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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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 예능 드라마 비웃던 그들 이젠 못 그럴 걸?

D.H.Jung 2015. 12. 2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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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이 만든 만만찮은 파장, 향후 드라마 판도는?

 

예능 드라마? 한 때 이 이상한 조어의 드라마는 드라마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에게는 비하의 대상이었다. 드라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어찌 보면 너무 가볍게도 느껴지고 어찌 보면 만화 같기도 한 이 근본 없는(?) 드라마에 예능 드라마라는 어설픈 이름을 붙인 것에도 아마도 그 비하의 의미는 어느 정도 들어있었다고 여겨진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응답하라> 시리즈 이야기다. 처음 <응답하라1997>을 신원호 PD가 만든다고 했을 때 필자 역시 그건 드라마가 아니라 시트콤일 것이라 섣불리 예단했던 적이 있다. 예능 PD가 드라마를 한다는 걸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과거 <올드 미스 다이어리>를 했던 경력을 떠올리며 <응답하라1997> 역시 시트콤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물론 이런 섣부른 예단은 첫 회가 방영된 후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그건 시트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존 드라마 문법을 따르는 드라마도 아니었다. 드라마와 예능 사이 애매모호한 경계를 밟고 있는 <응답하라1997>은 그러나 성공적이었다. 2012년에 <응답하라1997>이 방영된 후 3, <응답하라1988>은 이 새로운 형태의 드라마가 결코 드라마 바깥에 놓여진 돌연변이가 아니라 어찌 보면 달라지고 있는 미디어 환경과 시청자들의 취향 때문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드라마들의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

 

올해 드라마 판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지상파의 고민과 비지상파의 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상파들은 기존 플랫폼 헤게모니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새롭게 적응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MBC는 기존 지상파 주 시청층의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했다. 그래서 익숙한 자극적인 코드들을 버무려 주말드라마 헤게모니를 만들었다. MBC 주말드라마는 그래서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가져갔지만 잃은 것도 만만찮다. 결코 미래지향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그 선택이 MBC 드라마의 위상을 깎아먹은 것이다.

 

SBS는 이른바 복합장르라는 새로운 드라마의 틀을 만들어내며 이 변화하는 시청자들의 취향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기존 지상파의 헤게모니를 이어가려 노력했다. 현재 하고 있는 <리멤버 아들의 전쟁> 같은 복합장르의 드라마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별에서 온 그대>, <너의 목소리가 들려>, <피노키오>, <냄새를 보는 소녀> 같은 SBS가 시도해온 일련의 복합장르의 실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KBS는 이런 변화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본래 지상파 드라마 헤게모니의 핵심이랄 수 있었던 가족드라마, 일일드라마, 정통사극 안에 머물렀다. 그나마 올해의 성과라고 하면 <프로듀사> 같은 예능과 드라마의 접목을 통해 탄생한 작품 정도일 것이다. KBS 드라마의 부진은 이제 점점 사라져가는 지상파 플랫폼의 힘과 새로운 드라마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취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지상파 드라마들이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고민하며 이런 저런 선택을 하고 있을 때 비지상파 드라마들은 그 틈새를 통해 비상했다. JTBC는 작년 <밀회>를 통해 확고한 드라마의 강자임을 증명했지만 올해는 <송곳> 이외에 이렇다 할 성과를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변화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일이다. JTBC는 지상파와의 차별점으로 정통드라마를 주창해왔지만 올해는 <라스트><디데이> 같은 장르물의 실험을 시도했다. 물론 그 장르물이 성취를 갖지 못했지만 정통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나려 노력한 점은 역력해보였다.

 

비지상파 드라마의 비상을 전면에서 이끈 건 다름 아닌 tvN이다. tvN<응답하라1997>의 성취에 이어 끊임없이 예능적인 성격을 가진 드라마들과 영화적인 드라마들을 공격적으로 포진해왔다. 작년 <미생>이 드라마 전체에 파장을 일으킨 것은 물론 그 원작이 가진 힘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올해 <오 나의 귀신님>이나 <두 번째 스무 살>이 모두 7%대의 시청률을 낸 것은 tvN표 드라마의 지속적인 투자가 성과를 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정점은 모두가 인정하듯 <응답하라1988>이다. 이 드라마는 마치 비지상파 드라마의 상징처럼 세워져 있고, 또한 지상파 본방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케이블과 종편이 새롭게 등장한데다 모바일이나 IPTV 시청이라는 새로운 시청패턴이 등장하고 있는 혼돈기에 이 드라마는 하나의 대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자는 <응답하라1988>의 구성이 너무 허술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기존 드라마 문법 안에서 이 드라마를 판단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이다. <응답하라1988>은 예능의 좋은 유전자들을 가져와 드라마에 이식한 작품이다. 마치 예능이 그러하듯이 캐릭터가 선명하게 세워져 있고 매회 한 가지 주제의 이야기를 마치 한 편의 완결된 영화처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시트콤적인 구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응답하라1988>은 시트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지함과 무게감을 갖고 있다.

 

이렇게 캐릭터를 선명하게 세우고 매회 끊어지는 에피소드로 구성하게 되면 드라마 전편을 굳이 다 보지 않아도 중간 중간에 들어와 충분히 드라마를 즐길 수 있는 틀이 가능해진다. 마치 <12>을 몇 주 못 봤다고 해서 다음 회를 즐기지 못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한 회 분량의 에피소드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개의 이야기들로 짧게 짧게 끊어질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한 회를 다 보지 않아도 이른바 짤방을 통해서도 충분히 드라마를 즐길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응답하라1988>은 현재 16%(닐슨 코리아)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다. 게다가 이만한 화제를 매일 같이 쏟아내는 드라마도 없다. 지상파도 내기 힘든 시청률과 화제성. <응답하라1988>은 현재 플랫폼 변화와 시청자들의 취향 변화 속에 혼돈에 빠진 드라마계의 새로운 대안이 아닐 수 없다. 한때 예능 드라마라고 비하했던 이들 드라마들은 이제 향후 드라마계의 새로운 판도를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