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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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논란, 역사왜곡보다 더 큰 문제

D.H.Jung 2013. 10. 2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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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차라리 노국공주를 다루는 편이...

 

국적만 고려인이면 무조건 사극의 주인공이 되도 문제가 없는 걸까. <기황후>에 쏟아지고 있는 논란을 들여다보면 역사왜곡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사극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달라진 지 오래다. 역사라기보다는 극이라는 데 더 방점이 찍히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 역사적 사실 혹은 아예 없는 사료에 상상력을 덧붙이는 일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게 되었다.

 

'기황후(사진출처:MBC)'

그런데 <기황후>는 시작도 전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휘말렸다. 고려에서 태어나 원나라에 공녀로 팔려간 후 원나라 황제 혜종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사료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에 오르게 했고, 원나라에 고려의 풍습을 전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황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 여성을 과연 고려인으로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긴다.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은 그저 개인적인 성취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고려의 공물을 늘리고, 오빠인 기철이 권력을 쥐게 하면서 고려를 농단한 사례가 있으며, 결정적으로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책으로 기철을 죽이자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던 사실이 있다. 과연 이런 인물을 고려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저 태생이 고려라고 해서 전혀 고려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않은 그녀를 우리네 사극의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것은 실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즉 <기황후>에 쏟아지고 있는 논란은 역사왜곡의 문제도 문제지만 왜 그녀 같은 인물을 지금 사극의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더욱 비롯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이완용 같은 친일에 앞장 선 인물을 조선을 개화한 인물처럼 묘사해 사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글로벌 어쩌고 하는 그럴 듯한 포장을 씌운다고 해서 이런 사극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왜곡 논란을 떠나서 현재의 사극에 더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현 시점에서 내세워지고 또 각색되어도 될 만한가 하는 정당성이다. 제작진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기황후가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글로벌 여성’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역사의식의 부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고려 땅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황후의 행적은 거의 원나라 사람에 가깝다. 그런 인물을 왜 굳이 우리네 사극의 주인공으로 세워야할까. 중국 드라마라면 모를까.

 

기황후를 다루느니 차라리 비슷한 시기에 고려로 오게 되었던 노국공주를 다루는 편이 나을 듯싶다. 원나라의 공주이지만 공민왕과 혼인한 후 그의 영원한 연인이자 정치적인 동반자 역할을 하며 공민왕이 강력한 반원정책을 펼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던 인물이다. 국적은 원나라지만 고려인의 입장에 서서 고려인들을 위해 살았다는 점 때문에 우리네 사극에서는 여러 차례 노국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신의>가 그렇고, <신돈>이 그렇다.

 

사극이 역사를 벗어버리고 상상력의 옷을 입었다고는 하나 적어도 지켜야할 선은 있는 법이다. 기왕에 <기황후>라고 역사적 인물을 제목으로 삼았을 때는 그녀가 우리네 역사에서 사극으로 다뤄질만한 인물인가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먼저 기황후를 그저 태생이 여기라고 우리네 역사적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만일 기황후가 태생만 고려일 뿐 사실상 원나라 사람으로서의 행적을 보였다면 왜 그걸 우리나라에서 사극으로 만들어야 할까. 역사왜곡보다 더 큰 문제는 역사의식의 부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