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모계사회’, 며느리는 전성시대인가
TV 드라마 속 남성들은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이산’속에서의 이순재와, ‘사랑이 뭐길래’의 이순재, 그리고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이순재를 비교하면 쉬울 것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극 속의 아버지는 현대로 와서 권위적인 아버지로 존속했으나 이제는 굴욕이 일상화된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위상은 가족드라마 속에서 잘 드러난다. ‘며느리 전성시대’에서 족발집의 이수길(박인환)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이자, 아내인 서미순(윤여정)에게 호통치는 남편이지만 드라마 속에서의 위상은 거의 없다. 즉 드라마가 어떤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그 갈등에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는 말이다.
이 집의 갈등은 주로 이수길의 어머니인 오향심 여사(김을동)와 아내인 서미순, 그리고 며느리로 들어온 조미진(이수경) 사이에서 벌어진다. 조미진의 남편인 이복수(김지훈) 역시 가족 갈등의 주변인물일 뿐이다.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여자들 눈치를 봐야 살기가 편해질 지를 논의하는 정도가 이 집 남자들이 맡은 역할이다.
한편 이 드라마의 청담동집 가장인 조민식(이영하)은 아내인 윤인경(김보연)에게 꽉 붙들려 사는 남자다. 아내 생일날 사위가 찾아온다는 데도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 일을 할 정도다. 이 청담동집의 아들, 조인우(이필모) 역시 집안에서는 어머니인 윤인경에게 꽉 잡혀 살고, 집밖에서는 족발집 막내딸 이복남(서영희)에게 꼭 쥐여사는 인물이다. 심지어 족발집에 가서 손님시중도 들어주고, 이복남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설거지까지 하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코믹한 드라마 속에서 제법 현실적인 무게감을 갖는 성북동집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다. 고준명(장현성)은 어머니인 이명희(김혜옥)에게 꽉 잡혀 이혼까지 하게된 인물이다. 아버지인 고연중(윤주상) 역시 이 집에서 어느 정도 권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아내인 이명희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가족의 꼭지점 위에 여성들이 놓여진, 신 모계사회의 한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집안의 권위를 잡고 있는 것은 오향심 여사와 윤인경 그리고 이명희로 대변되는 여성들인 것.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오향심 여사의 며느리인 서미순과 서미순의 며느리인 조미진, 그리고 이명희의 며느리인 차수현(송선미)은 모두 그 집안의 어머니들과 갈등을 겪는다.
신 모계사회라고 하면 여성들이 살기 편한 세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드라마는 절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가족의 꼭지점만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어졌을 뿐, 그 사고방식은 과거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딸을 며느리로 준 엄마 입장에 선 윤인경은 조미진의 시댁식구들이 보이는 가부장적 모습에 분을 참지 못하지만, 그녀 역시 아들 결혼에 대해서는 같은 모습을 보인다. “우리 딸도 시집살이하는데 나라고 왜 며느리들이지 말란 법 있냐”고 말하는 것.
경제적인 힘과 활발한 사회진출로 인해 가족의 헤게모니를 잡게 된 어머니들 아래서 이래저래 힘든 건 며느리와 자식이다. 사회활동은 용인하지만 퇴근 후의 집안 일은 전적으로 며느리 몫이라는 과거 가부장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들 밑에서 며느리들은 이중고를 겪게된다. 힘든 건 아들들도 마찬가지다. 신 모계사회 속에 살고 있는 아들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권위를 포기하고 아내와의 알콩달콩한 삶을 더 원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강요했을 때 그걸 감싸주는 이가 아들이 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기도 한다.
‘며느리 전성시대’의 서미순이 자신의 고된 시집살이와 비교해 신세대 며느리, 조미진에게 그 박탈감을 호소하듯 시어머니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이 가족의 중심이 되는 신 모계사회 속에서 가족 내의 갈등은 그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어머니들의 손에 달려 있다.
‘며느리 전성시대’는 과거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힘겹게 살아온 며느리들이 이제 전성시대를 맞았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 전성시대를 맞은 며느리들은 그동안 자신을 힘겹게 했던 가부장적 사고방식 그대로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드라마 속 조미진과 차수현처럼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에서 슈퍼맘이 되어야 하는 며느리들에게 지금 시대가 절대로 ‘전성시대’가 아닌 ‘수난시대’인 이유다.
'옛글들 > 명랑TV'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과 나’의 나는 누구인가 (0) | 2007.10.16 |
---|---|
‘왕과 나’, 클로즈업 미학이 가진 양면성 (0) | 2007.10.15 |
안방극장 시대 여는 블록버스터 드라마들 (0) | 2007.10.12 |
시청자를 희롱하는 TV (22) | 2007.10.09 |
생활은 달인을 만들고, 달인은 행복을 만든다 (0) | 2007.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