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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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세상

‘홍천기’, 판타지 사극이라고 현실을 못 볼까

D.H.Jung 2021. 9. 2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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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기’, 간만에 잘 빠진 판타지 사극의 탄생

홍천기

하람(안효섭)이 볼 수 있었을 때 홍천기(김유정)는 앞을 못 봤고, 홍천기가 보게 됐을 때 하람은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이 설정은 홍천기와 하람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은 이 드라마를 더 애틋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사랑은, 서로를 동시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어떤 가림막이 세워지고 그래서 그 가림막을 뛰어넘어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의 애틋함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어려서 기우제 날 우연히 만나 함께 복숭아 서리를 나서고 복사꽃 아래서 조금씩 마음을 나눴던 홍천기와 하람. 당시 앞 못 보던 홍천기는 그 날 나누었던 말과 복사꽃 향기로 하람을 기억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우제 날 홍천기와 하람의 처지는 정반대가 된다. 기우제의 희생 제물로 서게 된 하람의 몸속으로 마왕이 깃들고, 그걸 알게 된 삼신(문숙)이 마왕이 깨어나는 걸 막기 위해 하람의 눈을 빼앗고 그 눈을 홍천기에게 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홍천기는 눈을 뜨고 하람은 눈이 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두 사람은 다시 운명처럼 만나지만 서로를 단박에 알아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람은 점점 어려서 만났던 복사꽃 아래 소녀와 홍천기가 겹쳐지고 호위무사를 통해 그가 바로 그 소녀였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복수를 꿈꾸는 그는 홍천기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다만 한 걸음 떨어져 그를 도울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홍천기도 하람이 그 때 복사꽃 아래서 만났던 소년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그림 오디션인 ‘매죽헌 화회’는 ‘본다’는 사실을 모티브로 한 <홍천기>의 성장서사와 운명적 사랑이야기가 잘 드러난 에피소드다. 그림 고수들이 모여든 가운데, ‘달빛 아래 핀 매화가 향이 그윽해, 나비가 봄이 벌써 온 줄 알고 떼 지어 날아든다’는 1차 화제의 그림으로 홍천기는 하늘로 곧게 뻗은 매화가지와 둥글게 피어오른 달 그리고 그 매화 향기를 찾아 날아든 듯한 나비를 그렸다. 하지만 그 나비 화제는 사실 양명대군(공명)이 모작의 범인을 찾기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모두가 홍천기의 그림에 탄성을 자아낼 때 양명대군은 그 매화의 그림이 너무 과하다는 트집을 잡아 불통을 준다. 나비 그림을 통해 모작의 범인이 바로 홍천기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에 승복할 수 없는 홍천기가 양명대군에게 불통의 이유를 묻고 팽팽한 설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때 갑자기 나타난 나비 한 쌍이 홍천기가 그린 매화 그림 위로 날아와 앉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그 광경을 보던 고화원 성화 한건(장현성)이 홍천기에게 완통패를 써 그를 통과시킨다. 그가 이번 그림 대회를 통해 찾으려던 ‘신령한 화공’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매죽헌 화회의 나비 에피소드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 앞에 선 청춘들을 위한 위로처럼 보인다. 품계와 신분을 공개하지 않고 뽑는 일종의 ‘블라인드 오디션’을 한다 했지만 결국 양명대군의 판단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는 것 아니냐고 항의하는 홍천기에서 스펙사회에서 질식되어 가는 청춘들의 초상이 그려진다. 그렇게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을 알아봐주는 나비 한 쌍의 이야기는 그래서 판타지지만 믿고픈 통쾌한 서사로 다가온다. 

 

또한 매죽헌 화회는 홍천기가 하람을 알아보게 되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즉 2차 화제를 낼 주인공으로 양명대군이 하림을 지목하는데 그가 낸 화제가 홍천기의 기억 속 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것. ‘봄기운 산중에 가득하고 복사꽃 사이를 노니는 데 홀연 복숭아가 기다려져 아침저녁으로 찾는구나’. 그 화제는 다름 아닌 홍천기와 하림이 어려서 복사꽃 아래를 뛰어 놀던 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즉 ‘보지 못한다’는 은유이자 설정은 <홍천기>에서 여러 갈래로 활용된다. 그 첫 번째는 스펙이 없다는 이유로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청춘이라는 알레고리로 쓰이고, 두 번째는 사랑에 있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눈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 물론 그것은 이 드라마가 소재로 삼고 있는 그림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다. 눈을 그려 넣어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는 ‘화룡점정’의 고사를 뒤집어 그렇게 그려낸 신령한 그림에 마왕을 봉인한다는 설정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홍천기>에 등장하는 나비에는 그래서 눈 모양이 날개에 담겨 있다. 나비를 자신의 수결로 그려 넣는 홍천기는 눈을 그려 넣는(보게 만드는) 화공이다. 마왕이 봉인된 하람의 뒷목덜미에는 나비문양이 새겨져 있다. 봉인이 깨지면 나비문양이 사라지고 마왕이 깨어난다. 결국 홍천기라는 신령한 화공이 해야 하는 일은 그 마왕을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봉인하고 하람을 본래대로 되살리는 일이다. 이 판타지 설정을 잘 들여다보면, 매죽헌 화회에서 매화 그림으로 진짜 나비를 끌어들인 그 에피소드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건 향후 그가 하람의 몸에 깃든 마왕을 나비처럼 그림 속으로 끌어 들일 거라는 복선일 테니 말이다. 

 

화룡점정의 고사를 활용한 판타지 설정, 그리고 ‘보지 못한다’는 은유를 통해 그려내는 청춘들의 성장 서사와 더불어 그려지는 운명적인 사랑의 알레고리. 간만에 잘 빠진 판타지 사극의 전조가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마왕 같은 다소 황당해 보이는 판타지에 괜스레 눈 멀지 말고, 그 판타지가 그려내려는 결코 얕지 않은 이야기에 눈을 뜰 일이다. 판타지 사극이라고 해서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건 선입견에 눈먼 자들의 편견일 뿐이니.(사진:SBS)