민기서가 살인의 누명을 쓰고 경찰서에 갔을 때 그 증언을 뒤집어줄 고씨네 집에서 비를 맞으며 애원하는 석현의 모습은 영신에게 목격된다. 에이즈 사실이 밝혀진 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간 영신은 석현에게 목격된다. 여기서 목격자는 바로 시청자의 역할을 해준다. 시청자들은 여러 따뜻한 인물들에게 빙의되면서 그 시선으로 같은 가슴저림, 아픔을 느끼게 된다.

돌아온 민기서는 “정말 잊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는 진심 어린 말을 영신 앞에서 해댄다. 그것은 직설화법처럼 느껴지지만 곧바로 민기서가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함으로써 간접화법으로 되돌려진다. 과거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으로 착각해 민기서 앞에서 밥상을 차려주고 절을 했던 일을 이번에는 민기서가 간접화법으로 말하는 것. 여기에는 영신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에서 에둘러 말하지만 진심은 시청자에게 곧바로 전달된다. 드라마는 이러한 간접화법을 통해 진심이란 말 몇 마디로 전해지지 않는 어떤 것이라 말해준다. ‘고맙습니다’는 저 신구라는 연기자의 치매연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직접적인 말보다는 우회적인 말로, 때론 침묵이나 행동으로 진심을 전하는 드라마다.

네거티브 전략 vs 포지티브 전략
이 두 드라마가 취하는 전략은 사뭇 상반된다. ‘내 남자의 여자’는 말많고 자극적인 드라마로서의 전형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따르고 있고, ‘고맙습니다’는 마음의 진심을 전해 감동을 주는 드라마로서의 포지티브 전략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기보다는 세상을 대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다. 세상이 내게 무언가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이렇게도 다르다. 때론 불의와 맞서 싸우고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방식을 쓰기도 하고, 때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킨 장본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식을 쓰기도 한다.

주중 드라마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내 남자의 여자’와 ‘고맙습니다’는 이 두 방식에 대한 드라마다. 공교롭게도 여타의 드라마들보다 이 두 드라마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청자들이 그만큼 삶의 리얼한 문제에 더 민감하다는 것과 지금 우리 삶이 그만큼 각박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신은 이 각박한 삶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각박한 삶을 만든 장본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결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진심을 전하려는 대화를 계속할 것인가. 칼날 같은 수다를 통한 대결인가, 적마저 눈물 흘리게 하는 손수건인가. 당신은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