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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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이산’이 끌리는 ‘대장금’의 유혹

D.H.Jung 2008. 4. 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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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갈등, 익숙함의 반복 혹은 새로운 도전

정조의 삶과 정치세계를 조명하겠다던 ‘이산’의 야심 찬 계획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나서는 노론 벽파 세력들로 인해 뭐 하나 제대로 개혁을 진행하지 못하는 이산의 처지처럼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이산’이 노비개혁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선보이는 순간, 반발하는 장태우(이재용)와 노론 세력들처럼 곤두박질치는 시청률이 ‘이산’을 힘겹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산’은 점점 ‘대장금’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 같다. 거기에는 늘 대장금(이영애)이 지켜드리고픈 한 상궁(양미경)마마 같은 중전 효의왕후(박은혜)가 있고, 그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 성송연(한지민)은 어떻게든 그녀를 도우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왕은 늘 그렇듯 중립적이면서 판관의 역할을 한다.

그 소재들만 봐도 이것은 인물을 바꿔놓은 ‘대장금’으로 읽힌다. 가짜임신 사실을 숨기려는 원빈과 홍국영(한상진)이 탕약을 문제로 삼고 나오는 것이나, 갑자기 어의의 캐릭터가 중요해지는 점, 임신과 관련된 탕약에 대한 중전의 해박한 지식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틀에 박힌 구조 속에서 각자 캐릭터들이 하는 역할까지 ‘대장금’의 그것을 닮았다. 사실 원빈이 성송연을 불러들여 굳이 궁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는 설정은 후에 성송연에게 이 사건의 실마리를 던져주기 위한 억지스런 설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력다툼이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그저 인물들 간의 선악 대결 같은 단순한 게임에 불과하다. 갑자기 왜 ‘이산’은 노비개혁 같은 복잡한 정치이야기를 버리고 ‘대장금’식의 인물게임에 2회 분량을 소모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치이야기가 그저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축된 캐릭터들과 정치이야기가 잘 맞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산’의 캐릭터들은 이병훈 PD 특유의 선악구도 속에 들어가 있다. 분명한 선악구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주인공 편(선)이 처하게 되는 어려움과 그것을 뛰어넘는 이야기(따라서 선이 반드시 이기는)의 단순함이 이병훈표 사극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이병훈표 사극이 본격 정치이야기를 꺼려했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정치이야기는 선악구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역학관계가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산이 정조로 등극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캐릭터들이 자신의 위치를(선악의 팽팽함)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정치를 대리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선을 대표하는 영조(이순재)와 악을 대표하는 정순왕후(김여진)의 대리전이다. 그 속에서 이산이나 성송연, 박대수는 상대적으로 현실정치의 복잡함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가 죽고, 정순왕후의 힘이 약화되며 정조가 등극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선으로 대변되던 정조의 캐릭터는 현실정치 앞에서 달라져야 한다. 홍국영의 캐릭터는 더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실제 역사 속에서도 그러하듯이). 문제는 이들 주변에 있는 캐릭터들이다. 성송연은 여전히 정치와는 상관없는 인물이고, 박대수 역시 그렇다. 진짜 정치를 해야할 인물들, 이를테면 정약용(아직 누가 연기하게 될 지도 결정되지 않은)이나 박제가의 캐릭터는 극의 중심부로 오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이원화될 수밖에 없다. 현실정치의 정조와 홍국영의 이야기와, 나머지 캐릭터들의 정치 이외의(이를테면 궁내의 파워게임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억지로 한 사건에 이들을 끼워 넣으면 캐릭터가 흔들리게 되고, 그렇다고 한 사건을 포기하게 되면 아예 한쪽 캐릭터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대장금’류의 에피소드에 이끌리는 ‘이산’은 아직까지도 이 양자의 이야기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성장드라마와 정치드라마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병훈 PD의 상황이기도 하고, 시청률과 완성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네 사극의 상황이기도 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자유겠지만, 적어도 ‘이산’정도의 사극이 쉬운 결정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다른 ‘대장금’보다는 새로운 사극의 가능성을 ‘이산’에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