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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가면', 수애, 주지훈, 연정훈의 이중연기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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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이 드러내는 세 가지 가면

 

변지숙(수애)은 서민의 딸이다. 아버지 때문에 사채 빚 독촉에 내몰려 있는 그녀는 어느 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을 겪게 된다. 자신의 도플갱어인 서은하의 삶을 가면을 쓴 채 살아가라는 것. 대가는 어마어마한 재산과 지위다. 그거라면 지긋지긋한 빚쟁이들로부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악마의 유혹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본래 변지숙이었던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가면(사진출처:SBS)'

변지숙이 쓴 가면은 서민의 가면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절망적으로 선택한 거짓의 삶이다. 이것은 어쩌면 이 땅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이 가진 가면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출근할 때 그들은 누구나 저 마다의 가면을 꺼내 쓰고 나간다. 눈물이 나는 상황에서도 웃고, 웃음이 터지는 상황에서도 무표정을 연기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변지숙의 가면과, 그 가면이 벗겨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건 그 설정이 서민들의 상황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변지숙이 서은하인 줄 알고 정략 결혼한 민우(주지훈) 역시 가면의 삶을 살고 있다. 쇼윈도 부부로서 기업 간 합병하듯 결혼을 선택한 그의 삶은 거짓이다. 게다가 그는 신경증을 앓고 있다. 언제 자신 속에 있는 괴물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어 그는 전전긍긍한다. 그는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상류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행하다. 가면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우의 가면은 상류층이라고 해도 쓰기 싫어지는 가면이다. 그 위치가 만들어내는 가면으로 심지어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씌워진다. 때로는 조작된 가면이기도 하다. 그를 전복시켜 부와 권력을 빼앗으려는 석훈(연정훈)이 정신과 주치의를 이용해 민우에게 씌운 가면은 정신병자의 그것이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민우는 그래서 이런 가면이 덧씌워져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민우가 가면을 쓴 채 정략 결혼해 만난 변지숙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가면을 벗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기막힌 아이러니다. 만일 변지숙이 아닌 진짜 서은하였다면 민우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은하 가면을 썼어도 서민적 삶을 버리지 못하는 변지숙의 모습은 민우의 가면에 균열을 일으킨다. 정략결혼이 점점 사랑으로 바뀌는 과정은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가면을 조금씩 벗는 과정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메피스토펠레스 석훈은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는 너무 많은 가면을 쓰고 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유능한 사업가이자 평범한 가장처럼 보이지만 내심으로는 이 세계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변지숙을 협박하고 이용하려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가끔씩 비뚤어진 그의 사랑 내지 욕망이 엿보인다. 변지숙을 통해 과거 그가 사랑했던 서은하를 보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가 변지숙과 민우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기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신의 야심을 채워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옛사랑을 떨궈내야 하는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석훈이 쓴 이 이중적인 가면은 야망과 개인적인 행복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류사회에 이제 막 진입한 서민 야심가의 자화상이 담겨져 있다. 사랑과 야망 사이에서의 갈등.

 

SBS 드라마 <가면>의 관전 포인트는 그 복합적인 인물들 덕분에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압권은 이 세 인물을 등가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수애도 주지훈도 연정훈도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는 연기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 캐릭터들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가면이라는 설정을 통해 이 이중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때론 분노하고 아파하며 때론 연민과 사랑을 느끼는 그 과정들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그것은 숨겼던 가면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수애와 주지훈 그리고 연정훈은 마치 연기 대결을 벌이기라도 하는 듯 극중에서 팽팽하다. 어딘지 맹한 듯 보이지만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수애나, 진짜 신경증 환자처럼 날카로워 보이지만 때론 허당처럼 따뜻해지기도 하는 주지훈, 그리고 마치 악마에 영혼을 판 듯한 연기하는 자아를 보여주는 연정훈의 연기는 그래서 이 드라마가 흥미로워지는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되어준다. 그들의 연기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