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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참 좋은 시절'이 막장드라마에 던지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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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시절>의 갈등, 막장의 정반대로 간다

 

미안타 에미야. 맨날 드러누워가 새끼들 골병만 들게 하는 이 산송장이 그냥 디비 자지 뭐 다 저녁때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해가. 요놈의 주둥이가 요물이다.” 사과를 깎다 손을 벤 며느리 장소심(윤여정) 보고 시아버지 강기수(오현경)가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자 장소심은 오히려 펄쩍 뛰며 이렇게 말한다. “아녀요. 아버님. 아버님 요렇게 맛있게 드셔주니까 제가 숨을 쉬고 살겄어요. 아버님 그냥 노상 아무 것도 못 잡숩고 계시면 제가 어떻게 밥을 지대로 넘기고 잠을 지대로 자며 숨을 쉬고 살겄슈.”

 

'참 좋은 시절(사진출처:KBS)'

KBS 주말드라마 <참 좋은 시절>의 한 장면.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대화 속에는 서로를 챙기려는 애틋한 마음이 묻어난다. “새끼들 골병만 들게 한다는 시아버지의 자책은 장소심의 마음에도 가시처럼 박힌다. 젊어서 식모살이하던 이명순(노경주)이 장소심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가 검사면 근본도 달라지는 줄 알아? 식모 아들이 감히 누굴 넘보고..” 장소심의 아들 강동석(이서진)이 이명순의 딸 차해원(김희선)을 만나는 걸 반대하는 이명순의 이야기. 장소심은 자기가 못나서 자식들 앞길에 폐만 끼치는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린다.

 

흥미로운 건 이 때 들어온 하영춘(최화정)의 반응이다. “우리 형님 왜 울어요? 아버님. 아버님 때리셨어요? 아버님 진짜. 우리 부처님 반 토막 같은 형님께 그러시면 안돼죠. 그런 개망나니 바람둥이 남편 만나서 평생 그냥 가슴앓이 하면서 사는 세월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남편도 없는 시집에서 시아버지 병수발에 마흔이 넘도록 장가 안간 쌍둥이 시동생들 뒷바라지에...” 하영춘과 장소심이 첩과 조강지처의 관계라는 것이 무색한 장면이다.

 

이 짧은 장면은 <참 좋은 시절>의 특별한 점이 묻어난다. 조강지처와 첩이 남편을 잃고 한 집에서 산다는 설정 자체도 특이하지만 두 사람이 앙숙이기는커녕 서로를 끔찍하게도 챙기는 모습은 낯설게까지 느껴진다. 특히 막장드라마의 관습적인 설정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런 장면이 주는 낯설음이 더욱 클 것이다.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고 하다못해 머리채라도 잡아 드잡이를 하는 장면이 나올 법한 관계에, 오히려 서로의 역성을 들고 챙겨주는 모습이라니.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 역시 거의 부모 자식 같은 관계 그 이상을 보여주고, 한때 식모살이를 했지만 지금은 망해버린 이명순에게 여전히 주인 대하듯 깍듯한 장소심의 모습도 보통의 드라마 속 설정과는 사뭇 다르다. 장소심은 그래도 자기네 가족이 그만큼 살 수 있게 된 것이 이명순네 집에서 자신을 거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것이 노예근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장소심의 경우는 그런 세속적인 잣대를 넘어선다. 그녀는 뭐든 끌어안는 인간애와 모성애의 결정판이다.

 

하영춘을 벌레 보듯 하는 강동희(택연)에게 늘 한 걸음 뒤편에 서서 그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는 하영춘의 관계 또한 특이하다. 보통의 계모와 자식 설정과는 달리, 하영춘은 강동희를 친자식처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여기에는 출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지만(사실은 강동희의 친엄마가 하영춘) 이 역시 통상적인 막장드라마가 사용하는 코드와는 달리 사용된다. ‘출생의 비밀이 신분상승의 기제로 활용되곤 하던 것과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는 끈끈한 가족애를 드러내는 코드로 활용된다.

 

또 어린 시절의 사고로 어린 아이의 지능에 멈춰버린 강동옥(김지호)과 우진(최웅)의 멜로 역시 여타의 드라마들과는 사뭇 다르다. 하긴 연애에 있어 잘 나고 못나고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그래도 우진이 먼저 강동옥에게 호감을 드러내고 다가간다는 설정은 특이하다. 게다가 강동옥은 이 멀쩡하게 잘 생기고 능력도 있어 보이는 사내를 거부한다. 중요한 건 강동옥이 우진을 밀어내는 이유다.

 

에미 말 잊어먹으면 안댜. 니를 보고 자꾸 이쁘다 켜고 자꾸 말시키고 밥 먹자고 그러고 손 잡을라구 그러고 그런 놈들하고는 절대로 같이 놀면 안댜. 그런 놈들은 말짱 다 나쁘고 숭악한 놈들여. 알았쟈?” 장소심이 강동옥을 걱정해서 한 말이 그녀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던 것. 통상적인 멜로 관계가 부모의 반대로 인해 벌어지는 것이지만, 강동옥의 경우에는 장소심의 그녀에 대한 지극한 걱정과 배려가 들어가 있다.

 

<참 좋은 시절>이 갈등구조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봐왔던 구도와는 확연히 다르다. 흔히 막장드라마에서 첨예한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조강지처와 첩의 서로를 물어뜯는 관계로 집어넣곤 하지만 <참 좋은 시절>은 정반대다. 또한 한때 식모살이하며 구박을 받던 관계가 이제 역전이 되었다면 그것 역시 막장드라마에서는 자극적인 복수극의 이야기로 흐르기 마련이지만 이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변함없는 장소심의 마음이 또 다른 갈등의 단초로 제공된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다. 통상적인 갈등관계를 뒤집어 막장드라마들이 하던 방식이 아니라도 충분히 극적 상황이 가능하다는 것. 막장드라마가 관습적인 대립구도로 갈등을 만들어낸다면 <참 좋은 시절>은 오히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오해를 부르고 그것이 갈등으로 드러난다. 물론 이 오해가 풀려나가는 과정은 이 특별한 드라마의 갈등 해결과정이 될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이 드라마가 사람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혹여나 악역이라고 하더라도 그 인물을 타고난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부족함이 있을 뿐이고 그 부족함이 서로에 대한 이해로 채워질 때 갈등이 봉합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만 같다. 늘 봐와서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막장드라마들의 관습적인 관계와 설정의 정반대를 보여준다는 것. 이것은 참 좋은 드라마, <참 좋은 시절>이 막장드라마에 던지는 결코 작지 않은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