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지만'의 잔혹동화, 김수현과 서예지가 맞서는 푸른수염은
"그 앤 날 살려줬는데 난 도망쳤어." 강태(김수현)는 어린 시절 자신을 구해줬던 문영(서예지)의 이야기를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문영에게 말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얘기할 때 강태는 이미 문영이 어린 날 자신을 구해줬던 그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문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때의 그 아이가 자신이라 말하진 않았지만 강태가 그걸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강태는 어째서 첫 재회부터 문영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했고, 문영 역시 강태가 기억해주길 바라면서도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이것은 tvN 토일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그려내는 특별한 멜로의 구도다. 디즈니 동화에나 나올 법한 숲속의 성(?)이 문영의 집으로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위험에 처한 공주를 구하러 달려오는 왕자 따위는 없다. 그건 동화책 속에나 등장하는 이야기이니.
문영이 곱게 자란 공주가 아닌 것처럼, 강태 또한 왕자가 아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 거의 아동학대에 해당할 정도의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가슴 한켠에 여전히 비수처럼 꽂혀 있다. 발달장애 자폐를 가진 형 상태(오정세)에 대한 엄마의 비뚤어진 애정은 강태를 마치 형을 지켜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대하게 했고 그건 강태를 아프게 했다.
엄마가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해준 것도 강태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을 지켜주기 위해서 해준 것이었다. 늘 형을 향해 누워있는 엄마의 등을 애써 껴안으며 흘리는 강태의 눈물에는 자기 존재를 봐달라는 소리 없는 절규가 담겨 있었다. "난 형을 지켜주는 사람이 아냐. 난 형 게 아니라고! 난 내 거야! 문강태는 문강태 거라고! 형 같은 거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에 진저리친다. 고문영이 자신도 강태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형과 엄마를 떠올렸을 게다. 그는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그 자신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엄마에 의해 '필요한 사람'으로서 살아오며 누군가의 도움을 외면하지 못하는 착한 강태는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깨져 빠져버린 형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가 대신 물속에 뛰어들어 형을 구해내지만 도망가 버린 형 때문에 자신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문영이 스티로폼 같은 부표를 던져 강태를 구해주었고, 그래서 강태는 꽃다발을 들고 문영이 사는 그 숲속의 집을 찾아가지만 그는 매몰차게 강태를 밀어낸다. 꽃다발을 밟아버리고 꺼지라고 한다. 그런데 문영이 그렇게 매몰차게 강태를 대한 건 불행의 기운이 가득한 그 집으로부터 강태를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문영이 '푸른 수염'을 가진 백작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부모의 불행을 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 저택에 들여 모든 걸 주었지만 단 하나 지하실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했고, 그 방에는 그걸 어긴 여인들의 잘려진 목이 전시되어 있었다는 잔혹한 이야기. 그 푸른 수염의 이야기는 어딘지 문영을 아이가 아닌 자신의 작품이나 되는 것처럼 대하던 정신이 이상해진 엄마와 어쩌면 그 엄마를 죽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아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강태도 문영도 그래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강태는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오며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조차 버거운 상황이고, 문영은 자신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마저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강태를 밀어내는 상황이다. 부모들의 엇나간 애정으로 인해 깊은 트라우마를 갖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조차 힘든 강태와 문영.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대단한 무언가를 쟁취하거나 성취하는 그런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이 원하는 건 그저 평범한 사랑일 뿐이니.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그래서 그 제목에 담겨 있는 것처럼, 이미 상처받고 저 낮은 곳으로 추락한 이들이(사이코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괜찮아)는 걸 확인하는 드라마다. 유명한 동화작가로 성공한 인물로서 누구 앞에서도 마녀처럼 맞서고 있는 문영이 잠자리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엄마의 환영으로 신음하고, "엄마가 경고했지? 널 구하러 온 왕자도 죽일 거라고."라고 말하는 환영 앞에 오열하는 모습은 그래서 가슴 저릿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가 강태에게 "꺼져"라고 말했던 진짜 이유가 거기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영을 발견하고 달려온 강태에게 문영은 애써 "도망가, 당장 꺼지라고!"라고 외친다. 하지만 강태는 이제 문영의 그 말이 담긴 진짜 의미를 알아차린다. 입으로는 꺼지라고 외치면서 더 강렬하게 강태를 붙잡고 있는 손이 그걸 말해준 것. "그래. 안 갈게." 상처로 인해 정상적일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밀어내는 마음을 애써 이겨내며 강태를 붙들고 있는 문영과, 더 이상 '지켜주는 사람'이 되는 그 버거움을 애써 이겨내며 문영을 꼭 껴안고 있는 강태의 사랑은 그래서 서로를 향하는 것이면서 자신을 극복해가는 과정처럼 그려진다.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특별해지는 건 이들의 사랑이 대단한 걸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그 지점 때문이다. 부모 세대들에 의해 평범한 사랑조차 쉽지 않은 우리네 청춘들의 현실을 마치 잔혹동화라는 틀을 통해 은유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적어도 이들이 사랑할 수 있기를 시청자들도 간절히 바라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일 게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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