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처선인가, 조치겸인가
‘왕과 나’의 오프닝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차례차례 나온다. 그 순서를 보면 김처선(오만석), 윤소화(구혜선), 성종(고주원)이 나온 연후에 조치겸(전광렬)이 등장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의 중심스토리라인이 김처선과 윤소화의 운명적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종이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국내 사극으로서는 대단한 파격이다. 지금까지의 사극들은 대부분 왕을 첫 번째 자리에 놓고 드라마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즉 성종은 이 사극에서는 조연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하는 인물이 조치겸이다. 멜로 라인을 빼놓고 보면 조치겸은 사실상 이 사극의 뼈대를 형성한다. 김처선이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월화(윤유선) 밑에서 자라면서 내시양성소를 운영하는 소귀노파(김수미) 밑에서 일하게 되는 데는 조치겸이 그의 아버지를 죽게 한 사건에서부터 비롯된 일이다. 드라마적으로 봐도 조치겸은 내시라는 사극 속에서 좀체 눈길을 주기 힘들었던 직종(?)을 빛나게 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드라마가 대중들의 어떤 욕망을 대리해주는 역할을 해준다고 할 때, 조치겸이라는 내시는 여타의 사극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동정이 가는 인물이 아닌 대중들이 욕망할 만한 캐릭터이다.
흔히 ‘내시포스’로 대변되는 조치겸의 카리스마는 내시라는 지위가 가진 선입견(무언가 여성스럽고 비굴한 그런 인물)을 깨기에 족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치겸은 양물을 자르고 내시가 되는 이들에게 그저 거세된 고자가 아닌 그 이상의 대의명분을 만들어주었다. 사실상 ‘왕과 나’란 사극의 초반부 힘은 바로 이 조치겸에 의한 것이라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까지도 조치겸의 부채신공을 흉내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조치겸의 실제모델이 전균이라는 내시라고는 하지만 드라마 상에서 그는 가상의 인물이다. 바로 가상이라는 이 설정이 조치겸이란 캐릭터의 질주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반면 오프닝 타이틀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김처선과 윤소화, 성종은 역사의 실제인물이다. 본래 초기 시놉시스 상에서 이들의 사랑은 좀더 파격적이었다. 궁에 들어가기 전, 이미 김처선과 윤소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까지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극이 초반부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을 빚게 되면서 이러한 애초의 시놉시스 설정은 변경되었다. 그러자 김처선은 윤소화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역할로 굳어졌고, 성종은 윤소화를 잊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인수대비(전인화)의 치마폭에서만 살아가는 마마보이(?)가 되었다. 윤소화 역시 비련의 주인공으로 굳어져 시종일관 눈물로 밤을 지새는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처선과 윤소화, 성종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어려워도 밝고 씩씩한 모습 대신, 참고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 부각됐다. 이것은 역사왜곡 논란이라는 칼날 아래 자유롭게 캐릭터를 운용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왕과 나’는 과거의 사극들과는 전혀 결을 달리하는 사극으로 현대적인 관점이 그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사극이다. 왕의 시각이 아닌 나의 시각으로 그린다는 점만 해도 그렇다. 바로 이런 초기 설정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적 사실을 변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그러니 왜곡 논란은 접어두고 드라마적인 극적 구도에 더 집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왕과 나’는 그 시도 자체가 사극이 더 이상 역사교육의 도구가 아닌 재미 자체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극이 아닐까.
체제순응적이고 수동적인 김처선이 ‘왕과 나’에서 나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히려 조치겸이 그 빈 자리를 채워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가 부정적이든 권력에 눈이 멀었든 그는 어쨌든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좀더 현대적인 시각이 투영된 인물이다. 김처선이 조치겸이 만들어놓은 밥상에서 숟가락을 들기 위해서는 좀더 현대적인 시각을 투영시켜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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