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 온', 부자와 가난한 자는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하게도 다소 뻔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주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했다. JTBC 수목드라마 <런 온>에 그런 오해를 갖게 된 건, 이 드라마의 겉면이 멜로 장르의 틀을 보여주고 있고 그 멜로에는 사는 환경이(부유층과 서민으로 나뉘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남녀 인물들이 포진해 서 있어서였다.
국회의원과 유명배우의 아들인 기선겸(임시완)은 호텔에서 살며 단거리 육상 국가대표로 뭐든 잘 할 것 같은 '엄친아'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오미주(신세경)는 영화 통번역을 하며 살아가면서도 자존감이 넘치는 캔디형 인물이다. 또한 서명그룹의 적통으로 스포츠 에이전시 대표인 서단아(최수영)와 미술대학생인 이영화(강태오)의 구도도 그렇다. 그 구도만 보면 이들이 엮어가는 이야기가 저 신데렐라 혹은 온달 스토리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런 온>이 그런 드라마가 아니라는 건 보면 볼수록 더 확실해진다. 그건 이 부자인데다 모든 걸 갖춘 인물과 그저 평범한 서민인 인물이 서로 만나 관계를 맺어가는 그 과정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일방적으로 천거하는 그런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이 드라마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다른 존재들이 동등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그 엇나감을 경험하면서도 조금씩 소통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영화와 서단아가 그림을 두고 벌이는 대화는 이런 드라마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영화에게 그림을 의뢰했던 서단아는 아직 다 그려지지 않은 작품에 대해 "이거 내 그림이냐"며 "지금 당장 내 놔 내 그림"이라고 말한다. 기분이 상한 이영화가 그림이 무슨 "자판기 커피"냐고 되묻자 서단아는 오히려 "아닐 건 뭐냐"고 몰아세운다.
서단아의 화법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의 모습을 당연하게 담아낸다. 그는 모든 걸 거래로 생각한다. 심지어 그림에도. 그래서 그 그림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잘 보지 못한다. 그는 의뢰하면 뭐든 되는 삶을 살았으니까. 그래서 마감을 지키지 않는 이영화에게 그가 쓰고 있는 건 "내 시간"이라고까지 말한다. 결국 이영화는 참지 못하고 물감을 마구 문질러 그림을 망쳐놓는다. 그 행위는 그 그림을 서단아가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걸 보여준다. "무슨 짓이야 내 그림에."라고 말하는 서단아에게 "그리는 건 저예요"라고 이영화가 답하고 "그걸 내가 모르냐"는 서단아에 말에 이영화는 딱 잘라 "모르고 있다"고 답한다.
"내거야. 내가 당신 줄 때까진 내 거라고." 이영화의 그 말은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드러내면서 서단아와 그가 왜 서로 같은 한국말을 쓰면서도 소통하지 못하는가를 잘 말해준다. 서단아는 늘 의뢰하고 명령하며 되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는 삶을 살아왔다. 심지어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그는 기선겸이 소속사에서 나가려 하자 빠르게 그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그는 가진 게 많아 보이지만 그런 삶 속에서 누군가와 진정으로 소통할 수 없게 된다. 그걸 깨고 들어온 이영화의 그 말 한 마디는 그래서 서단아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늘 말하기만 하면 되던 그 삶에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 깨닫게 되는 소통 부재의 자신의 실체랄까.
이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기선겸과 오미주가 그간 소통 부재 상태에서 조금씩 소통 가능한 상태로 넘어오게 된 그 과정들이 새롭게 보인다. 오미주는 자신도 모르게 기선겸과 함께 서 있을 때 소외감 같은 걸 느끼고, 술에 취해 용기를 내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그러는 자신이 너무 찌질하다고 느낀다. 기선겸의 선의와 진심과는 상관없이 그 스스로 느끼는 그런 감정은 늘 갑질을 당하면서도 애써 버티며 살아왔던 오미주의 삶에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그런 차이와 그래서 생겨나는 소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선겸과 오미주는 노력한다. 영화라는 걸 잘 보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기선겸은 오미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가 얘기했던 영화 <제리 맥과이어>를 챙겨본다. 그리고 자신이 그 영화를 봤다고 오미주에게 말한다. 물론 재미는 없었다고.
그렇게 취향도 생각도 달라 그 영화가 재미없었다는 기선겸이지만 그는 그 영화가 "따뜻했다"며 그 이유가 바로 그 영화를 이야기해준 오미주씨 때문이라고 자신의 진심을 표현한다. 그는 주절주절 영화 속 이야기를 꺼내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만, 오미주는 그런 그에게 "왜 그렇게 두서가 없냐"고 되묻고는 그의 입에 입맞춤으로서 간단히 그 마음을 전한다. 어쩌면 말로는 잘 되지 않는 소통이 있고, 그래서 엇나가기 일쑤지만 좋아하는 감정에 서로가 노력해가면서 조금씩 소통에 도달해가는 과정.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고 이 드라마는 묻고 있다.
그래서 <런 온>은 그 흔한 신데렐라나 온달이 등장하는 그런 클리셰 설정의 멜로와는 다른 결을 보여준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빈부에서도 차이가 나고 사는 방식도 다른 두 사람이 그저 그 차이 때문에 소통할 수 없던 걸 조금씩 넘어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 섣부른 오해를 거둬놓고 다시 보니, '런 온'의 그 좋은 대사도 멜로의 구도도 어쩌면 바로 이 주제의식을 위한 합당한 포석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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