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의 윤여정에서 윤여정의 '미나리'로
배우 윤여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글로벌한 신드롬 수준으로 퍼져가고 있다. 최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고 내놓은 소감 중 "고상한 척하는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인정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SNS를 뜨겁게 달구며 찬사로 이어진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고상한 척하는'이라는 말이 직설적이지만, 다름 아닌 윤여정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솔직함' 혹은 '할 말은 하는' 뉘앙스로 비춰진다. 거기에는 이 칠순의 배우가 영화 <미나리>의 순자를 통해 그려낸 사랑스러움과 따뜻함 그리고 쿨함이 뒤섞여 전 세계 대중들을 매료시킨 'K할머니'의 초상이 드리워져 있다.
도대체 무엇이 윤여정에 대한 글로벌 신드롬을 만들고 있는 걸까. 아카데미에서 과연 여우조연상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는 물론 우리에게는 엄청난 사건일 수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윤여정에 대한 글로벌 대중의 애정은 뜨겁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려면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전 세계의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미나리>라는 작품과 그 속에서 시대의 아이콘처럼 서 있는 순자라는 인물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미나리>는 봉준호 감독 말대로 보편성을 가진 영화지만, 동시에 여성 서사로도 읽을 수 있는 영화다. 가부장적인 한국인 아버지에 자본주의적인 미국식 사고방식을 더한 제이콥(스티븐 연)이라는 가장이, 그와 정반대편에 서 있는 순자(윤여정)로부터 삶의 지혜를 한 수 배우는 이야기처럼 읽을 수도 있어서다. 제이콥과 순자를 남성 서사와 여성 서사를 대변하는 인물로 놓고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많은 것들이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제이콥이 척박한 땅에 어떻게든 물을 대서 대량으로 작물을 재배해 큰돈을 벌려는 모습은, 순자가 물이 있는 곳을 찾아가 미나리씨를 뿌리고 그렇게 자라난 미나리로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먹고 건강해질 수" 있게 하려는 모습과 대비된다. 작물에 대한 이런 서로 다른 서사는 몸이 안 좋은 데이빗(앨런 킴)을 대하는 두 사람의 방식의 차이로도 나타난다. 제이콥은 자신이 병아리감별사로 일하는 공장을 찾아온 데이빗에게, 맛이 없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수컷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꼭 쓸모가 있어야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제이콥으로부터 그런 '남성다움'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껏 뛰지도 못하는 데이빗은 그래서 순자가 "Pretty boy"라고 말하자 발끈하며 이렇게 말한다. "I'm not pretty, I'm good looking!" 하지만 함께 산책을 하고 좋은 공기를 마셔서 건강해진 데이빗을 순자는 "Strong boy"라고 불러준다. 여기서 <미나리>의 순자가 말하는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미나리처럼 애써 드러내지 않고도 아름답게 어디서나 피어나고,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사람들 또한 치유해주고 위로해주며 함께 버텨주는 그런 '강함'. 마지막 장면에 제이콥이 데이빗과 함께 순자가 물가에 뿌려 놓아 아름답고도 강인하게 자란 미나리를 보며 "할머니가 자리를 참 잘 고르셨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다시 윤여정 이야기로 돌아오면, <미나리>에서 순자라는 인물을 매력적으로 그려낸 건 윤여정 덕분이다.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지만 전적으로 윤여정의 해석에 의해 구현된 순자는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할머니는 아니다. 데이빗이 말하듯 순자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다. 물론 그 이역만리 딸을 찾아오며 고춧가루에 멸치까지 바리바리 챙겨오는 전형적인 한국 엄마의 모습이 있지만, 쿠키를 만들기보다는 화투를 치고, 욕도 하고, 남자팬티를 입고 잠을 잔다. 보통의 우리네 할머니(엄마)들이 요리하고 육아에 능숙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윤여정이 표현해낸 순자가 'K할머니'로 불리며 글로벌한 화제가 된 건, 윤여정이 지금껏 연기 인생에서 해온 작품 선택과 인물 해석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로만 보면, 그는 김기영 감독의 <화녀>를 통해 청춘스타가 아닌 악녀로 데뷔했고, 박철수 감독의 <어미>에서는 딸을 자살하게 만든 인신매매범들을 처단하는 엄마 역할로 역시 전형성을 깨는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할머니 역할도 마찬가지다. <바람난 가족>이나 <죽여주는 여자>가 그 사례다. 즉 <미나리>의 순자 K할머니는 그냥 탄생한 게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윤여정이 해왔던 연기 필모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나리>의 윤여정은 그래서 윤여정의 <미나리>로도 읽혀진다. 그래서 이 <미나리>가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나 위기 속에서도 더 소중한 가치로서의 '사람'이 있고, 인위적인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순리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미나리를 통해 전하는 '시대의 메시지'는,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그 삶을 연기에 더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젊고, 상대방을 배려하지만 할 말은 하며, 무엇보다 위트 있는 웃음과 유머가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드러내주는 그런 인물. 이러니 신드롬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사진:영화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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