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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정도전', 왜 왕이 아닌 정치개혁가를 내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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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지금 '정도전'일까

 

왜 하필 정도전이었을까. 여말선초 이 난세만큼 사극이 사랑한 시기도 없을 게다. 거기에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라는 인물이 있다. <조선왕조 500>은 물론이고 <용의 눈물>, <대풍수> 같은 사극이 이성계라는 난세의 영웅을 소재로 다뤘다. 변방을 지키던 무장이 왕이 되는 과정이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대선이라는 정치적 변혁기를 매 번 치르게 되는 우리에게 이 인물은 그 때마다 상징적인 의미가 덧붙여진 채 재해석되었다.

 

'정도전(사진출처:KBS)'

그런데 이 시기를 다루면서도 KBS가 정통사극의 부활을 알리며 가져온 인물은 이성계가 아니라 정도전이다. 물론 <정도전>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지만 이 사극에서 이성계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극의 첫 시작부터가 정도전(조재현)이 이성계(유동근)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결국 정도전의 정치력과 이성계의 힘이 만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니, 정도전을 다루면서 이성계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드라마적인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훨씬 효과적인 인물은 이성계다. 무장으로서 원에 쫓겨 고려로 들어온 홍건적을 물리치며 화려하게 등장해서는 원나라 나하추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고려민들의 구세주로 떠오른 인물. 그의 연전연승 이야기는 조선 건국의 정치적인 이야기와 맞물려 훨씬 다이내믹한 장면들을 보여줄 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다르다. 그가 이성계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세운 것은 맞지만 그것은 끊임없는 정치적인 투쟁의 결과다. 즉 정도전을 다루는 사극은 결국 본격 정치를 다룰 수밖에 없고, 그것은 칼이 보여주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말로써 벌어지는 정치 대결이 사극의 주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극 <정도전>은 고려 말 이색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정도전과 정몽주(임호)를 위시한 신진사대부들과 고려 말 원나라와 결탁해 권력을 잡은 권문세가의 대표 이인임(박영규)과의 정치대결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쇠퇴해가는 북원의 끝자락을 잡고 고려 말의 권세를 계속 유지하려는 이인임과 북원과의 고리를 끊고 새롭게 등장하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새 세상을 꿈꾸는 정도전의 대결. 여기에 최영(서인석) 같은 고려의 충신과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 수렴청정을 한 명덕태후(이덕희), 그리고 왕실외척세력인 경복흥(김진태)의 힘겨루기가 들어가면서 정치대결은 더 복잡한 양상을 만들어간다.

 

정치적 이상과 포부가 큰 정도전이지만 적 아니면 도구로만 상대를 생각하는 현실 정치 9단 이인임을 이겨낼 수는 없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이인임에 맞서 정도전이 유학자들의 성지인 대성전으로 들어가 단식투쟁을 벌이자 이인임이 최영의 힘을 빌려 무력 진압 해버리는 현재의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아 보이는 장면은 그의 만만찮은 정치력을 보여준다. 정도전은 결국 이인임과의 수차례 대결에서 패배한 연후에야 이상과 현실 정치의 봉합을 꾀하게 되는 셈이다.

 

정도전은 이처럼 그 정치적 성장담이 흥미롭지 않은 건 아니나 그래도 TV 사극으로서는 다루기가 쉽지 않은 인물인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을 다루는 데는 그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정도전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과 관련이 있다. 정도전은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재상이 통치하는 나라를 꿈꾸었다. 즉 왕에 따라서 정치가 농단되는 것을 봐온 그로서는 왕이 누가 되던 나라가 제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수차례의 대선을 겪으면서 그 때마다 가졌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감은 단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좌절을 겪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에 그토록 꿈꾸었던 민생경제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박근혜 대통령이 얘기했던 양극화 해소 역시 지난 1년 동안 아무런 해결점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정치가 바로 서고 나라가 제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이제 믿기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왕이 아닌 시스템의 개혁을 꿈꾼 정도전이 사극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건 지금 현재 대중들이 느끼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정서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대선에 대한 누적된 실망감은 이제 표상되는 대표자의 얼굴이 아닌 실제적인 현실 정치 시스템의 변화로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정도전>이라는 쉽지 않지만 좀체 눈을 떼기 힘든 본격 정치 사극에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