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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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극장이 놀이공원인가

D.H.Jung 2007. 5. 3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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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극장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운 이유

영화티켓 하나 꼭 쥐고 냄새나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그저 스크린만 쳐다봐도 좋던 시절은 가버렸나. 영화가 너무 좋아서 연거푸 몇 번씩 보고 또 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멀티플렉스로 거대해진 극장은 체인화되고 시스템화된 지 오래며 이젠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점점 고급화되어가는 추세다.

이제 레스토랑처럼 보이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최고급 요리를 즐기는 시대다. 250평 규모의 공간에, 일반 스크린의 세 배가 넘는 가격의 고급 스크린이 설치되고, 바닥 스피커까지 갖춘 완벽한 음향시설까지 갖춘 극장은 영화 한 편에 10만 원이라는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연인들을 위한 특별 커플석은 기본이고, 아예 극장 하나를 통째로 빌려 이벤트를 할 수 있는 소규모 극장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극장은 이제 더 이상 영화만을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다. 복합레저공간이라고 해야할까. 테마파크 라고 해야할까. 여기에 이른바 팝콘무비로 불리는 블록버스터가 만나면 극장은 완벽한 놀이공원(?)이 되는 셈이다.

디지털 시대, 극장의 생존법
디지털이 가져온 변화는 극장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디지털 배급(중앙서버에서 여러 스크린으로 영화파일을 전송하는 시스템)’은 선명한 화질로 무한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장 수에 맞게 프린트를 해서 배급하던 과거의 시스템은 한 벌에 들어가는 2백만 원 상당의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여러 번 프린트하면서 발생하는 화질 저하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 디지털 배급으로 그런 문제는 사라졌다. ‘필름 없는 극장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것은 극심한 극장의 위기였다. ‘홈 시어터’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스템은 극장으로 가려는 관객들의 발길을 가정에 묶어두었다. ‘황후화’를 감독한 장이모우 감독은 그 엄청난 스케일을 만들어낸 데 대해 꼭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을 낼 수 있는 ‘볼거리’가 이제 영화에 필요해진 상황을 에둘러 말한 적이 있다. 영화는 생존을 위해 거대해지고 블록버스터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극장의 변신은 바로 이것과 맞물려 있다. 그저 스크린에 영상을 틀어주는 것만으로는 디지털 시대에 생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극장과 팝콘무비가 만나는 지점이다.

극장과 팝콘무비의 공존, 좋기만 할까
하지만 그것이 좋기만 한 걸까. 국내 영화의 위기론에 불을 붙인 최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극장 점유는 가히 놀라울 정도다. ‘스파이더맨 3’가 전국 816개 상영관을 잡은 데 이어, ‘캐리비안의 해적3’는 이보다 100개가 넘는 912개의 상영관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런 현상은 디지털 배급이 가진 장점인 무한복제가 스크린 독점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극장주들이 돈을 벌겠다는 데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은 또한 소비자의 선택의 권리를 원천 봉쇄한다는 점에서 그저 상업의 논리로만 내버려두긴 어려운 문제다. 그것도 이른바 팝콘무비, 즉 킬링타임용 영화에 대부분의 극장 스크린을 내준다는 점은 자칫 영화의 본질을 뒤흔들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물론 “재미만 있으면 되지 팝콘무비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영화는 문화라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재미있는 놀이기구’로 생각하지 문화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팝콘무비와 극장의 변신이 만나 만들어 가는 이 놀이공원화 되는 극장은 영화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워지는 이유
‘말아톤’, ‘좋지 아니한가’의 정윤철 감독은 최근 한 영화 잡지에 “극장에서 영화만 보고 나오기, 콜라와 팝콘 사먹지 않기 운동을 펴자”는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한국 영화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이른바 ‘팝콘무비’라 불리는 천편일률적인 블록버스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자는 뜻이다. 그는 이어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칸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밀양’같은 작품도 극장을 못 잡아 관객들이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말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잇따른 상영관 독점 현상을 꼬집었다.

물론 극장의 변신은 서비스 차원에서 보면 관객의 선택 폭을 넓혀주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변신이 마치 저 ‘팝콘무비’를 위한 준비처럼 보여지게 만드는 헐리우드 영화들의 잇따른 스크린 독점은 오히려 관객의 선택 폭을 줄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점점 디지털화되고 세련되어지는 극장에서 자꾸만 조금 어수룩해 보여도 정이 가는 옛날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교보생명 사외보 <다솜이 친구>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