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스크린, 노이즈까지, 다 가진 <연평해전>에 없는 하나
영화 <연평해전>은 지독할 정도로 상업적인 영화다. 누군가 이 영화가 정치적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일면일 뿐이다. 정치적인 것, 그 위에 상업적인 것이 뒤덮고 있다. 먼저 영화관 풍경이 그렇다. 평일 8시40분에 하는 조조영화를 보러간 필자는 그 시간에 영화관이 가득 메워져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른 조조시간도, 그 공포라던 메르스의 여파도 뚫고 가득 메운 관객들.
사진출처: 영화 <연평해전>
그런데 그 관객들의 거의 대부분이 같은 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낯설게도 다가왔다. 군부대에서 단체 관람을 온 것이다. 해군 6만 병력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외부단체관람을 나섰다는 뉴스는 <연평해전>이 기획단계에서부터 철저히 상업적인 전략을 구사했다는 걸 말해준다. 이미 제작에서부터 육, 해, 공군이 모두 참여했고, 그 이야기는 군인들의 단체관람을 어느 정도는 예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예비 관객을 갖고 있는 영화라면 실패할 위험성의 거의 없다. 영화적 재미를 떠나서 이건 군인들의 자발적인 선택만은 아닐 것이다. 보라면 봐야 하는 게 군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기본 관객이 준비된 데다, 무슨 일인지 멀티플렉스 체인 영화관들은 일제히 이 영화의 상영관을 한없이 늘려놓았다. 첫날 667개였던 스크린 수가 5일 후 1013개까지 늘어났다. 누군가의 압력이나 지시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오지만 사실 이건 지극히 상업적인 선택이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군인 같은 예비 관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관들로서도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스크린 수도 늘렸을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보수적인 입장으로 애국주의를 설파하려는 정부의 뜻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 음모론에 불과한 것이지만 영화가 ‘연평해전’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건 이 땅에 사는 국민들로서는 그 누구도 그 의미를 부인하거나 퇴색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은 장병들이 희생됐다는 건 어떠한 정치적인 입장을 뛰어넘는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니 영화의 애국주의적 입장은 휴머니즘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전해질 수 있다. 그런 애국주의적인 잣대만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애국주의 마케팅을 쓴다고 해도 영화관으로서는 오히려 득이 되는 일이다. 그건 잘만 풀리면 엄청난 상업적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니 이러한 선택 또한 지극히 상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이 애국주의 마케팅이나 스크린 독점 같은 이슈들이 터져 나오면서 어떤 노이즈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이 상업적 선택의 덤과 같은 것이다. 이 노이즈를 보수와 진보 같은 전선을 가르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마케팅은 이미 저 <디 워>에서 그 효과를 본 바 있다. 이런 마케팅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힘을 발휘한다.
<연평해전>은 그러니 확보된 관객에 확보된 스크린 수 게다가 준비된 노이즈까지 완벽하게 상업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걸 다 가진 영화가 갖지 못한 한 가지가 있다. 그건 영화적 재미다. 상업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영화가 주어야 하는 긴장과 이완, 중간 중간을 채워주는 소소한 에피소드의 재미가 하나하나 축적되어 후반부의 거대한 감동으로 이어주는 그런 흐름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백미는 결국 당일 날 벌어진 연평해전의 그 핏빛 전쟁 속에서도 숭고하게 희생하고 버텨내려 했던 그 장병들이 주는 먹먹한 감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주는 감동이라기보다는 실제 그 연평해전에서 희생된 장병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분들이 그렇게 차가운 서해 바다 한 가운데서 어떻게 싸웠는가를 더 생생하게 들여다보며, 당시 편안히 월드컵을 즐겼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의미 있다면 바로 그 점 한 가지일 것이다.
<연평해전>은 대단히 상업적인 영화지만 그 상업적이라는 것은 영화가 대중적이라거나 웰 메이드라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소재와 마케팅적으로 상업적인 영화를 뜻한다. 영화는 본래 상업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영화적으로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 대중적이어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은 21세기라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까. 하긴 마지막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우리네 현실이 시대착오적이니 어쩌겠는가. 여전히 보수니 진보니 하며 편 가르기만 하면서 민생은 돌보지 않는 정국도 그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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