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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이 사랑을 그리는 방식
사극이 사랑에 빠졌다. ‘이산’의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이 그렇고, ‘왕과 나’의 성종(고주원)과 어을우동(김사랑) 그리고 윤소화(구혜선)가 그러하다. 그런데 똑같은 사랑이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사극과 만나 빛을 발하고 있는 멜로라고 해도 어떤 것은 호평을 받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섬세한 사랑, ‘이산’
이산과 성송연의 사랑은 가까이 앉아 속삭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궁 하나를 두고 있는 거리에서의 사랑이며, 세손과 다모라는 신분이 말해주는 거리에서의 사랑이기도 하다. 둘이 가까워지는 것을 저어한 혜경궁홍씨(견미리)에 의해 심지어 성송연은 그것도 모자라 이역만리 청국으로까지 보내진다. 이렇게 먼 거리를 두면서 그들은 어떻게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산이 처한 생존의 상황 속에서 그에게 성송연이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의 회귀이다. 칼바람이 도는 현실의 무거움 속에서 신분도 잊고 그저 동무라 부를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고 그 그리움은 성송연이라는 인물로 실제화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아무리 격무에 시달리던 이산이라도 성송연 앞에 가면 그 목소리가 애틋하게 변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이 동무로서의 그리움인지 아니면 연인으로서의 그리움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성송연이 청국으로 떠난 이후이다. 사랑의 표현이 극도로 우회적인 수밖에 없는 이 두 인물의 신분적 거리로 인해서 사랑은 더 애틋하게 표현된다. 이산은 갑자기 일을 작파하고 청으로 떠난 성송연을 붙잡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며, 성송연은 이산만을 생각하며 그 수만 리 길을 걸어 되돌아온다.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사를 통한 사랑표현은 극도로 절제된다.
‘이산’이 그려내는 사랑은 따라서 사극으로서의 역사적 사건들과 조우하면서 커다란 무리 없이 흘러간다. 세손과 일개 다모의 사랑이야기에 공감이 가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자체가 가진 판타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극도로 섬세하기 때문이다. 그 키워드는 ‘애틋한 그리움’으로 축약된다.
자극적인 불륜, ‘왕과 나’
이산이 아내인 효의왕후(박은혜)를 두고 성송연을 사모하는 것이나, ‘왕과 나’에서 성종이 본처인 윤소화를 두고 어을우동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비슷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왕과 나’ 다루는 사랑은 순수함보다는 육체적인 욕망으로서의 사랑이다. 성종이 어을우동에게 끌리는 것은 그 도발적인 자태가 불지른 욕망 때문이다. 가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찾아가게 만드는 그것은 우리가 흔히 현대물에서 말하는 그 불륜이다. 이 불륜이라는 단어에는 육욕의 뉘앙스가 늘 포함된다.
따라서 상황은 자극적으로 치닫는데 이것이 실제로는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미 현대물에서 목도한 장면들의 사극 버전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윤소화가 일개 어을우동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은 불륜드라마에서 본처가 애첩에게 사정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왕의 용안에 상처를 내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왕과 나’가 사랑을 그리는 방식은 이처럼 자극적이고 통속적이다.
이것은 ‘왕과 나’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내시의 사랑을 다룬다고 했을 때, 혹자는 그것이 정신적인 플라토닉사랑을 그릴 것이라 예측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거세된 자의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사랑을 마음껏 하는 왕의 모습이 대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의 감정으로 봤을 때, ‘이산’이 손 한번 잡는 것으로 설렘을 만들 수 있었다면 ‘왕과 나’는 합궁에서조차 그런 감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극에 있어서 그것도 왕과 연결된 멜로를 그림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할 점은 자칫 왕의 권위 자체를 흠집 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출에 있어서 왕이 버젓이 불륜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그것은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왕과 나’의 경우 그 초점이 왕이 아닌 나에게 아무리 맞춰져 있다 해도, 있지도 않는 사건까지 끌어들여 실존인물인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그 자체로 어떤 재미를 준다면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다지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사극이 사랑에 빠졌다. ‘이산’의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이 그렇고, ‘왕과 나’의 성종(고주원)과 어을우동(김사랑) 그리고 윤소화(구혜선)가 그러하다. 그런데 똑같은 사랑이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사극과 만나 빛을 발하고 있는 멜로라고 해도 어떤 것은 호평을 받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섬세한 사랑, ‘이산’
이산과 성송연의 사랑은 가까이 앉아 속삭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궁 하나를 두고 있는 거리에서의 사랑이며, 세손과 다모라는 신분이 말해주는 거리에서의 사랑이기도 하다. 둘이 가까워지는 것을 저어한 혜경궁홍씨(견미리)에 의해 심지어 성송연은 그것도 모자라 이역만리 청국으로까지 보내진다. 이렇게 먼 거리를 두면서 그들은 어떻게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산이 처한 생존의 상황 속에서 그에게 성송연이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의 회귀이다. 칼바람이 도는 현실의 무거움 속에서 신분도 잊고 그저 동무라 부를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고 그 그리움은 성송연이라는 인물로 실제화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아무리 격무에 시달리던 이산이라도 성송연 앞에 가면 그 목소리가 애틋하게 변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이 동무로서의 그리움인지 아니면 연인으로서의 그리움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성송연이 청국으로 떠난 이후이다. 사랑의 표현이 극도로 우회적인 수밖에 없는 이 두 인물의 신분적 거리로 인해서 사랑은 더 애틋하게 표현된다. 이산은 갑자기 일을 작파하고 청으로 떠난 성송연을 붙잡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며, 성송연은 이산만을 생각하며 그 수만 리 길을 걸어 되돌아온다.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사를 통한 사랑표현은 극도로 절제된다.
‘이산’이 그려내는 사랑은 따라서 사극으로서의 역사적 사건들과 조우하면서 커다란 무리 없이 흘러간다. 세손과 일개 다모의 사랑이야기에 공감이 가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자체가 가진 판타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극도로 섬세하기 때문이다. 그 키워드는 ‘애틋한 그리움’으로 축약된다.
자극적인 불륜, ‘왕과 나’
이산이 아내인 효의왕후(박은혜)를 두고 성송연을 사모하는 것이나, ‘왕과 나’에서 성종이 본처인 윤소화를 두고 어을우동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비슷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왕과 나’ 다루는 사랑은 순수함보다는 육체적인 욕망으로서의 사랑이다. 성종이 어을우동에게 끌리는 것은 그 도발적인 자태가 불지른 욕망 때문이다. 가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찾아가게 만드는 그것은 우리가 흔히 현대물에서 말하는 그 불륜이다. 이 불륜이라는 단어에는 육욕의 뉘앙스가 늘 포함된다.
따라서 상황은 자극적으로 치닫는데 이것이 실제로는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미 현대물에서 목도한 장면들의 사극 버전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윤소화가 일개 어을우동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은 불륜드라마에서 본처가 애첩에게 사정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왕의 용안에 상처를 내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왕과 나’가 사랑을 그리는 방식은 이처럼 자극적이고 통속적이다.
이것은 ‘왕과 나’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내시의 사랑을 다룬다고 했을 때, 혹자는 그것이 정신적인 플라토닉사랑을 그릴 것이라 예측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거세된 자의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사랑을 마음껏 하는 왕의 모습이 대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의 감정으로 봤을 때, ‘이산’이 손 한번 잡는 것으로 설렘을 만들 수 있었다면 ‘왕과 나’는 합궁에서조차 그런 감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극에 있어서 그것도 왕과 연결된 멜로를 그림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할 점은 자칫 왕의 권위 자체를 흠집 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출에 있어서 왕이 버젓이 불륜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그것은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왕과 나’의 경우 그 초점이 왕이 아닌 나에게 아무리 맞춰져 있다 해도, 있지도 않는 사건까지 끌어들여 실존인물인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그 자체로 어떤 재미를 준다면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다지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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