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밀양’, 상처를 바라보는 햇볕같은 시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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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상처를 바라보는 햇볕같은 시선

D.H.Jung 2007. 5. 19.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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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군가 던진 돌팔매질에 상처 난 이마는 누가 고쳐주었나. 정성스레 솜에 과산화수소를 발라 상처를 소독한 후, 빨간 약을 발라주신 어머님인가. 아니면 과산화수소와 빨간 약인가. 이창동 감독이 들고 온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 ‘재수 없음’으로 치부되는 운명의 돌팔매질에 입은 상처가 과연 인간의 힘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영화는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을 아들 준과 함께 찾아가는 신애(전도연)의 자동차에서부터 시작된다. 햇살이 저 멀리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그것은 차창에 가려져 굴절된다. 신애가 밀양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하늘의 태양이 그저 거기 떠 있는 존재로만 알았다. 그러나 밀양에서 겪게되는 참기 힘든 시련(아들이 유괴되고 살해되는)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가슴을 두드리고 그래도 죽지 않는 제 육신에 억지로 밥알을 쑤셔 넣으면서 미칠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애 옆을 종찬(송강호)은 서성댄다. 밀양이라는 지명을 ‘비밀의 햇볕’이라 부르며 의미 붙이기 좋아하는 그녀는, “뜻보고 삽니꺼? 그냥 사는 거지예”하는 속물 같은 이 사내를 무시한다. 하지만 종찬은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믿음 없이도 교회를 나가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신애가 처음 종교의 힘을 빌어 하늘을 쳐다본 것은 그것이 자신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일까. 그것은 마치 상처가 분명 있는데도 없는 것이라 믿고 아무런 대응조차 않는 것처럼 헛된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신도를 유혹하면서 신을 비웃듯 두 번째 하늘을 올려다보는 신애의 얼굴에는 독기가 서려있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직시하지 않았던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버렸던 것. 상처는 어느덧 그녀의 영혼까지 갉아먹는다.

영화는 신애라는 상처 입은 인간이 벌이는,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투를 끝까지 배신한다. 남편을 잃고, 아이를 잃고, 상처를 준 자를 용서하려 했지만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해도 거기서 또다시 상처와 마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지독스런 신애라는 인물을 연기해낸 전도연이란 배우는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자신 속에도 깊은 상처가 드리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연기는 실제처럼 리얼하고, 그 리얼함은 진짜 전도연이라는 몸피 속에 숨겨진 신애, 혹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상처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끄집어낸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상처의 연속이다. 누군가와 함께 숨을 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매일 조금씩 상처를 내는 일이다. 그래서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아무는 것일까. 그 답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적혀 있었고, 그녀 주변을 뱅뱅 도는 종찬이란 인물에 의해 구체화된다. 상처는 ‘누군가’에 의해 나는 것이지만 그 ‘누군가’는 그 상처를 치유해줄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상처는 결국 소독약과 빨간 약도 아니고, 어머니의 정성도 아닌 상처 입은 자의 몸 스스로 아무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인간의 조건을 어찌 참혹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상처 입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빨간 약을 발라주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달릴 수 있게 일으켜주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신애의 주변을 서성대며 심각한 영화의 질문들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관객들을 툭툭 던지는 말로 웃겨버리는 종찬은 그래서 이 고통스런 영화의 ‘비밀의 햇볕’같은 존재다. 종찬으로 대변되는 우리 주변의 바라보는 자들은 또한 우리 삶의 상처들을 온전히 치유되게 만드는 햇볕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햇살은 저 멀리서 비춰주는 것만으로 생명을 살아가게 하니까. 마지막 장면, 후미진 더러운 마당을 담담히 비춰주는 햇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